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1학년의 결승 비무가 도진과 우정한으로 정해진 다음날.
도진은 동생들, 그리고 지인들과 여유롭게 축제를 즐긴 뒤 2학년의 4강전을 관람하고 있었다.
8강부터는 1학년과 2학년이 하루씩 교대로 비무를 진행함으로써 하루의 휴식 시간을 부여했는데 결승 또한 다르지 않았기에 이렇게 도진이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다 비무를 관람할 수 있었다.
와아아아아아-!!
함성 속에서 진행되는 화려한 비무를 치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금봉 한유아와 폭룡 류대현이었다.
2학년 4강전 두 번째 비무로, 여기서 이기는 쪽이 결승 무대에 오른다.
2학년 비무에서 한 손에 꼽힐 만큼 기대되는 빅매치였기에 사람들의 관심은 컸고 그 관심을 충족해 줄 만큼 비무는 비주얼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뛰어났다.
꽈광!
폭룡 류대현은 권법가로 그 스타일이 일견 저돌적으로 보이나 사실은 그 모든 것이 계산되어 있는, '힘을 지략처럼 사용하는' 무인이었다.
다르게 비유하자면 '무공을 사용하는 강자'다.
본래 무공이란 약자가 강자를 이기기 위해, 혹은 인간이 맹수를 상대하기 위해 그것을 흉내내고 모방하여 만들어냈다고 한다.
여기서 류대현이 익힌 무공 맹호파산권(猛虎破山拳)은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했다.
약자를 이기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 무공. 무공은 약자를 더 강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그 무공으로 강자가 더 강해지면 더 좋지 않을까, 하고.
그리하여 맹호파산권은 사람을 맹수보다 강한 강자로 만들기 위한 단련법과 그 단련법으로 강해진 사람을 위한 무공을 합쳐 탄생했다.
월등히 뛰어난 육체로 그에 걸맞는 무공을 구사한다.
맹수가 무공을 사용하여 날뛰는 듯한 무공. 그것이 맹호파산권이었고 그런 특징이 류대현을 폭룡이란 별호에 걸맞는 무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류대현은 랭킹전에서도 맹호파산권 사용자에 걸맞는 압도적인 파괴력으로 상대를 제압하며 본선에 올라왔다.
사람들은 과연 폭룡이 이런 기세를 금봉 한유아를 상대로도 이어갈 수 있을지를 궁금해 했고.
'흐음.'
비무를 지켜본 도진은 안 될 거라 생각했다.
류대현은 분명히 강하고 그 강함을 전략적으로 이용할 줄 아는 강자 중의 강자다.
하지만 그 강함과 전략 양쪽에서 금봉 한유아는 류대현 이상이었다.
도진의 시선이 향하는 건 사람들의 눈을 홀리듯 수려한 한유아의 손이다.
곱고 아름다운, 마디 하나 보이지 않고 잡티 하나 없는 새하얗고 아름다운 손.
손 모델을 압도할 만큼 그녀의 손은 외모 못지 않게 아름답다.
본래 거칠고 투박한 자신의 손에 콤플렉스를 가진 무인이 많은 무림에서는 보기 힘든 손이다.
무공을 익히며 자연스레 터지고 갈라져 굳은살이 박히고 마디가 굵어지는 게 당연한 것인데 그 당연하지 않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데서 한유아의 손이 특별하다는 것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소수(素手)라는 것이 있다.
소수. 무협지에서 흔히 등장하는 '소수마공(素手魔功)'이라는 게 있다.
새하얀 손이 특징인 무공으로, 위지혁은 그런 무공이 실재했다고 알려 주었다.
-거죽을 벗겨내고 근육마저 무수한 칼집을 내지. 그리하여 뼈에까지 스며들도록 한기와 특별한 약재를 배합한 약물에 손을 담그고 내공을 운용하게 한다.
그렇게 단련하면서 더욱 질기고 단단한 근육과 피부를 가지게 되며 회복된 손은 티없이 하얗고 아름답지만 고무보다 질기고 철보다 단단해진다.
-당연히 소수는 아니겠지만 저 아이의 손 또한 못지 않은 고통 끝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새하얗고 아름답다 해서 연약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굳은살이 박히지 않아도 되고 투박하지 않아도 될 만큼 '단련되어 버린' 것이 저 형태다.
그러니까 저 손은 류대현의 단련된 육체에 못지 않은 흉기였다.
여기에 성명절기인 황익무를 구사하는 한유아의 심계가 류대현을 압도한다.
무공이란 수 싸움이며 이 수 싸움에서 류대현은 자신이 한유아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장기인 파괴력을 앞세워 단기전으로 끝낼 생각이었으나 한유아가 거기에 응해주지 않고 철저하게 상대의 힘을 빼는 형태로 경기를 이끌었다.
꽈과광!
류대현이 연신 굉음을 울리며 몰아치고 한유아는 그것을 받아침으로써 폭음이 터지고 화려한 초식이 난무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류대현의 손해로만 끝나는 공수의 교환이었다.
탁!
대포처럼 쏘아진 류대현의 주먹을 황익무의 장법으로 궤도를 틀고 조법으로 비튼다.
그렇게 기세를 죽인 뒤에 권법으로 측면을 치니 '쾅!'하는 굉음이 터지는데 류대현은 그 힘을 기세가 죽은 상태에서 받아내기 위해 손해를 보아야만 했다.
그런 식으로 손해를 보는 공수의 교환 끝에 힘의 총량이 역전 되어서야 한유아가 승부에 나섰다.
류대현이 그 승부에서 빼지 않았기에 마지막이라는 듯 서로의 한 수가 통렬하게 격돌했고.
꽈아앙!
"한유아 승!"
한유아의 승리로 비무는 마무리 되었다.
와아아아아아아!!
"최고다!"
환호 속에서 한유아와 류대현이 비무대를 내려온다.
류대현은 3위 결정전을 치르게 되었고 한유아는 결승에 오르게 됐다.
그 양상은 재밌게도 1학년의 랭킹전을 많이 닮아 있었다.
올해의 1학년 랭킹전은 사실상 결승의 한 자리를 도진이 맡아 놓고 나머지 한 자리를 가리는 비무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실제로 도진은 결승까지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주며 승승장구했다.
남은 한 자리는 도진의 친구인 소담과 우정한의 차지가 되지 않을까 사람들은 예상했고 그 예상대로 비무 끝에 우정한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2학년도 비슷했다.
사실상 결승의 한 자리는 유지은의 것으로 결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자리를 누가 차지할 것인가였는데 작년 숭무회 축출을 함께 했던 삼인방 중 둘인 금봉과 폭룡 중 한 명이 되지 않을까 하고 예상했고 비무 끝에 금봉의 차지가 되었다.
"축하해요, 선배."
비무대를 내려온 한유아에게 도진이 축하 인사를 건넸다.
류대현에게도 수고하셨어요, 하고 인사하는 걸 잊지 않았다.
류대현은 졌으나 시원한 얼굴이었다.
그는 본래 그랬다.
패배를 분해하고 아쉬워하지만 마음에 담아 두어 독으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원동력 삼아 더욱 노력하는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더욱, 무서운 속도로 강해지는 멋진 남자였다.
그러니까 전생에서도 폭룡은 무림을 대표하는 고수로 이름을 떨쳤었다.
한유아는 도진의 축하에 싱긋 웃었다.
"고마워. 근데 우리 후배는 오늘도 이렇게나 여유롭구나?"
한유아의 말에 도진이 여유로운 얼굴로 웃었다.
"공부도 그렇지만 무공도 평소에 꾸준히 하는 거죠."
"와, 우등생이 이러니까 정말로 얄밉구나."
도진의 대답에 한유아는 과장되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한다.
장난이었지만 사실은 조금, 속마음을 담고 있는 말이었다.
그런 한유아의 모습에 류대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다른 사람이 너를 보면 딱 그런 느낌이지 않을까?"
"나 같은 노력하는 가련한 여학생이 또 어딨다고?"
"와……. 아, 진짜 한 대만 때리게 해 주지 않을래?"
"하하하."
두 사람의 모습에 도진은 웃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류대현도 그렇고 한유아 역시 상상도 못할 만큼의 노력을 계속하고 있음을 도진은 짐작할 수 있었다.
한유아를 처음 만났던 날 손을 섞었을 때 그녀가 구사했던 것이 금황조라는 걸 이제는 안다.
이제는 그때 그녀의 행동이 도진에게 관심을 가지고 실력을 알아보고 인연을 만들어 두기 위해 했던 일이라는 것도 안다.
그때의 기준으로 그녀의 실력은 객관적으로 판단해 미숙했던 도진 이상이었다.
당시 그녀의 실력을 꿰뚫어 보진 못했으니 그때에 비해 얼마나 발전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그때의 경지가 어느 정도였든 그녀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왔다는 것만큼은 극명했다.
그리하여 처음 보았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발전한 그녀의 무공을 비무에서 볼 수 있었다.
그리도 아마도, 유지은 역시 그러할 것이었다.
달리기 시작한 규격 외의 천재가 얼마나 발전했을지 도진은 짐작할 수 없었다.
두근두근!
허나 그 미지(未知)는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알고 싶고 경험해 보고 싶다.
흔히 말하는 '네타'를 당하지 않고 스스로 경험하여 알고 싶었기 때문에.
도진은 일부러 유지은의 비무는 눈에 담지 않았고 같은 마음이었던지 유지은 또한 도진의 비무는 보러 오지 않았었다.
'얼마 남지 않았네.'
유지은은 도진에게 랭킹전의 결승에서 붙자고 말했었다.
거기서 유지은은 도진이 삶의 목표로 삼을 만한 사람인지를 확인하고자 했다.
조금 고민했지만 도진은 당분간 그녀의 삶의 목표가 되어 주기로 했다.
가고자 하는 길을 찾을 때까지 그녀를 이끌어 주는 등대가 되어주려 한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유지은을 이기겠다는 마음가짐을 전제로 한 생각이었다.
그녀를 이기기 위해서는 아직 한 걸음을 더 나아가야 했다.
그녀와 만나기 위해선 1학년 우승을 차지해야 했고 도진은 그 우승을 차지하기 위해.
와아아아아아-!!
마침내 시작된 결승전 무대에 올랐다.
* * * *
랭킹전 1학년 결승전.
무대에 오른 도진은 어느 한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 시선의 끝에는 도진의 부모님, 동생들, 그리고 이웃사촌들까지 모두 함께 자리해 있었다.
무진혁을 상대했던 64강에서처럼, 김서우와 서정원이 아들의 결승전을 관람하기 위해 시간을 내어 자리한 것이었다.
역시나 그날처럼 오늘 도진이 특별히 몸단장을 하고 무대 위에 오른 이유이기도 했다.
꾸벅.
부모님을 향해 도진이 인사했다.
마주한 우정한 역시 반대편의 부모님을 향해 합장을 한 뒤에 도진을 마주했다.
은은히 미소짓고 있는 우정한을 보며 도진은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전생의 이때 랭킹전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
다만 한 가지, 이 결승에서 우정한이 비봉 서소담을 꺾고 1학년 우승을 차지했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었다.
그래, 본래 이 결승 무대의 주인공은 우정한이었다.
하지만 도진은 그런 전생의 기억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았다.
이미 겪었던 일이고 결론을 내린 고민이었으니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생에서의 일이다.
새로운 삶을 사는 도진은 이 세계의 불순물이 아니며 부정한 방법으로 이득을 취하려 하는 악당도 아니었다.
정정당당하게 노력하여 이 자리에 섰고 친구와 순수하게 비무를 하려 하는, 거창하지만 당연한 말로 이 세계의 구성원이자 한 생명이다.
그러니까 당당하게 백설을 들었다.
친구와, 우정한과 결승 무대에서 무공을 겨루고 싶다.
이겨서, 우승자가 되고 싶다.
이겨서, 약속했던 대로 통합 결승 무대에서 유지은과 겨루고 싶다.
그리고 이겨서, 지켜보는 부모님에게 랭킹전 우승패를 안겨드리고 싶다.
하고 싶은 것이 몇 가지나 머릿속에서 떠올랐고 이번 삶에서는 욕심쟁이가 되기로 했던 도진은 그 모든 것을 이루고 싶었다.
"례!"
그것을 이루기 위해, 도진은 천마기를 일깨웠다.
두웅-!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