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도움이 되는 말은 대개 쓴소리다.
몸에 좋은 것은 쓰다는 말처럼 사람에게 이로운 건 높은 확률로 쓴 것이었기 때문이다.
관련하여 나지윤의 부탁을 수락한 도진은 그것을 마냥 도와주는 게 아니라 쓴소리까지 해 가며 여러가지로 알아보고 신중하게 움직였다.
눈치를 보아야 하는 아랫사람이 아니라 우정을 나누는 친구로서 아버지를 문주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문주가 되겠다는 나지윤의 이야기는 그만큼 신중하고 정확하게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는 일이었으니까.
우선은 나지윤의 생각에 찬동한 답청문의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문주님이 예전엔 그러지 않았는데 말이야……."
답청문의 문주이자 나지윤의 아버지인 나문기는 이상적인 문주였다고 한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엄한 어머니 밑에서 번듯하게 자란 나문기는 답청문의 문주가 되어 무림 르네상스 시기에 문호를 개방, 답청문이 업계의 번듯한 회사로 자리매김하도록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래, 사모님을 잃은 뒤로 변하신 거 같아."
아버지를 일찍 잃었던 나문기는 또다시 불행하게도, 나지윤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와 사별해야 했다.
'나지윤파'의 문도들은 그때부터 나문기가 변한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그리고 나지윤파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문파의 장로라 할 수 있는 50대의 남자 정 과장은 이렇게 말했다.
"아빠가 잘못된 길로 가려 하면 아이는 아빠의 옷자락을 붙잡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쓰게 웃으며 그는 그렇게 말했고 도진은 여기서 나지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실제로 그러했기에 간부를 포함한 적지 않은 수의 문도가 나지윤에게로 마음을 돌린 것일 테고 말이다.
도진은 나지윤의 계획을 돕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제 남은 건 그 계획이 무엇이고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였다.
"아버지를 실각시킬 수 있는 장부가 있어."
장부.
그것은 나문기가 답청문의 문주로서 신풍회와 거래했던 내역이 담긴, 컴퓨터로 따지면 단번에 컴퓨터를 죽여 버릴 수 있는 '킬 스위치(Kill switch)'에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 존재만으로도 비할 데 없는 위협이 되는 장부는 그러나 이쪽 세계의 인물이라면 기필코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했다.
양지보단 음지의 일.
그렇기에 법이나 약속 등으로 신뢰를 확보할 수 없는 세계에서는 '장부' 같은 것이 있어야만 했으니까.
서로의 심장에 칼이 겨눠진 것과 같고 그것으로 서로가 배신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다.
"네가 참석했던 실습, '개미굴'과 연관되어 있는 마약이 있었잖아."
"응."
"그 마약의 출처가 신풍회야."
"……!"
도진으로서도 놀랄 수밖에 없는 정보였다.
관현 그룹과 곽필섭의 몰락과도 연관되어 있었던 바로 그 마약의 출처가 그냥 야쿠자가 아닌 신풍회였다니.
'아니, 그래야 맞지.'
그날 보았던 흑도 간부와 무인들의 실력은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었다.
신풍회라고 하니 오히려 납득이 가는 도진이었다.
"신풍회 같은 거대 조직이 한국에 대놓고 진출할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겉으로는 연관 없는 야쿠자를 이용해서 마약을 앞세워 여기저기 말 그대로 약을 치면서 부산부터 세력을 늘려 가려 했던 거라고 우리는 보고 있어. 그리고 거기에 필요한 정보를 아버지가 제공한 거야."
-예로부터 마약만큼 위험한 침략 무기가 드물었지.
장호의 말대로였다.
실제로 그 마약은 한국의 여기저기에 침투해 있었으니 엔터 업계와 정계는 물론이고 심지어 관현 그룹마저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여기에 연관되어 있다면 문주 실각의 명분으로 차고도 넘칠 지경이다.
다만 이 장부가 드러난다면 단순히 문주 실각만으론 끝나지 않을 터였다.
"…괜찮은 거야?"
여러가지를 담은 도진의 물음에 나지윤은 특유의 멋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빠가 잘못된 길로 가려 하면 아이는 아빠의 옷자락을 붙잡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그 미소에 도진은 정 과장이 했던 말이 떠오르고 말았다.
나지윤은 미소지은 얼굴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 신풍회의 행사와 아버지가 연관되어 있는 증거가 장부에 있을 테니 이 장부만 확보한다면 단번에 일을 성사시킬 수 있어."
수기(手記), 직접 손으로 써 무엇보다 명확한 증거가 되는 그 장부의 위치를 나지윤파는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남은 것은 그것을 탈취해내는 것이고 이를 위한 시기도 다가오고 있었다.
"얼마 뒤에 신풍회에서 중요 인물들이 한국을 방문하는데 그때 우리쪽 핵심 간부들이 모두 참석하는 회합이 있을 예정이야."
문주를 포함한 핵심 간부들이 모두 참석하는 회합.
그것은 곧 답청문의 본진이 비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건 아니야."
지금 일을 벌여야 하는 건 일반 문파가 아니라 '정보 회사'다.
그 대비는 오히려 무력 이상으로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당장 나지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동원한 수단만 해도 신경질적일 만큼 여러 과정과 위장을 거쳤다.
집행부의 자리에서 아무렇지 않게 전달하는 집행부의 서류에 단 한 문장을 몇 페이지에 걸쳐 자연스럽게 삽입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답청문의 사람들과 했던 통화 역시 일반적이지 않은 기기를 써서 겨우 15초에 걸쳐 나누어 했을 정도다.
"하지만 그 대비는 우리쪽 사람들이 모두 커버를 해 줄 거야. 남은 건 그렇게 열린 길을 달릴 사람이지."
그 길을 달릴 사람이 자신과 도진이라고, 나지윤은 말했다.
"내가 아버지와 결별했고 따로 세력을 결집한 이상 회합 때 비게 되는 회사에 대한 경계는 빈틈없이 계속되고 있을 거야. 심지어 우리쪽 사람들 역시 어찌되었든 회합에는 참가해야 하도록 일이 진행 되었지. 나는 그걸 일부러 막지 않았어."
대립 속에서 나지윤은 외동임에도 후계자 자리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때문에 나지윤은 오히려 그 회합의 자리에 참석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힘이 되어 주어야 할 핵심 문도들은 어쩔 수 없이 회합에 참석해야만 했다.
겉으로는 순수하게 일본의 유력 문파인 신풍회가 커다란 손님으로 찾아오는 자리였기에 빠질 수 없도록 그림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지윤은 그 그림을 역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나 혼자선 어쩔 수 없어. 하지만 네가 있다면, 이미 무림에서도 이름을 날릴 수 있을 거라는 평가를 받는 네가 있다면 장부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거야."
그날 동원할 수 있는 나지윤의 세력만으론 변수를 만들기 힘들다.
하지만 이미 검풍을 구사할 수 있어 무림에서도 통할 실력을 가진, 아니 분명히 그 이상의 실력을 가지고 있을 도진이 합류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지윤은 그런 생각으로 도진의 도움을 구한 것이었다.
그 설명에 도진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말했다.
"구체적인 계획은 어떻게 돼?"
"어떻게든 네가 우리 답청문 본사 안에 있어야 해."
"음, 어려운 일이네."
"그렇지. 어떻게든 자연스러운 명분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어."
이유없이 도진이 답청문의 본사를 방문한다면 은밀하게 고생해서 이야기를 나눈 의미가 없어진다.
때문에 이 부분이 어려운 것이었는데 문득 도진이 어떤 생각을 떠올리고선 나지윤에게 물었다.
"혹시 말야, 한 명 더. 내가 아는 사람을 이 일에 끌어들여도 괜찮을까?"
"…한 명 더? 혹시 소담이?"
"아니. 소담이는 아니야."
도진은 고개를 젓고선, 나지윤이 생각지 못했던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유지은 선배."
* * * *
"…음."
생각지 못했던 인물의 언급에 나지윤은 깊은 고민이 담긴 목소리를 흘렸다.
그렇게 고민하는 나지윤에게 도진이 말했다.
"민감한 일이지만 그래서 내가 확실히 보증할게. 선배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
그날. 랭킹전 특별 비무에서 검을 나누며 도진은 유지은과 영혼의 교감이라 해도 될 정도의 감정 교류를 할 수 있었다.
그날의 교류는 도진이 이런 일에서 나지윤에게 그녀를 보증할 수 있을 정도로 깊은 것이었다.
"지은 선배가 도와준다면 생각보다 더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면서 도진은 자신이 떠올린 생각을 풀어냈다.
"나는 물론이고 유지은 선배도 그날 실습으로 생각 이상이었던 흑도 무인들이랑 싸워야 했잖아."
흑도 간부를 도진과 유지은이 잡았다는 이야기는 비밀에 부쳐졌지만 개미굴을 운영하던 흑도의 힘이 예상을 훨씬 넘어 있었다는 건 비밀이 아니었다.
이에 관하여 토벌에 참가했던 여러 세력에서 조사가 진행 중이었는데 여기엔 정의검가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나랑 유지은 선배가 거기에 관한 조사를 의뢰하기 위해 너희 답청문을 찾아가는 거지."
"음."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다만 이것만으론 오히려 경계를 강하게 만들 뿐이었는데, 물론 뒤가 더 있었다.
"그리고 니가 우릴 꺼리는 거야."
"…꺼린다고?"
"응. 연기를 좀 하는 거지."
"……."
나지윤은 아버지를 실각시켜야만 한다.
하지만 그 계획과 관련하여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도진과 유지은이 나타나는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마약의 출처라 여겨지는 신풍회에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답청문에 덜컥 도진과 유지은이 나타나면 나문기나 신풍회 입장에서는 간담이 서늘할 수밖에 없다.
바로 여기서 또 생각지도 못하게 나지윤이 두 사람을 밀어낸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본래 적이어야 할 나지윤이 두 사람을 '과하지 않게' 꺼리는 모습을 보여주면, 여기서 더 큰 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었다.
"물론 어설픈 생각이야. 지적할 부분이 많겠지. 하지만 뭐, 어디까지나 개략적인 내 의견이 이렇다는 거고…… 자세한 부분은 전문가인 니가 해결해 주지 않을까 싶어서 내보는 의견이야."
도진의 말에 나지윤은 꽤 긴 시간동안 말없이 고민했다.
그리고 그 고민의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한 번 해보자."
* * * *
"우리 후배는 벌써부터 이렇게 큰 이야기를 가지고 오는구나."
도진에게 이야기를 들은 유지은은 그렇게 말하며 바로 협력을 약속했을 뿐 아니라 일에 착수했다.
거창하게 준비할 것은 없었다.
정의검가는 실제로 그 마약과 흑도에 관해 정부는 물론이요 관련 업계와 연계하여 조사를 진행하고 있었고 그 일환으로 정보 회사에 의뢰를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여기에 유지은과 친밀한 관계에 있는 도진의 친구인 나지윤의 회사를 방문하는 건 오히려 의심하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두 사람은 당당하게 나지윤의 회사에 그 일을 의뢰하러 왔다고 말했고, 나지윤은 사전에 협의된 대로 두 사람의 의뢰에 난색을 표했다.
"음……. 지금 우리 회사가 큰일을 맡고 있어서 말야."
매뉴얼대로 응대했기에 세 사람의 대화는 흘러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의 일처리로 도진과 유지은의 '의뢰'가 나문기쪽 인물들에게 흘러들어 갔고 나지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음도 함께 알려졌다.
"지윤이 너, 무슨 일 있는 거야? 평소랑 느낌이 좀 다른데."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과하지 않게. 어디까지나 자연스럽게.
도진은 나지윤을 의심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고 나지윤은 그런 도진이 친구이지만 껄끄러운 부분이 있음을 연기했다.
그리하여 도진이 회사를 찾아오고 나지윤은 꺼리는 모습을 보이는 게 자연스러운 풍경이 되었을 때.
-무언가가 걸리는구나.
"좀 걸리는 게 있어, 후배."
장호와 유지은이 동시에 그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