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일이 진행되기만 하면 상미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었다.
'명분'을 쌓으려던 양아치들은 오히려 상미에게 먼저 명분을 만들어 주었고 심지어 그 이상의 죄를 저지르곤 도주하려 했다.
그런 일의 시종이 고스란히 담긴 CCTV 영상을 미리 usb에 확보해 두기까지 했으니 설령 사주를 받은 부패 경찰이 수작을 부린다 해도 오히려 역공을 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상미에겐 이제 발언할 수 있는 '힘'이 있으니 그 역공을 막을 수도 없다.
다만 그럼에도 도진이 나선 건 그것을 그저 지켜보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역공을 가할 때까지 상미는 오물을 뒤집어 쓴 쓰레기들을 마주해야만 했고 어쩌면 그 오물이 묻을 수도 있었기에.
도진은 자신의 울타리 안에 둔 사람이 그런 것들을 오래 마주하게 두고 싶지 않다는 욕심이 있었고 그 욕심을 부리고 만 것이었다.
그런 솔직한 속내가 드러나는 말에 상미는 심장이 뛰고 말았다.
그녀의 유일신은 가끔 이렇게, 포장하지 않은 솔직한 속내를 말로 드러냄으로써 주변 사람들을 뒤흔들곤 했다.
이렇게 되니 상미는 앞에 했던 생각들이 모조리 리셋되고 말았다.
"괘, 괜찮아요. 그 다음은 제가 했으니까요."
그래서 날것 그대로의 대답을 해 버렸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도진이 개입하고 나성보가 찾아오긴 했으나 상미는 준비해 두었던 것들을 이용하여 바로 역공을 했으니까.
도진과 나성보 변호사는 그 역공을 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는 수준에서 힘을 보태 주었다.
그러니까 그녀의 유일신은 언제나 그러했듯 옳았다.
"…소외감 느껴지네요. 저도 좀 끼워 주세요."
그런 훈훈한 분위기의 끝에 우서진이 끼어들었다.
눈치 없이 끼어든 건 아니고, 적당한 순간에 오히려 센스 있게 분위기를 전환해 준 것이었다.
"아, 미안. 그렇네."
도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분위기를 바꿨다.
"미용실은 계속 다닐 거야?"
도진의 물음에 상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일할 사람이 구해지는 것도 아니고, 당분간은 제가 언니 일까지 도맡아 하기로 했어요."
정직원이었던 고원주가 팔에 깁스를 하게 되어 공백이 생겼다.
최소 한 달은 깁스를 해야 했는데 그 공백까지 포함하여 상미가 조금 더 돈을 받고 시간을 늘리기로 이야기가 되었다.
무공도 익혔고 이미 미용실에서 일을 해 왔으니 공백을 메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번 일 때문에 잘리는 건 아닐까 싶었는데 잘 된 일이었다.
고원주 또한 두둑하게 합의금을 받음으로써 한 달간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
"…조금 껄끄러운 게 있기야 하겠지만 그만두는 게 오히려 지는 거니까요.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맞아. 그렇지."
상미는 웃으며 말했고 도진과 우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미 때문에 소란이 생겼고 고원주가 다쳤다는 말이 나올 수 있었다.
사장인 이복자도 껄끄러워하는 감이 있으니 까짓거 그만둘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것은 어쩌면 도망치는 것일 수도 있다.
때문에 상미는 그러지 않고 그 모든 것들을 감당하며 일을 계속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옳지. 우리 상미 장하네."
도진의 조금은 과장된 칭찬에 상미는 순수하게 기뻐했다.
"음, 그럼 너 입학 시험 전까지는 계속 미용실에서 일하는 거야?"
그리고 이어진 우서진의 물음에 상미는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2월 초까지 하기로 예전부터 이야기는 했었어. 그때부턴 시험 준비해야 되니까."
숭무고를 포함한 무림학교의 입학 시험 시즌은 2월 말부터다.
상미는 그때까지 부지런히 무공을 수련하고 돈을 저축하며 매일을 빈틈없이 채워 나갈 계획이었다.
"너는?"
"나는 뭐, 할아버지한테 이것저것 배우는 것만으로도 바빠서 알바 같은 건 못 할 거 같아."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우서진은, 그래봬도 24시간이 모자란 생활을 하고 있었다.
삼음지체의 저주로 인해 보내야 했던 시간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했기에.
하물며 그는 단순한 무인이 아닌 대장장이기도 했으며 이름 높은 명성공방의 후계자가 되어야 하기도 했다.
무공에 대장장이 기술을 배우면서 후계자 수업까지 받아야 했으니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쓰러져도 벌써 쓰러졌을 스케쥴의 연속이었다.
이렇게 도진이나 상미를 만나는 건 사실 그런 스케쥴의 연속에서 어떻게든 도진과 함께 보낼 시간을 만들어 내기 위해 더욱 열심히 한 덕분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던 상미와 도진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상미랑 서진이, 고생하네. 내가 맛있는 거라도 좀 사줄까?"
웃으며 하는 제안에, 상미와 우서진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 * * *
서울의 어느 국회의원 사무실.
빠악! 빠악! 빠악!
국회의원 사무실에서 나서는 안 될 소리가 나고 있었다.
듣기만 해도 섬뜩한 그 소리는 다름 아닌 사람을 몽둥이로 거침없이 후려 패는 소리였으며, 심지어 그렇게 때리는 사람과 맞는 사람은 부자 관계였다.
"……."
때리는 아버지는 번들거리는 눈으로 그 흔한 욕 한 마디 없이 아들의 온몸을 사정없이 후려치고 있었다.
맞는 아들은 최대한 내공을 끌어 올려 몸을 보호함에도 불구하고 스며드는 통증을 느끼고 있었으나 이를 악물고 소리 하나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장하직.
서민들을 위하는 사람.
시장 바닥에 거리낌없이 철푸덕 주저 앉아 상인들과 막걸리를 나눠 먹는 이미지로 유명한 사람이지만, 그 아버지가 사실은 아주 잔혹하고 자비가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아들인 장영준은 알고 있었다.
차라리 구속 됐으면 좋았을 텐데.
장영준은 그런 생각을 했지만 안타깝게도 도주 우려가 없다며 불구속 상태로 조사를 받게 돼 이 꼴이다.
그렇게 한참을 장영준을 후려 패고서야 장하직은 쇠몽둥이를 떵그렁, 던지고선 말했다.
"후우……. 내가 말했지. 요즘 중요한 시기라고. 그러니까 그 개새끼 같은 행실 당분간만 좀 자중하라고. 근데 이 씨발 새끼가!"
빠악!
말하다 말고 구둣발로 관자놀이를 사정없이 차 버린다.
장영준이 대비를 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큰일이 났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장하직은 개의치 않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집행유예 나올 거다. 그러면 후쿠오카 사관학교로 가라."
"아, 아버지?!"
장하직의 말에 지금껏 조용하던 장영준이 놀라 아버지를 불렀다.
그런 아들에게 장하직은 이어서 '통보'했다.
"가기 싫으면 홀로서기를 해도 좋다."
"……."
홀로서기. 연을 끊음을 의미했고 장영준은 그것을 선택할 수가 없었다.
후쿠오카 사관학교는 일본의 명문 무림고등학교다.
다만 한국의 무림고등학교와 그 분위기가 크게 달랐으니 차라리 군대나 조폭의 조직 문화가 떠오를 만큼 살벌하다는 거다.
외국인이자 '아랫 사람' 입장인 그가 가면 결코 지금처럼은 지낼 수 없게 될 것이었다.
"사관학교에 가서 카자카미 가문의 사람들과 인연을 만들어 둬라. 그게 그나마 내 돈으로 먹고 산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니."
"……."
"대답."
"…알겠습니다."
장하직의 말에 장영준은 고개를 떨궜다.
* * * *
랭킹전 축제도 끝나고 12월 중순이 되어 본격적으로 추위가 찾아왔다.
평온한 나날이 이어져 만약 소설이었다면 '며칠이 지났다'는 한 마디로 정리가 될 정도로 별일이 없는 나날이었다.
일반 학교는 종업식과 함께 겨울 방학을 코앞에 둔 시기겠지만 개학이 4월인 무림학교는 방학이 1월이기에 기말고사를 앞두고 있었다.
때문에 여타 학생들은 시험 준비로 바빴지만 도진은 항상 그렇듯 예외였다.
이론 수업은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었고 무공 수업 또한 '공부는 평소에 하는 것'이어서 특별히 유난을 떨 게 없었다.
그런 배경으로 겉에서 보면 평온한 나날의 연속인 것 같은 도진이었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다름 아닌 나지윤에게 들은 이야기 때문이었다.
랭킹전 비무에서 들었던 도와달라는 말 이후 나지윤은 은밀하게 사정을 조금씩 나누어 설명해 주었고 일주일 넘게 들어 완성된 이야기를 종합하면 이러했다.
"우리 답청문은 무림 르네상스 시기에 세상으로 나온 가문이야."
"그랬구나."
소위 말하는 '무림 르네상스' 시절에 문호를 개방한 문파가 적지 않았기에 이건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 가문은 나라의 배신자들의 정보를 취합해 '처단자'들에게 제공하던 가문이었어."
"……."
하지만 이어진 내용은 도진으로서도 놀랄 만한 것이었다.
-일종의 호국 가문이로구나.
답청문은 소위 말하는 '신비 가문' 중 한 곳이었던 것이다.
어쩐지 배운 무공의 수준이 높다 했더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한데 그런 가문의 가주인 우리 아버지가, 지금은 일본의 신풍회에 정보를 넘기고 있어. 일제 시대에 매국노들의 명단을 만들던 우리 가문의 가주가 말이야."
"……."
그 뒤의 내용은 더더욱 충격적이었다.
이제는 명예뿐이라고 하지만 호국 가문의 가주가, 일본의 거대 무림 가문에 정보를 넘기고 있었다.
그것도 보통 정보가 아니었다.
"신풍회는 세력을 한국으로 확장하려 하고 있어. 일본은 포화 상태이니 덩치를 키우기 위해 한국을 노리고 있는 거지. 거기에 필요한 정보를 신풍회는 아버지에게 요구했고, 그 요구를 어째서인지 아버지는 수용한 거야."
그 내용을 말하던 때의 나지윤은 그 멋진 얼굴에 온갖 감정을 담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유를 말씀해 주시지 않았어. 상대도 해주지 않으셨지. 그래서 난 결론을 내린 거야. 내가, 우리 답청문을 올바른 길로 되돌리기로."
"……."
재벌과 문파의 크나큰 차이점 중 하나는, 문파의 경우 재벌과 달리 그 강력한 권한이 '문주'에게 집중되어 있으며 승계에 따라 다음 문주에게로 고스란히 넘어간다는 것이다.
사회가 아닌 '무림'이기에 오히려 그것이 당연한 것이었으며 나지윤은 그러니까, 무림의 방식으로 문파를 바로잡겠다는 것이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겠다는 건 아냐. 어디까지나 증거를 잡아서 아버지의 문주 자격을 박탈하고 내가 그 뒤를 잇겠다는 거지. 그 증거의 위치도 어느 정도 확정되었어."
"다만, 그 증거를 확보하는 게 우리 세력만으론 힘든 일이어서 너한테 도움을 청하게 된 거야. 우리 가문의 일에 너를 끌어들이는 거라 많이 고민했지만…… 그 외엔 방법이 떠오르지가 않았거든. 그리고 내가 얻은 정보에 따르면 너는 물론이고 소담이마저 연관이 되어 있는 것 같았어."
"신풍회는 지속적으로 너의 정보를 요구하고 있었어. 그리고…… 너 이상으로 집요하게 소담이에 관한 정보도 요구하고 있거든. 그러니까 이건 내 제안인데, 내가 답청문의 문주가 되면 거기에 관한 정보를 찾아서 너에게 제공하기로 약속할게."
그것은 나지윤을 돕는 것에 대한 보답이자 거래였다.
이야기를 다 들은 도진은 나지윤의 그 제안에 씨익 웃었다.
"조금 섭섭하네."
"어?"
"우리 사이에 그렇게 딱딱하게 거래라고 하면 좀 그렇잖아?"
어영부영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과정이 그러했다는 거지 친구가 되어 보낸 시간마저 어영부영, 뚜렷하거나 적극적인 감정의 교류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나지윤은 도진을 진심으로 대했고 그런 진심에 도진 또한 진심을 돌려 주었다.
그런 감정의 교류 속에서 나지윤은 도진의 부탁에 몇 번이고 도움을 주었고 말이다.
그러니까 이건 '거래'라는 단어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너도 그냥 부탁하면 되는 일이잖아. 안 그래?"
도진의 물음에, 나지윤은 언제나처럼 멋진 미소를 보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