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240화 (240/741)

239화

도진이 입안하고 나지윤이 구체화하여 실행한 계획은 몇 가지 변수가 있었으나 문제없이 착착 진행되었다.

"어떻게든 인원을 빼서 착수를 할 수 있게 되었어."

"오, 고마워. 역시 내 친구야."

계속된 도진의 방문에 나지윤은 결국 개미굴 사건의 연장 선상에 있는 조사 의뢰를 수락하게 되었다.

이미 정부를 포함한 각계에서 조사가 진행 중인 사안이었기에 당장 이렇다 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지윤은 그마저도 제대로 제공하지 않았다.

진실을 분명하게 포함한다.

하지만 그 진실을 거짓으로 가득한 정보에 섞어 거짓에 물들여 버린다.

그런 자료를 제공하여 유의미한 정보를 얻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물론 그런 것을 도진이나 유지은이 알 수 없도록 철저하게 가공했고.

…외부에서는 그렇게 보이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나지윤은 이쪽 업계의 사람답게 완벽했고 유지은 또한 궤를 달리하는 천재였기에 어색함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도진 또한 그에 못지 않은 모습을 보여 주었으니 장호에게 배운 '사람 보는 법'을 포함한 여러가지 기술과 연신극기공을 통하여 육체를 완벽하게 제어한 덕분이었다.

"잘 먹히고 있어."

그런 노력이 빛을 발하여 목적했던 바를 달성할 수 있었다.

이제 도진과 유지은이 답청문의 본사를 방문하는 건 당연한 일이 되었고 의심을 사지 않았다.

들인 노력에 비하면 초라할 수 있는 일이었으나 목적이 온전히 여기에 있었으니 이것으로 충분했다.

남은 건 결행일에 장부를 탈취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순조롭게 계획이 진행되는 중에 장호와 유지은이 의문을 제기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걸리는구나.

"좀 이상한 거 같아. 후배."

-어떻게 말씀이십니까, 장 스승님.

"뭐가 그렇게 이상한가요?"

도진이 되물으니 장호와 유지은은 비슷한 대답을 내놓았다.

-마치 커다란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느낌이다.

"음…… 비유하자면 누군가가 쓴 시나리오대로 움직이는 느낌이랄까?"

그러면서 유지은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계획을 간단히 하면 이런 거잖아."

답청문과 신풍회의 회합으로 인해 본사의 경계가 느슨해진다.

이 느슨해진 경계를 나지윤파의 사람들이 무력화하고, 그렇게 열린 길을 나지윤이 도진, 그리고 유지은과 함께 돌파하여 장부를 탈취해낸다.

탈취해낸 장부를 이용하여 나문기의 부정을 폭로, 실각시키고 관련자들은 징벌한다.

이후 나지윤은 벌을 받아야 할 자들이 벌을 받은 뒤 정화된 답청문의 문주 자리에 오른다.

"…이상하지?"

눈을 마주한 유지은의 물음에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실 저도 느끼고 있는 부분이었어요."

계획이 너무 스무스하게 진행되고 있다.

변수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얼마든지 있을 만한, 예상 가능한 수준이었고 그 외의 부분에서 마치 분기가 없는 이야기처럼 일직선으로 진행이 되었다.

물론 세상이 꼭 자극적이고 스펙터클해야 한다고 정해진 건 아니니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는 게 무조건 이상한 건 아니다.

오히려 세상엔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고 말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그 압도적으로 많은 경우에 포함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도진과 유지은, 나지윤이 이번 계획에 특히나 '자연스럽게'를 의식했기에 더 강하게 느꼈는데 지금 일의 진행은 그런 자연스러움이 느껴지지 않고 인위적인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느끼는 이유 중 하나가 유지은이 말했던 '시나리오'다.

"이건 꼭 지윤이가 주인공인, 지윤이를 문주로 만들기 위해 준비한 시나리오 같단 말이야."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면 딱 그런 소설 한 편이 나올 것만 같다.

이러하니 유지은은 물론이요 장호도 의심을 하는 것이었고 사실 도진도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확신하지 못하는 건 그동안 보고 겪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지금 마주하고 있는 또래의 매혹적인 소녀가 그렇다.

"안녕하신지요."

"아, 예. 안녕하세요."

고혹적인, 그리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까만 생머리의 소녀였다.

유창한 한국어이지만 발음에서 결국 외국인임이 드러나는 그녀는 일본인으로.

"지윤의 약혼녀인 스미하라 스에코라고 합니다."

……충격적이게도 나지윤의 약혼녀였다.

처음 들었을 땐 과연 도진조차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농담 같은 게 아니라 그녀는 진짜로 나지윤의 약혼녀였으니 그 내막이 있었다.

"뭐, 채무자의 입장에서 팔린 거지."

나지윤의 말대로 그것은 한 마디로 '빚에 의한 약혼'이었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답청문은 다수의 가문이 그러했듯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이때 도움을 준 것이 그녀의 가문인 스미하라가(家)였다.

무가(武家)이면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귀족 가문이었던 스미하라가는 그렇게 답청문에 경제적인 원조를 하면서 답청문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답청문이 '상가'였다면 그것은 주식의 형태로 나타났을 것이다.

하지만 답청문은 무가였고 주식을 통한 경영권 같은 게 없다.

허나 '빚'은 분명히 지게 되었으니 그것이 문파 자체에 개입할 수 있는 명분으로 나타나게 됐다.

"그리고 그게 약혼이라는 최악의 형태로 결실을 맺은 거지."

문주인 나문기와 스미하라가는 대립각을 세운 나지윤을 후계자로 세우고 싶지 않았고 그를 위해 대신 후계자로 내세운 것이 스미하라 스에코였다.

"정식으로 약혼식을 올린 건 아니지만 아버지와 스미하라 쪽 사람이 언약(言約)을 했거든."

무림에서는 말로 한 약속이 어떤 면에선 법 이상으로 효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요즘 시대에 후계자의 성별은 따지지 않으니 '한 가족'이 되면 스에코 또한 후계자의 자격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스미하라가는 신풍회의 주인인 카자카미가의 가신(家臣) 가문이야. 놈들은 그러니까 답청문을 날로 먹겠다는 거야."

설령 나지윤이 그 약혼을 거부하더라도 다른 수단을 동원하여 그들은 답청문을 차지하려 들 것이었다.

문주인 나문기가 거기에 협조하고 있으니 나지윤으로서는 어떻게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이러니 더더욱 계획을 성공시켜야만 했고 시나리오가 아닌 '현실'이 이러하니 조금 모호한 부분이 있어도 무언가 확실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엔 답을 구하기 위해 꼭 필요한 수가 빠져 있는 것이다.

장호는 그렇게 말했고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꼭 알아야 하는 걸 모르고 있다.

다만 그것을 도저히 알 수 없는 상황이니 이럴 때에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일 자체를 멈추는 거다.

풀 수 없는, 혹은 오답이 나오게 될 풀이를 멈추고 답을 구하기 위해 필요한 수를 먼저 찾기 위해 움직인다.

하지만 이건 지금 선택할 수 없는 수였으니 결국은 후자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준비됐어, 후배?"

"물론이죠. 선배는요?"

"나야 너만 따라가면 되는 거니까 언제든 오케이지."

"와, 슬립스트림 너무 날먹이네요."

"…그게 무슨 소리야?"

"나중에 한 번 찾아보세요. 숙제."

후자. 그 수를 찾으며 풀이를 계속한다.

결행일.

도진은 미리 약속했던 대로 장부를 찾기 위해 간부들이 빠진 답청문의 본사 건물을 찾았다.

대외적으로 오늘은 전체휴무일이었지만 도진과 유지은은 나지윤의 친구 자격으로 의뢰의 현황을 확인하기 위해 들리는 형태가 되었다.

평소라면 짧은 면담과 함께 확보한 정보를 건네주는 것으로 끝이 나야할 만남.

하지만 오늘은 그런 연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

도진과 유지은은 나지윤과 합류하자마자 그대로 별관의 문주 전용 집무실을 향해 달렸다.

웨이브 테크놀로지 시스템.

답청문의 사회적인 부분이 아닌 철저하게 무림의 영역에 속하는 별관에 진입하자마자 날붙이끼리 격돌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지윤파의 무인들이 별관을 지키고 있던 문주파 무인들과 격돌하는 소리였다.

도진과 유지은은 앞서는 나지윤을 따라 날붙이가 아닌, 보이지 않는 싸움으로 보안이 무력화된 길을 달렸고 이내 집무실 앞을 막아선 무인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로 이런 저급한 시도를 할 줄이야. 실망이에요, 서방님."

매혹적이지만 이가 빠진 칼날을 연상케하는 특이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는, 다름 아닌 스미하라 스에코였다.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표정을 관리하며 묻는 나지윤에게 스에코는 감출 것도 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대놓고 움직이면 모를 수가 없잖아요? 역시 당신의 자질은 톱(TOP)에 어울리지 않았던 걸까요?"

비웃으며, 여유롭게 말한다.

무겁고 끈적한 긴장감이 내려 앉으려는 상황.

"와. 톱쁘래, 톱쁘. 발음 겁나 이상하다."

거기에 분위기를 뒤엎어 버리는 목소리가 있었으니 킬킬거리며 나지윤에게 말하는 도진이었다.

"……."

한껏 분위기를 잡던 스에코의 표정에 균열이 갔다.

유치하다. 그야말로 유치하기 짝이 없는 소린데, 그래서 더더욱 깊숙이 박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저급한 도발을……."

"어? 울 거야? 쟤 울려고 하는 거 같은데?"

파르르…….

스에코의 손이 벌벌 떨렸다.

짧은 인생이었지만 또래들이 상상도 못할 인생을 보내온 그녀였으나 이런 식의 도발은 처음이었고 스무스하게 넘기기가 힘들었다.

-과연 화화공룡이라 불릴 자격이 있구나, 제자야.

-그러게 말입니다. 저 아이는 앞으로 너를 평생 잊지 못할 게다.

-아하하. 칭찬 감사합니다.

도진은 스승들의 칭찬에 여유롭게 대답했다.

다만 그런 심상세계의 분위기와 달리 바깥은 그리 여유롭지 않았다.

감정을 추스르는 그녀의 기세는 날카롭다.

놀랍게도 숭무고의 후기지수에 비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다.

-위키에서 일본의 무림은 어릴 적부터 살벌하다더니 사실인 모양이구나.

-예. 생각 이상이네요.

똑같이 무림이라 불리지만 그 기질이나 분위기는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

일부 외국에서는 한국의 무림을 '인큐베이터'라 조소하는 분위기가 있는데 그러니까 너무 온실 속의 화초처럼 육성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일본은 너무 과격하다는 평이 있는데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스에코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 기세에 피비린내가 묻어나는 것이 또래라고 믿기 힘들 정도의 무림을 겪은 듯하다.

순서를 바꿔서, 그런 피비린내나는 무림을 이겨냈기에 이 정도나 되는 실력을 쌓았을 터.

허나 진짜 문제는 그런 스에코의 양옆에 서 있는 각진 인상의 무인 두 명이다.

스으으으-

스에코가 모욕을 받았다 생각한 그들은 아끼지 않고 살기를 기세에 담아 흩뿌렸는데 거기서 짐작되는 경지가 놀랍게도 개미굴에서 마주했던, 그것도 내공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흑도의 간부 못지 않은 수준이었다.

심지어 인위적으로 내공을 늘렸던 그와 달리 이들은 수작을 부리지 않은 본연의 실력이었다.

"…몸 성히 보내드리지 않겠습니다."

스릉-

시리도록 차가운 단검 두 자루를 그녀가 뽑아 들었다.

그것이 신호였던 듯 두 명의 무인이 덤벼들었다.

스각-!

폭발하는 내공의 힘으로 섬광을 그리는 그것은 다름 아닌 발도술(抜刀術), 정확히는 '거합(居合)'의 기술이다.

단 한 수로 상대를 베어 버릴 수 있는 폭발적인 속도와 힘을 자랑하는 그 기술을 도진과 유지은은 굳이 맞서지 않고 물러나 피했다.

그렇게 선공의 기세를 잡은 두 명의 무인이 거침없이 도진과 유지은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한 수 한 수에 학생들은 엄두도 못낼 파괴력과 기술을 담아 몰아치는 그들을 지켜보며 스에코의 붉은 입술이 잔혹한 곡선을 그렸다.

"잠룡과 검봉.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후기지수라고 들었습니다. 그 후기지수들이 과연 우리 스미하라가 자랑하는 무사들에 견줄 수 있을까요? 궁금해지는군요."

조롱이다.

뛰어나다 해도 결국은 학생. 수십 년을 고련한 무림인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런 생각으로 스에코는 모욕을 갚아 주기 위해 여유를 부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유는.

쾅-!

터지는 폭음에 금이 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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