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삐빅-
단 한 번 알람 소리가 울리고 어두운 새벽에 상미가 눈을 떴다.
중학교를 자퇴하고 보호소에서 지내는 상미의 하루는 새벽 3시부터 시작이었다.
잠자리를 정리한 상미가 목검을 들고 조용히 뒷공터로 나가 한천검공의 수련을 시작했다.
장호가 건 '몽련의 술'로 꿈 속에서 익힌 한천검공을 몸으로 체화하는 과정이었다.
조용히 수련할 개인적인 공간이 없는 보호소에서 운기조식을 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기에 동공(動功), 움직이면서 내공 수련과 초식의 수련을 병행하는 식으로 무공을 익혔다.
휴식을 취하던 육체가 내공의 흐름과 함께 깨어나며 잠으로 다 해소하지 못했던 피로를 지워 나갔다.
그렇게 두 시간 여의 수련이 끝나면 샤워를 하고 식당으로 갔다.
보호소에 머무는 청소년들은 각자가 하나씩은 일을 담당해야 했는데 상미는 고정적으로 오전의 식사 당번을 자청해 맡고 있었다.
모든 학생들이 꺼리는 일이었으나 상미에게 있어선 최적이었다.
일찍 일어나 해야 하는 고된 일이었기에 그 외의 다른 일을 맡지 않아도 됐으며 개인적인 도시락까지 준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전의 식사 당번이 끝나면 아침 식사를 하고 동적산의 공터로 가 공부와 무공 수련을 한다.
오후가 되면 준비한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정식으로 아르바이트생이 된 미용실로 향했다.
실습을 위해 다니던 미용실에서 상미는 실력을 인정 받아 정식 아르바이트생이 되었다.
오후 3시부터 오후 8시, 마감까지 함께 하며 받는 돈으로 꾸준히 저축도 할 수 있게 돼 뿌듯함까지 느꼈던 상미였다.
그녀의 구세주이자 '유일신(唯一神)'인 도진의 말에 따라 꼭 숭무고 수석을 차지하여 장학금과 함께 기숙사까지 쟁취할 예정인 그녀였지만 그렇다 해도 여윳돈은 꼭 필요한 것이었다.
보호소에서 머물며 따로 돈이 들어갈 곳은 없으니 이렇게 아르바이트를 꾸준히 하여 그 여윳돈을 마련하기 위한 적금을 들 수 있었다.
수련 시간이 조금 줄어들었지만 그건 잠을 줄임으로써 해결했다.
딸랑-
"안녕하세요."
"왔니."
상미가 안에 들어서며 한 인사를 후덕한 살집의 중년 여자가 가볍게 받는다.
그녀, 미용실의 주인인 이복자는 이 자리에서만 10년 넘게 미용실을 한 만큼 마당발이었고 이 근방의 터줏대감이기도 했다.
처음엔 혼자서 하던 미용실이 단골이 생기고 주변 학교의 학생들도 이용하다보니 정직원을 둘 정도가 되었다.
자린고비와 같은 면이 있어 돈을 쓰는 데 인색했으나 그 덕에 세 들었던 이 건물을 살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비록 문월동의 오래된 2층짜리 건물이지만 이 정도면 나름 성공한 거 아니냐고 손님들과 하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좀 여유로워도 되지 않겠느냐며 상미를 알바생으로 들였다는 이야기까지도.
'평범한 소인배'라 평할 수 있는 그녀는 그러나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건물을 인수한 뒤로는 조금 나은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덕분에 사무적이고 모난 부분이 있지만 으레 사람 사이의 관계가, 사회가 그렇듯 맞춰 지낼 수 있었다.
다만 요즘 들어 그 사이가 조금 어색해졌으니 장영준 때문이었다.
상미에게 집적거리기 위해 하루가 멀다하고 미용실을 드나들었던 장영준은 겉으로 내건 '미용실을 이용한다'는 명목으로 주인 입장에서는 공돈이나 다름없는, 그것도 적지 않은 매상을 올려 주었었다.
'장사라는 게 그래. 이게 다 손님 기분 맞춰 주는 게 가장 중요하단 말야. 알겠지?'
때문에 은근히 상미에게 장영준의 기분을 맞춰주고 잘 대해 줄 것을 요구했는데 상미가 그것을 거절해 버린 것이다.
여기에 갑자기 발걸음을 끊어 버린 장영준의 행동이 상미가 딱 잘라 거절한 것 때문은 아닌가하고 생각해 지금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런 어색해진 관계를 상미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상미에게 있어 더도 덜도 아닌 고용주였을 뿐 깊은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오히려 이 정도 거리가 딱 좋다 생각했다.
"왔어, 상미야?"
사이가 좋아야 하는 건 그녀가 아닌 그녀를 살갑게 맞이해 주는 정직원인 젊은 헤어 디자이너, 고원주였고 실제로 그녀와는 언니 동생하면서 잘 지내고 있었다.
상미가 도진에 의해 들렀던 미용실의 바로 그 젊은 헤어 디자이너이자 기술을 가르쳐 주었던 사수다.
사교성이 좋고 성격도 모나지 않은 고원주와 함께 일하는 시간은 배운 기술로 노동을 하여 돈을 번다는 의미까지 더해 즐겁고 보람 있는 시간이었다.
살가운 성격의 그녀는 기술을 배우러 온 그녀를 대견해하며 친절하게 기술을 알려 주었고 아르바이트생이 된 뒤로도 '이제 내가 막내 아니네?'라고 웃는 얼굴로 말하며 잘 챙겨 주었다.
저녁은 6시 이후 교대로 한 명씩 바로 옆 식당에서 먹었는데(한 명당 식대 5000원 제한이었다) 그녀는 물론이고 상미도 서로를 생각해 빠르게 식사를 하고 돌아오곤 했으니 이 정도면 어디 부러울 곳이 없는 관계라 할 수 있었다.
사회 생활이 힘든 건 일이 아니라 사람 때문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런 면에서 상미는 운이 좋았다.
때문에 오늘도 상미는 웃는 얼굴로 인사를 나누고 보람찬 시간을 보내려 했는데.
딸랑-
"씨이발. 빨리 끝내고 피시방 가자."
"이 새낀 진짜 게임 중독이야."
"……."
불청객에 의해 그 계획은 깨지고 말았다.
* * * *
사람의 성격을 만드는 건 타고난 인성이겠지만 그 인성은 또 환경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문월동은 객관적으로 결코 좋은 환경이라 할 수가 없었다.
좋지 않은 가정 환경, 그나마도 일이 바쁘거나 자식을 방치하는 탓에 아직 불안정한 아이의 인성을 바로 잡아주지 못한다.
동네의 환경 또한 마찬가지.
좋은 것보다 나쁜 것들을 압도적으로 많이 보고 근묵자흑(近墨者黑), 나쁜 것들을 가까이 하게 돼 쉽사리 검게 물들고 만다.
때문에 문월동엔 질이 좋지 않은 학생들이 많았다.
무공이 보편화 되고 수준이 낮다지만 무림학교가 세 곳이나 있다 보니 폭력이 일상화돼 더더욱 그러했다.
그런 배경으로 문월동에 있는, 학생들이 자주 이용하는 이 미용실엔 불량해 보이는 학생들도 자주 방문하곤 했다.
그러니까 단순히 불량한 학생들이 방문한 것 때문에 상미가 경계하는 건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런 불량한 학생들이 들어오는 그 순간부터 상미를 두 눈에 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지금 들어온 학생들은, 명백하게 상미에 관한 어떤 의도를 담고 방문했다.
입고 있는 교복으로 다섯 명의 건장한 학생들이 상월중 학생들임을 파악했다.
문월중과 엎치락뒤치락하는 무림중학교로, 역시나 행실이 불량한 학생들이 다수 모여 있는 곳이라는 평가를 받는 곳이다.
그들은 마침 손님이 없는 미용실 내부를 확인하고선 잘 됐다는 얼굴로 씨익 웃었다.
그리고 리더로 보이는, 유독 덩치가 큰 학생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머리 깎으러 왔는데요."
"응, 그래. 앉아."
고원주가 학생의 말에 웃으며 의자를 가리켰다.
동네가 동네다 보니 외견만으로 겁을 먹지 않고 평소처럼 응대한 것이었다.
학생, 원승덕은 고원주의 말에 상미에게로 시선과 손가락을 향했다.
"야. 네가 잘라 주라."
상미를 가리키는 원승덕의 행동에 상미는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앉아."
이년 봐라?
즉답에 원승덕은 그런 시선으로 상미를 보았지만 당연히 효과는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상미는 자리에 앉은 원승덕에게 가운을 두르고 말했다.
"어떻게 잘라 줄까?"
"그런 건 미용사가 알아서 잘 해 줘야지."
"알아서는 없어. 그러다가 마음에 안 들어도 원상복구가 안 되니까. 원하는 스타일을 사진으로 보여 주든가 해."
'…씨발년이.'
원승덕이 대놓고 얼굴을 구겼다.
꼬투리를 잡기 위해 어설프게 세웠던 계획이 초장부터 어그러졌다.
여기에 뻣뻣한 상미의 태도까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성질 같아선 엎어 버리고 싶은데, 무공을 익힌 이상 학생이라도 그랬다가는 결코 무사히 넘어갈 수 없으니 명분이 만들어지지 않은 지금은 참아야만 했다.
"…이걸로."
꼴에 무공을 배울 만큼의 머리로 계획을 수정한 원승덕이 스마트폰으로 대충 그럴싸한 머리를 보여 주었다.
"사진 찍을게."
상미는 그것을 심지어 사진으로까지 찍은 뒤에야 가위를 들어 또 한 번 원승덕이 속으로 쌍욕을 중얼거려야 했다.
이쯤 되면 누구나 눈치를 챌 만했기에 이복자는 물론이고 고원주 또한 긴장한 얼굴이 되었다.
말만 중학생이지 성인 못지 않은 덩치에 무공을 익힌 학생들이 대놓고 시비를 걸고 있었으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림인이 함부로 무공을 쓰면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지만 항상 그렇듯 사회의 심장인 법은 사람의 심장과 달리 말단까지 그 영향이 제대로 미치지 않는 것이었기에.
그리고 상황은 더더욱 살얼음판이 되었다.
휙-!
"아!"
원승덕이 갑자기 머리를 휙 움직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가위가 근처에 있는데 그런 식으로 행동했다간 큰일이 날 것이었기에 고원주가 저도 모르게 비명과 같은 탄식을 내뱉었으나.
"……."
상미는 마치 그것이 짜고 한 것이었던 것처럼 가위를 맞춰서 움직였다.
'뭐야?'
그것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었기에 원승덕은 당황했다.
'뭐지?'
다시 되뇌었다.
일부러 계산해서 머리카락만 망치고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있도록 움직였는데 가위가 그 움직임을 따라왔다.
원승덕으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고 답을 찾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대외적으로 상미가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건 알려지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보호소에서도 목검을 휴대한 상미를 보고 어린 나이에 최소한의 호신술 정도나 익히는 정도로 생각했다.
휙!
혼란과 당황으로 제대로 판단히 서지 않은 원승덕이 마치 확인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몇 번 더 고개를 흔들었고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이런 씨발…….'
이쯤 되니 정말로 혼란스럽다.
그렇게 원승덕이 혼란스러워하자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있던 학생 중 하나가 나섰다.
'뭐하는 저야, 저 새끼.'
수준이 떨어지는 그들은 낫 놓고도 기역자를 알아 보지 못했다.
때문에 '부탁 받은 일'을 빨리 끝낼 요량으로 독자적으로 나선 것이었고.
"악!"
꽈직!
"언니!"
불행하게도 사고가 나고 말았다.
* * * *
그것은, 그야말로 불행한 사고였다.
상미는 높은 수준의 무공을 익혔으나 '실전'을 경험하지 못해 빈틈이 있었다.
자신을 중심으로 두고 판단하느라 시야가 좁아지고 말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학생 역시 상미에게 집중하느라 안 그래도 떨어지는 수준 때문에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그리고 고원주는, 긴장으로 인해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 움직인 학생과 부딪치고 말았다.
꽈직!
"악!"
어떤 의도를 품고 있었던 탓에 무심코 힘을 주고 걷는 건장한 덩치의 학생과 부딪친 여리여리한 고원주는 하필 기둥의 모서리에 팔을 부딪치고 말았다.
심상치 않은 소리와 함께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고원주는 주저 앉았고 상미는 가위를 내팽개치며 그녀에게 달려갔다.
"언니!"
상미가 다급히 고원주에게 다가가 팔을 살폈다.
그 경지가 낮지 않은 상미는 짧은 순간 가볍게 금이 갔을 뿐 큰 문제가 없음을 파악하고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
그리고 고원주와 부딪친 학생을 노려 보았다.
"아이, 씨발. 재수없네."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얼굴이던 학생은 상미의 서늘한 시선에 반발하듯 지껄이고선 몸을 돌렸다.
"깎고 와라. 나는 간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잘못을 저지르고 도망치려 하는 그 나이대의 못난 행동에 상미가 손을 뻗었다.
턱.
"어디 가."
"어? 씨발, 뭐야?"
교복의 목덜미를 잡아챈 상미의 손에 커다란 덩치의 학생이 도망치지 못하고 허우적거렸다.
"사람을 다치게 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도망가려고 해?"
한기가 묻어나는 목소리에 목덜미를 붙잡힌 학생이 더욱 당황해 되려 화를 했다.
"이 씨발년이 돌았나!"
부웅!
상체를 틀어 생긴 회전력을 굵은 팔에 고스란히 담아 상미의 얼굴을 후려치려 들었다.
상미는 그것을 굳이 '기술로' 받아치지 않고 힘으로 멈춰 버렸다.
턱.
"어, 어어?"
그리고 드러난 면상을 후려쳤다.
짜악!
"켁!"
쿠당탕, 덩치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미쳤나, 이게!"
친구가 당해 버리자 앞뒤 재지도 않고 남은 양아치들이 덤벼들었다.
그 모습을 보는 상미의 머릿속에, 그녀의 구세주이자 유일신의 말이 떠올랐다.
'요즘 세상은 그래도 꽤 좋아졌지. 명분만 있으면 양아치 새끼들을 맘 놓고 줘 패 버릴 수 있으니까.'
사아아-
유일신의 말에 따라 상미가 적당히, 내공을 끌어 올렸다.
짜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