240화
나지윤의 계획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과연 이름이 잊혀졌다 해도 한국의 호국 가문이었던 답청문의 자제라 할 만했다.
결과만 놓고 보면 뻔하고 단순해 보이는데 오히려 그렇게 뻔하고 단순한 것을 의심하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전개했다는 데서 그 실력이 돋보이는 것이다.
허나, 스미하라 스에코 역시 일본의 손꼽히는 세력인 신풍회의 가신 가문인 스미하라에서 재녀(才女)로 인정받은 인재였다.
'단 1%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100%의 확률로 일어날 수 있는 일 중 하나다.'
스에코는 그 말에 따라 혹시 모를 가능성에 대비했다.
'저는 서방님을 한 번 만나 뵙고 가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세요.'
나문기에게 그렇게 말을 전하고 일부러 집무실 근처에서 잠시간 대기했다.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나지윤이 회합의 때를 노리는 '멍청한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는데 그 예상이 들어맞았다.
'반란'이 일어났고 예상 이상의 수가 그 반란에 참여하여 경계하던 무사들과 격돌했다.
어느 쪽이든 여유라곤 단 하나도 남지 않을 만큼의 백중세였는데 또한 그렇기에 이때에 일을 벌일 거라곤 예상하기가 힘들었다.
서로의 세력이 백중세라 반란을 위해 꼭 필요한 장부를 노릴 인원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데 여기서 변수가 생겼으니 바로 잠룡과 검봉이다.
이미 현역 무림인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실력을 지녔다는 두 사람이 나지윤에게 가담하면서 바로 그 장부를 노릴 수 있는 조커가 되었다.
…하지만 그 조커는, 조커를 대비했던 나의 재지(才智)를 넘지 못한다.
스에코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국의 개미굴에 나타났던, 잠룡과 검봉에 의해 붙잡힌 간부는 다름 아닌 그녀의 가문에서 파견한 무사였다.
신풍회와 협조하고 있는 세력의 '시술'을 받은 스미하라가의 하련무사(下鍊武士).
그리고 지금 잠룡과 검봉을 상대하는 건 평범한 하련무사 다섯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어야만 임관 자격을 획득할 수 있는 '중진무사(中進武士)'였다.
설령 시술을 받아 내공이 폭증한 하련무사라 해도 중진무사를 이길 순 없다.
정보로는 검봉은 내공이 폭증한 하련무사에게 패배했고 잠룡은 그렇게 유지은이 힘을 다 빼놓은 하련무사를 겨우 이겼다고 했다.
즉 잠룡과 검봉은, 변수를 더한다 해도 중진무사 둘을 상대로는 결코 이길 수 없다는 말이다.
심지어 어린 나이임에도 하련무사 이상의 실력을 가졌다 평가받는 그녀마저 있다.
그녀와 대치하고 있는 나지윤은 결코 그녀를 이길 수 없다.
더더욱.
이 대치는 오래갈 수 없다.
이미 연락이 갔고 늦어도 7분 안에 회합을 파하고서라도 구원 세력이 오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그녀의 불쌍한 '서방님'은 정말로 늦어도 7분 안에 장부를 탈취하고 자리를 피해야만 했으니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스에코가 굳이 서두르지 않고 나지윤을 조롱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저 이렇게 여유롭게, 고고하게 자리를 지키기만 해도 그녀는 공을 세우고 답청문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쾅-!
일은 그녀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뭐야?"
잠룡과 검봉을 몰아붙이던 중진무사들이 무언가 나쁜 장난이라도 벌어진 것처럼 밀리기 시작했다.
스미하라가의 무사들은 이아이, 거합(居合)을 기반으로 한 발도술을 특기로 하는 무공을 익히고 있다.
그 특유의 빠르면서도 치명적이고 강력한 일격은 한 수 아래의 상대에게 더 큰 우위를 보장한다.
한데 그 발도술이, 잠룡과 검봉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고 있었다.
쾅!
힘과 속도가 장점인 발도를 도진이 정면에서 대응하여 부딪쳤다.
"……!"
겨우 학생이, 30년을 고련하여 그 영광스러운 이름을 따낸 중진무사의 검을 정면에서 맞상대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그의 평정심이 흔들리고 말았다.
훅-!
그리하여 궤도가 미미하게 틀어진 다음 일격을 도진이 마치 바람처럼 자연스럽게 피해 버렸다.
피하고자 해서 피한 게 아니라 정말로 검의 힘에 밀리는 바람처럼, 그러는 것이 당연한 현상으로 보이는 것처럼 거리를 벌린 것이다.
고급 무공일수록 마음의 흔들림이 가져오는 파장은 커지는 법이니 이치를 구사하는 도진을 상대로 중진무사는 치명적인 빈틈을 보이고 말았고 그것이 승부를 갈랐다.
스각!
"……!"
중진무사가 검을 회수하려는 틈을 노려 도진이 그 손목의 힘줄을 잘라 버렸다.
거합은 그 속도와 파괴력만큼이나 실패했을 경우의 틈이 컸으니 공격에 대실패한 중진무사는 도진의 검을 막을 수 없었다.
카랑!
힘줄이 잘린 그는 의지와 관계없이 검을 놓쳤고, 이어진 도진의 발도술 못지 않은 검격의 연속에 나머지 손발의 힘줄도 잘려 무력화되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지은을 상대했던 중진무사 역시 마찬가지의 모습이 되어 바닥을 굴렀다.
"…있을 수 없어."
스에코가 중얼거렸다.
마치 그 무공을 '알고 있는 것처럼' 유지은은 상대의 움직임을 읽고 한 발 앞서 움직임으로써 중진무사를 압도해 버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야말로 겨우 학생 두 명에게 스미하라가 자랑하는 중진무사가 3분도 안 되어 제압당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 버렸다.
그녀의 탓만은 아니었다.
도진과 유지은은 그때와는 이미 완전히 다른 경지에 있었으니 특훈을 통한 두 사람의 발전이 상궤를 벗어나 있을 만큼 눈부셨던 것이 더 큰 이유였다.
허나 자신에게 너그러울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랐던 그녀는 평생 다시 없을 계산 착오로 인한 실패에 머리가 멍해져 버렸고 그렇게 무방비해진 스에코를 제압하기 위해 도진이 움직이려 할 때였다.
"흘흘. 그러게 내 말하지 않았소, 아가씨. 소문주를 얕보면 안 된다고."
"……!"
부드럽고 자애로운 목소리가 돌연 이 장소에 끼어들었다.
결코 위협적이지 않은, 그러나 그 목소리의 주인이 두른 기세에 나지윤과 유지은은 물론이고 도진마저 표정이 무섭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여유롭게 산책을 나온 듯한 노인이었다.
개량 한복을 입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그 시대에서 뚝 떨어진 듯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거기에 한 손에 검을 들고 있으니 그야말로 은거기인, 혹은 평생 검을 벗 삼아 살아온 검선(劍仙)의 풍모를 두른 듯하다.
'고수.'
-호오, 제법이로구나.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경지는 사자군, 호군자, 징악검군 등의 무림 르네상스 시대를 풍미하고 절대강자로 군림하고 있는 이들에 비하여도 결코 모자라지 않다.
일견 부드럽고 자애로워 보이지만 그것은 세파에 깎이고 또 깎여 결국 매끈해진 일부의 모습일 뿐이다.
숨겨진 부분은 그렇게 깎임으로써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과 같다.
-저 할아버지는 지금의 난 힘들 거 같은데, 후배.
유지은의 전음에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저도 그럴 거 같네요.
최소한 반세기 이상을 검과 함께 한 무인이다.
이 시대의 환경과 무공이 좋지 않다 해도 반세기 이상을 한눈 팔지 않고 무의 길을 걸은 무인의 실력은 결코 폄하될 수 없으며 쉽사리 짐작할 수 없다.
그 무인의 기세가 이 자리를 메우는 가운데 나지윤의 목소리가 깊게 울렸다.
"…우 할아버지."
'할아버지?'
나지윤의 말에 도진의 시선이 다시 노인에게로 향했다.
닮지 않았다.
외모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그뿐 아니라 기질마저 혈육이라기엔 차이가 있다.
장호에게 배운 것들로 미루어 판단하자면 혈육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지윤의 목소리엔 노인의 기세마저 밀어낼 정도의 감정이 담겨 있었고 그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답청문의 최고 장로.
그리고 웨이브 테크놀로지 시스템의 부대표가 바로 그, 우호문이었다.
현 가주인 나문기 이전의 세대, 그러니까 나문기의 아버지 때부터 답청문을 위해 일했던 사람.
전대 문주가 잠시 공석이 되었을 때 문파의 중심을 잡았던 사람이며 한 점의 욕심도 없이 나문기가 문주가 되었을 때 가장 기뻐했던 사람.
답청문의 가장 오래된 문도이자 문파의 중심이었던 사람.
…그러나 나문기와 함께 변해 버린 '배신자'가 되어 버린 사람이다.
그 실력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최소한 이 자리의 최고수라는 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그가 천천히 다가오며 말했다.
"소문주의 계획을 경계한 건 칭찬할 만하지만 보시오, 아가씨. 결국 당하게 되지 않았소."
거리를 좁히며 하는 우호문의 말에 스에코는 이를 까득 물었다.
"…그 소문주라는 칭호, 그만둬 주시지 않겠어요? 거슬리거든요."
소문주.
답청문의 계승자를 뜻하는 그 단어에 스에코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우호문.
나문기 이상으로 답청문에서 중요한 사람이라 스미하라가는 평가하고 있었다.
답청문의 최고수이면서 한국 전체로 범위를 넓혀 보아도 손꼽히는 고수일 것이 확실한 사람이었으니까.
그 기질과 성향으로 보았을 때 결코 스미하라에 협조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기에 극도의 경계를 하고 있었다.
'나문기를 아들처럼 여기고 있기 때문으로 판단됩니다.'
스미하라의 분석팀은 그렇게 판단했다.
우호문은 당대의 안주인에게 연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당대의 문주와 이어졌고 그는 마음을 접었다.
한데 문주가 요절하고 만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해서 둘이 이어지거나 우호문이 마음을 표현하는 일은 없었다.
대신 그는 나문기를 아들처럼 여기고 지탱해 주었다.
그런 나문기를 위해 그가 신념을 꺾었다고, 그들은 판단한 것이다.
다만 모든 걸 버린 건 아니었다.
그는 결코 스에코를 '소문주'라 부르지 않았다.
철저하게 '아가씨'라 부르며 남 취급을 했고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계획이 실패하고 도움을 받을 상황에서 나지윤을 소문주라 칭하고 자신을 아가씨라 칭하는 우호문의 모습에 부서져라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스에코가 드물게 감정을 강하게 드러내며 표독스럽게 쏘아붙였음에도 불구하고 우호문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구우웅-
미소를 잃지 않으며, 내공을 일으켰다.
"큽."
"……."
나지윤이 이를 악물며 온몸에 힘을 주었다.
그러지 않으면 그대로 무릎을 꿇고 말 정도로 우호문의 기세는 강렬했다.
꾸욱-
도진과 유지은은 각자의 검을 세게 쥐고 역시 내공을 끌어올렸다.
실패하면 뒤가 없는 일이었다.
나지윤은 물론이고 도진과 유지은에게도 치명적인 일이 될 터.
때문에 기필코 그를 넘어 장부를 손에 넣어야만 했다.
-쉽지 않겠구나.
-예. 하지만 해야 할 일이니까요.
해야만 한다가 아니라 한다.
언제나 그렇듯 결론은 정해져 있었고 도진은 그렇게 확정된 결과를 만들어 내야만 했다.
위험을 감수하고 모험을 해서라도.
그렇게 결론 내린 도진이 몸 속을 도는 천마기에 의지를 담으려 할 때였다.
스각-
"……!!"
"……아?"
피가 튀었다.
최소한으로 튄 피가 우호문의 고급 한복에 지워지지 않는 무늬처럼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피는, 스미하라 스에코의 것이었다.
"……."
왜?
그런 눈을 하는 스에코였으나 검 이후 뻗은 손에 아혈(啞穴), 말을 할 수 없게 만드는 혈을 점혈당한 탓에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깊게 베인, 그러나 목숨을 잃을 정도는 아닌 상처를 입은 스에코가 쓰러졌다.
충격적인 상황을 연출한 우호문은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검을 조용히 수납하고선 여전히 미소지은 얼굴로 나지윤을 마주했다.
"소문주. 회합장으로 가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