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229화 (229/741)
  • 228화

    "음, 이번 랭킹전 본선은 뒤가 조금 아쉽네요."

    누군가의 말에 다른 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네요."

    그들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 그리고 일반인들마저 그렇게 생각하는 의견들이 꽤 많았는데 실제로 경기의 내용 측면에서 1라운드나 2라운드에 비해 아쉬운 면들이 있었다.

    "아무래도 실력 있는 학생들이 꽤 많이 빠졌던 데다 강정민 학생이나 무진혁 학생도 빨리 떨어졌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그 이유의 근본적인 부분은 의외라면 의외인, 그러나 알고 보면 당연한 것으로 도진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번 랭킹전에는 손꼽히는 실력을 가진 학생들이 생각 이상으로 많이 제외되어 있었는데, 다름 아닌 숭무회에 소속될 만한 1학년들은 물론이요 후기지수에 버금가는 취급을 받던 태양권가의 권민국이나 관현 그룹의 곽필섭까지도 도진에 의해 이번 랭킹전의 참가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숭무회는 적나라하게 말해 '일진 양아치 클럽'이었지만 다른 곳도 아닌 숭무고에서 어깨에 힘 줄 수 있을 만큼, 그들이 이곳 숭무고에서도 손꼽히는 배경과 실력을 지닌 학생들인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바로 그런 실력자들이 도진에 의해 박살이 나고 제명당하거나 정학을 먹어 랭킹전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어지보면 랭킹전 이전에 도진이 개인적으로 그들을 모조리 박살내 버린 형국이다.

    여기에 숨은 실력자였던 강정민은 128강, 그러니까 1라운드에 탈락해 버리기까지 했다.

    "강정민 학생이라도 상위권까지 올라왔다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게요. 아마 그 자부심 때문이었을 겁니다."

    강정민은 바로 그 호원무가의 장남이다.

    비록 입학 시험 때의 비무회에서 1라운드에 탈락했다지만 야간반을 다니며 충분히 자신을 증명했을 테니 출신까지 맞물려 충분히 본선 대진표를 짤 때 고려를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게 작업하려 했을 것이고.

    하지만 아마도 본인이 그것을 거부했을 거라고 업계의 관계자들은 생각했고 실제로 그러했다.

    강정민은 스스로의 노력과 실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자만이 아닌 자부심이 될 만큼의 노력을 거듭해 왔다.

    그런 성격이었으니 우승 후보끼리 피하게 만드는 대진표를 거부했고 공교롭게도 본선 1라운드에서 도진을 만났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실력자가 부족해진 랭킹전은 분명히 그 수준이 높긴 했으나 콜라에 넣었던 얼음이 녹은 듯 약간 아쉬운 부분들이 있는 경기가 중반부부터 보이곤 했다.

    실제로 도진은 강정민과 무진혁을 만났던 128강과 64강은 화려하게 승리했으나 그 다음 32강과 16강은 상위 라운드임에도 역으로 심심하게 승부를 결정지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사실상 확정된 8강을 더 기대했으니 다름 아닌 도진과 그 친구로 알려진 나지윤의 대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대를 배신하지 않고 도진과 나지윤의 비무는 화려하게 비무대를 수놓고 있었다.

    팍-!

    강하게, 그러나 모순되게도 가벼운 몸놀림으로 나지윤이 비무대를 가로질렀다.

    그런 나지윤이 사용하는 무기는 두 자루의 단검이었다.

    본래 단검이란 날붙이이면서도 리치가 짧아 선호되지 않는 무기였는데 나지윤은 그런 비주류의 무기를 사용했다.

    백설을 든 도진을 상대로 불리한 사정거리를 가진 나지윤은 일견 무모해 보일 만큼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가.

    쉭-

    도진의 백설이 휘둘러지는 순간을 마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누가 뒤로 잡아당긴 것처럼 물러나며 손목을 노렸다.

    그리고 도진은 그런 나지윤의 공격을 '보고도 이해할 수 없는 곡선'을 그리며 피했다.

    와아아아아아-!!

    불리한 사정거리를 오히려 상대의 공격을 역이용하여, '상대가 접근하도록' 만들고 그 손목을 노리는 그림.

    그 그림을 만들어내는 나지윤과 도진의 무공 수준이 높으면서도 화려했기에 사람들은 열광했고 무림의 관계자들 또한 감탄했다.

    "저 친구가 답청문의 후계자였죠?"

    "예. 이번 년도 비무회 때부터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좋은 의미로 정보 회사의 후계자로는 어울리지 않는 실력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정보 회사의 후계자들은 의도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설령 무공이 강하다 해도 업계 특성상 명성을 얻어봐야 오히려 득보다 실이 많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들은 나지윤이 일진 무리의 그룹에 억지로 포함되어 있었던 입학 시험 때의 모습을 오히려 본분에 충실한 위장으로 여겼었다.

    하지만 그 태도가 숭무고 입학 시험부터 완전히 달라졌다.

    비무회에서 상위권에 들었던 나지윤은 점점 더 자신을 드러내더니 지금에 와서는 랭킹전 8강에 올라 잠룡 김도진을 상대로도 선전하고 있었다.

    오히려 무진혁보다 나아 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은 그들의 감탄을 이끌어내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도진과 위지혁 또한 마찬가지였다.

    -비각(秘閣)에 소속된 후기지수를 닮은 모습이로구나.

    위지혁이 말하는 비각이란 무림맹의 정보 단체였다.

    그쪽 계통의 무인들은 으레 그렇듯 은신과 잠입에 능했는데 여기에 이름 있는 명문 정파의 후계자들이 소속되면 무공이 강하면서도 '아웃 파이터' 같은 면모를 보이게 된다.

    본디 명문 정파의 후계자라면 '정정당당하게 승부하자!' 같은 소리를 하는 이미지가 있고 실제로도 그러한데 여기에 비각을 끼얹으면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는 무공을 가지고 몸을 사리고, 승부보단 안전하게 몸을 빼는 버릇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는 비각이 승부보다는 정보를 빼내어 그것을 전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었는데 바로 그런 면모를 지금 나지윤이 보이고 있었다.

    -저 아이는 정보 단체, 그러니까 회사의 아이라고 했었지.

    -예.

    -정말로 많이 노력한 모양이구나.

    -그런 것 같습니다.

    처음 보았을 때의 나지윤은 굳이 따지면 '그냥 비각 소속의 무인' 같은 느낌이었다.

    상대의 급소를 노려 단번에 무력화시키는 날이 서려 있는 무공을 구사하긴 했으나 이렇게 수준 높으면서도 도진을 맞상대할 만큼의 '힘 있는' 무공을 구사하진 못했었다.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거나 특별한 다른 무공을 익힌 게 아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말 그대로 나지윤이 뼈를 깎는 노력 끝에 그 경지를 이룩한 것이었고 그래서 도진과 위지혁은 감탄했다.

    '그랬었지.'

    도진의 부탁을 언제나처럼 웃는 얼굴로 들어주면서도 점심 시간엔 바쁜 일이 있다며 항상 자리를 비웠었다.

    그 그림 같은 미소를 지으며 여유를 보이던 나지윤은, 뒤에서는 이런 무공을 구사할 수 있을 정도로 노력했고 그렇기에 호감이 가는 친구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도진은 갑자기 들려 온 친구의 '섭음술'에 마음이 흔들린 것이었다.

    "도와줘."

    "……!"

    섭음술이었기에 그 목소리는 도진만이 들을 수 있었다.

    한 발 더 나아가 복화술처럼 입술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비무의 흐름 또한 자연스러웠기에 그 누구도 나지윤이 지금 말을 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었다.

    도진은 전혀 티를 내지 않으며 백설을 움직였고 나지윤은 몇 번이고 반복되었던 패턴 대로 욕심을 내지 않고 그 범위에서 벗어났다.

    나지윤은 도진의 공격에서 벗어나자마자 변칙적으로 방향을 바꿔 옆구리를 노리며 접근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가능하면."

    훅-!

    "들어줬으면."

    접근할 때마다 짧게 말하고서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그리하여 완성된 문장은 이러했다.

    가능하다면 들어줬으면 하는 게 있어.

    자세한 건 뒤에 시간을 내서 만나서 할게.

    갑작스러웠지만 그동안 몇 번이고 도진을 도와주었던 친구였다.

    때문에 도진은 고개를 끄덕이고선 '전음(傳音)으로' 말했다.

    -네가 처음으로 하는 부탁인데 당연히 들어줘야지.

    "……!"

    나지윤은 섭음술이 아닌 전음에 살짝 눈동자가 흔들렸으나 곧 그 기색을 지워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하나의 문장을 끊어서 말했는데,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으나 도진은 더욱 크게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너만이 아니라 어쩌면 소담이도 연관된 일일지도 몰라.

    그 내용이 상상도 못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 역시 밑천을 꺼내야겠네."

    더 이상은 의심을 살 수도 있었기에 반복된 흐름을 끊듯 거리를 벌린 나지윤이 그렇게 말하며 내공을 끌어 올렸다.

    도진은 더 듣고 싶은 말이 있었으나 그런 내막을 짐작할 수 있었기에 역시 웃으며 백설을 들었다.

    "간다!"

    쾅!

    시작은 다르지 않았다.

    강하게 땅을 박찼으나 깃털 같은 움직임으로 파고들었고 도진은 백설을 그었다.

    피잉-!

    나지윤은 그 백설의 사정거리를 아슬아슬하게 벗어났다.

    여기까지만 보면 다를 게 없었으나 사람들은 곧 크게 웅성거렸으니 뒤로 더 거리를 둔 나지윤과 달리 단검은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한 채 제자리에서 회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쾅!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인식한 순간 나지윤이 각법으로 그 단검의 손잡이를 차 총알처럼 도진을 향해 쏘아냈다.

    마치 지금껏 반복된 양상을 모조리 미끼로 쓴 듯한 변칙적인 한 수였고 승부를 걸어볼 만한 멋진 한 수였다.

    …그 상대가 도진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도진은 나지윤이 단검을 놓는 순간 이미 그것을 포착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나지윤이 단검을 차내는 순간 이미 대응을 하고 있었다.

    살짝, 그러나 신묘하게 몸을 틂으로써 단검의 궤적을 벗어났고 그것을 진각으로 이어 강력한 발차기를 나지윤에게 적중시켰다.

    단검을 차내는 반탄력으로 거리를 벌리려 했던 나지윤보다 도진의 발차기가 한 발 더 빨랐다.

    꽝!

    처음으로 적중한 도진의 공격.

    그것으로 나지윤은 비무대 밖까지 튕겨나가야 했다.

    휘릭!

    그러나 곧 그림 같이 몸을 회전해 바닥에 내려섰다.

    속수무책으로 밀려났으나 그 찰나의 순간 단검을 내밀고 검면을 팔뚝으로 지지해 도진의 발차기를 막아내며 그대로 밀려나 최대한 힘을 흘림으로써 타격을 최소화한 것이었다.

    그리고 바닥에 내려선 나지윤은 두 손을 들며 말했다.

    "후우. 졌습니다."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랭킹전에서 장외패는 없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더 싸울 수 있을 것처럼 보였던 나지윤은 두 손을 들어 패배를 인정했기에 8강전의 승자는 도진이 되었다.

    "김도진 승!"

    와아아아아아-!

    사람들은 나지윤의 기권을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함성을 보내 주었다.

    스스로가 말한 대로 '밑천'까지 보여주며 승부에 임했고 그것이 파훼당했다.

    생사결이 아닌 비무인 이상 여기서 승부를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깔끔한 마무리였다.

    "허허. 대단하네요. 답청문에 저런 기술이 있었을 줄이야."

    "모르고 상대한다면 웬만큼 압도적이지 않고서야 당할 수밖에 없겠군요."

    "…더 놀라운 건 저게 오히려 함정이라는 거겠지요."

    "그러게 말입니다."

    나지윤은 방금 보여준 한 수를 '밑천'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업계의 관계자들 중 누구도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지윤은 그냥 무림인이 아니라 정보 단체의 후계자다.

    그것도 숭무고에 입학하여 눈부신 성장을 보여줄 만큼의 천재.

    그런 무인이 학생이라고 해서 생각없이, 정말로 밑천을 드러낼 리가 없다.

    그러니까 이건 오히려 일부러 보여준, 보는 것만으로도 함정이 되는 한 수라 보는 것이 타당했다.

    그 함정의 다음이 무엇일지 기대되면서도 경계를 하게 만들었기에 나지윤의 이름은 사람들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기대를 200% 충족시켜준 도진과 나지윤의 8강전 이후.

    우정한은 당연하게도 8강에 이어 4강도 승리하였고 도진 또한 결승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하여 학년의 최강자를 가리는 1학년 랭킹전의 마지막 비무는, 도진과 우정한의 비무로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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