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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232화 (232/741)
  • 231화

    금요일.

    오전 수업을 마친 도진은 집행부에 와 있었다.

    결승을 앞두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유아가 중심을 잡고 있었고 그 외에 랭킹전을 끝낸 멤버들이 모두 모여 일을 보고 있었다.

    "우리 일은 이걸로 끝. 나머지는 서류만 올리면 운영회의 일이야."

    몇 시간의 서류 작업 끝에 한유아가 선언했다.

    랭킹전 축제는 본래 전담으로 운영하는, '어른들의 운영회'가 있다.

    다만 집행부는 그 상징성과 가진 권리 때문에라도 의무를 놓을 수 없었으니 이렇게 서류 작업을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드디어 다 끝나고 이제 집행부 멤버들 또한 자유롭게 주말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한유아와 유지은, 그리고 도진은 아직 랭킹전이 끝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 도진아."

    "응?"

    마무리를 하는 중에 오대용이 도진을 불렀다.

    고개를 돌리니 오대용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누나가 너 결승 축하한다고 전해달래."

    "아, 그래? 어제 통화도 했는데."

    규정상 '오성의 관계자'인 오성아와는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 못했다.

    다만 전화로 우승 축하한다는 말을 들었으며 따로 집으로 꽃다발까지 보냄으로써 마음을 표현했던 오성아였다.

    오대용은 어깨를 으쓱였다.

    "누나가 원래 이런 쪽으로는 철저하잖아."

    "아하하. 그렇지."

    오성아는 그 직업상 오대용의 말대로 이런 쪽으로는 빈틈이 없었다.

    도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누나는 이번 회식에는 불참이래."

    "어, 왜?"

    1학년 랭킹전을 우승한 도진은 따로 친구들과 자리를 마련해 한 턱 쏘기로 했었다.

    여기에 오성아 또한 참석하지 않겠냐고 물었었는데 오대용을 통해 불참 의사를 밝힌 것이었다.

    "학생들 자리에 늙은 누나가 끼면 뭐하다는 이유야."

    …실제로 '늙은 누나'라고 했을 리는 없을 테니 오대용의 첨언이었다.

    "정아도 있고 와도 괜찮을 텐데. 일단 알겠어. 누나는 따로 만나서 인사해야겠네."

    잡담을 마치고 도진은 홀로 느긋하게 막바지를 향해 가는 축제를 둘러 보았다.

    느긋한 구경 겸 치안 유지를 위한 집행부 선도 활동 겸이다.

    "이쪽입니다!"

    오늘도 열심인 유애라를 스쳐가는데 우연히 레드슈의 소진과 마주쳤다.

    "오?"

    "안녕."

    예쁘게 인사하는 소진은 웬일로 혼자였다.

    "왜 혼자야?"

    "응, 제출해야 할 추가 과제가 있어서. 그거 교수님께 제출하고 가는 길이야."

    "그렇구나."

    걸그룹 활동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학업 또한 소홀히 하지 않는 소진이었기에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잠시 고민했다.

    '이은지.'

    유애라를 보고 소진과 마주쳤기에 떠오른 이름이었다.

    요즘에도 연락을 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는데 그 이름을 꺼내기엔 조금 걸린다.

    말 그대로 갑자기 떠오른 사소한 궁금증인데 그 궁금증 때문에 꺼내기엔 조금 민감한 이름이었으니까.

    '뭐, 굳이.'

    도진은 곧 그 생각을 지웠다.

    이은지는 어차피 잘 될 사람이다. 말 그대로 소진에게 굳이 물어볼 만큼의 일이 아니었다.

    "그럼 난 가볼게."

    "그래. 잘 가."

    인사를 나누고 박소진과 헤어졌다.

    그리고 이번엔 기다렸다는 듯 미소지으며 나타난 유지은과 마주하게 되었다.

    "후배!"

    "선배."

    "간식 먹을래?"

    나풀거리듯 다가온 유지은의 말에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한겨울에 먹어서 더욱 좋은 아이스크림을 각자 앞에 두고 앉았다.

    이것저것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유지은이 문득 그 신묘한 눈동자에 도진을 가득 담으며 물었다.

    "후배."

    "네, 선배."

    "나 말야, 요새 특훈하면서 자신이 없어졌어."

    "자신이요?"

    "응. 질 자신이."

    웃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은 도발을 담고 있었다.

    "특훈하면서 알게 됐는데, 나는 아무래도 1등으로 달리는 것보다는 누군가를 따라잡는 걸 더 좋아하는 거 같아."

    앞에 아무도 없어 혼자 달리는 것만 같은 달리기를 하는 것보다 누군가의 등을 따라잡는 게 더 재밌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고, 유지은은 말했다.

    "그런데 내 달리기 속도가 더 빨라진 거 같아. 시간문제일 뿐이지 앞에 있는 사람들 중 누구도 추월 못할 사람은 없는 것 같단 말이지. 그러니까 겉보기에는 누군가를 따라잡는 건데 사실은 1등이 결정된 달리기란 말야."

    언뜻 들으면 자만하는 것 같고 무협식으로 말하자면 '광오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것은 '부탁'이었다.

    "후배."

    "네, 선배."

    "후배가 날 이겨줬으면 좋겠어. 그래서, 내가 등을 보고 목표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줬으면 좋겠어. 그럴 수 있겠어?"

    도진을 담은 신비로운 눈동자가 다시 한 번 도발한다.

    그 눈을 마주하며 도진은 씨익 웃었다.

    "대답은 비무대에서 하도록 할게요."

    * * * *

    금요일 저녁 진행된 2학년 랭킹전 결승전은 유지은의 승리로 끝이 났다.

    반전없는 결과로 유지은은 우승을 차지했고 분전했던 금봉 한유아는 준우승으로 '사실상 우승'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렇게 검봉과 잠룡으로 정해진 특별 비무가 진행되는 날인 토요일.

    오전부터 온갖 커뮤니티가 떠들썩했다.

    -랭킹전 입장권 팝니다. 쪽지 주세요.

    -야이 ****아 100만원짜릴 누가 사냐 암표 개****

    -이미 다 팔림 ㅅㄱ

    -아니 저걸 산다고? ㅋㅋㅋㅋㅋ 하루 짜릴?ㅋㅋㅋ

    -돈이 문제냐. 검봉이랑 잠룡 붙는다는데 그건 못참지.

    -ㄹㅇㅋㅋ

    3학년을 제외한,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숭무고 학생 전체가 참여하는 랭킹전의 특별 비무는 1학년 우승자와 2학년 우승자가 맞붙는 이벤트 매치다.

    이 이벤트 매치는 라인업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곤 했는데 이번엔 특히 그 반응이 격렬할 수밖에 없었으니 규격 외 천재와 규격 외 천재가 맞붙는 다시없을 빅매치였기 때문이다.

    -누가 이길까?

    -나는 검봉에 한 표. 솔직히 둘 다 괴물이면 기본으로 돌아가는 거지. 천재들 사이에서 1년 차이가 얼마나 큰데. 이벤트 매치 전적만 봐도 답 나오는 문제임.

    -아니지. 오히려 말도 안 되는 천재들이니까 1년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거지. 김도진 지금껏 보여준 거 생각하면 유지은도 안 될 거 같음.

    -ㄹㅇ. 김도진이 사실상 2학년 숭무회 혼자서 작살낸 것만 봐도 김도진 판정승임.

    -아니 그게 무슨 빡대가리 같은 소리냐 ㅋㅋㅋ 그렇게 따지면 이미 무림에서 현역 취급받는 유지은 판정승 아님?

    -저건 뭔데 말투가 저따구임?

    -ㅋㅋㅋㅋ 아니 비무는 김도진이랑 유지은이 해야 하는데 왜 얘들이 싸우기 시작함?

    -그만큼 기대되신다는 거지~

    -기야호~

    그 기대만큼이나 격렬하게 커뮤니티가 타오르는 가운데 이윽고 특별 비무의 시간이 되었다.

    와아아아아아아-!!

    발디딜 틈 없이 가득 찬 관중석 가운데.

    도진과 유지은이 비무대 위에 올라 서로를 마주했다.

    "례!"

    포권지례 후 스르릉, 검을 뽑았다.

    도진의 백설과 유지은의 검이 시린 빛을 뿌리고.

    카앙!

    두 사람의 검이 격돌하며 비무가 시작되었다.

    * * * *

    카캉! 캉!

    기세를 잡은 건 유지은이었다.

    정의검가의 독문무공을 구사하는 유지은의 검로는 그 모든 궤적에 신비가 깃들어 있었다.

    위지혁이 확인해 준 '그 시대의 무공'은 과연 무협지에서나 말해질 신비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으며.

    쿵!

    심지어 묵직했다.

    그래, 무려 도진이 '묵직하게' 느낄 만큼 강했다.

    연신극기공으로 단련하고 천마기를 구사하는 도진에게 묵직하다는 감각을 느끼게 할 만큼 유지은은 발전한 것이다.

    정의검가의 무공은 그 이름처럼 올곧은 것이 특징이다.

    다만 그저 올곧기만 하다면 무공이라 부를 수 없었으니 그 올곧음으로도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을 만큼의 무거움과 신비를 담고 있으며 그것이 파훼되지 않을 만큼 난해하기도 했다.

    유지은은 그런 신비와 난해함을 모두 이해했다.

    이해하여 구사할 수 있었다.

    본래는 거기에 파탄이 섞여 있었다.

    하늘만을 보던 유지은은 그렇기에 발밑이 불안정했으니까.

    하지만 더이상 그 불안정함이 보이지 않는다.

    심기체. 그중 '심'이 기와 체를 따라오지 못하던 불균형이 해소됨으로써 불안정함이 사라지자 재능의 화신이라 할 만한 유지은의 발전은 궤를 달리할 정도였다.

    와아아아아아-!

    도진을 몰아붙이는 유지은의 모습에 응원하던 사람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역시! 검봉은 검봉이지."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대단하긴 한데 검봉이 넘사벽이란 건 진리지."

    그런 평가 속에 밀리는 도진은, 오히려 웃고 있었다.

    -진짜 사기네요.

    -그것이 진짜 재능이라는 것이니라.

    그때의 실습 이후로 도대체 얼마나 지났다고.

    유지은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 정도라면 그날 보았던 내공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흑도의 간부마저 여유롭게 제압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말도 안 되게 발전해 버렸다.

    흔히 싸구려처럼 말하는 게 아니라 진짜 재능이란 이런 것이구나라고, 도진은 새삼 느껴야 했다.

    하지만 거기에 압도되지는 않았다.

    될 수가 없었다.

    이 재능을, 도진은 이미 특훈에서 질리도록 맛 보았으니까.

    두웅-!

    천마기를 일으키고.

    후웅-!

    무겁고도 신묘하게 덮쳐 오는 유지은의 검을 받아쳤다.

    꽈아아앙-!

    "……!!"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충격에 유지은이 한순간 밀려났다.

    도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공세로 전환했다.

    와아아아아아-!!

    쉬지 않고 움직이는 도진의 검은 그날과 마찬가지로 위지혁에게 배운 천마검공의 이치를 담고 있었다.

    무엇 하나 이치가 담기지 않은 검로가 없었고 무시무시한 천마기가 깃든 검격을 유지은은 쉼없이, 전력을 다해 받아쳐야만 했다.

    '너…….'

    눈으로 전해지는 감정에 도진은 슬쩍 미소를 보였다.

    이것은 그날 보여 주었던 '이치의 검'이지만 그때와는 또 다르다.

    당시 도진의 이치의 검은 흑도의 간부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자신의 내공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기에 그 틈을 이용하여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극한까지 집중할 '여유'가 있어야만 구사할 수 있다.

    그것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

    아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에 괴리가 있는 도진은 그 괴리를 감안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만 가진 것 이상을 발휘할 수 있었다.

    파탄이 없는 유지은을 상대로는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이건 그때와는 다른,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할 수 있는 것'이다.

    천재는 아니지만 천재를 따라잡기 위해 한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은 도진이었다.

    당연히 도진 또한 '발전'했다.

    '어때요?'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때 들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눈으로 하니 유지은은 도진을 닮은,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괜찮네? 하지만.'

    카칵-

    유지은의 검이 바뀌었다.

    정의검가 특유의 올곧고 무거우며 난해한 검이 정면에서 부딪치는 대신 도진의 검의 빈틈을 파고들려 했다.

    빗겨 내고 휘돌며, 기예로 승부를 보려 한다.

    그것은 유지은이 가장 자신 있는 것이었으며 도진을 상대로 '이치'를 겨루려 하는 시도였다.

    유지은은 생각했다.

    '알고 있었어.'

    도진이 자신보다 더 높은 경지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경지를 짐작할 수 없었기에 도진의 주위를 맴돌며 시선을 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이제 이 자리에서 그 짐작할 수 없었던 본모습을 보려 한다.

    도진은 예상대로 스스로 자부할 만큼 발전한 그녀의 경지마저 지나 있었다.

    그 경지를, 이 자리에서 그녀는 따라잡으려 했다.

    상대의 노하우를 보고 흡수하여 체화, 결국 상대를 넘어서는 건 그녀에게 있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당연한 일을 이 비무에서 이치를 겨루며 해낸다.

    도진의 검은 그녀가 보아 온 그 어떤 것보다 어려웠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녀의 재능은 그것마저 끄트머리부터 시작하여 이해하려 들었다.

    몰랐던 것을 알게 된다는 비할 데 없는 열락에 그녀는 취하여 몰두했다.

    심지어 그녀의 할아버지마저 보여주지 못했던 이치를 눈앞의 상대는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잊고 이치를 탐하던 그녀는 문득 끼어든 사념에 멈칫했다.

    '…….'

    그 사념을 상징하는 건 시선이다.

    아무렇지 않게 노력해 온 세월을 따라잡아 그것을 부정하듯 간단히 추월해 버리는 그녀를 바라보던, 형언할 수 없는 시선들.

    심지어 집안의 어른들이나 피를 나눈 형제, 친척들마저 그러했다.

    혹시.

    혹시 너마저 그런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나는…….

    그 사념에 떨리는 눈동자로 도진을 바라본 그녀는.

    '아…….'

    환하게 웃었다.

    도진은 그녀를 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언제나와 같은 눈동자로.

    어서 따라와 보라는 듯, 그녀의 손을 잡고 알지 못했던 세계로 이끌어 주려는 듯 오히려 손을 내민다.

    그녀가 전력을 다해 달리고 있음에도 도진의 등은 가까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를 상대로 몰래 조금씩 거리를 벌리는 것만 같다.

    정말로 그런 아이가 된 것처럼, 유지은은 이내 모든 사념을 지우고 도진의 등에 몰두했다.

    카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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