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무진혁의 명예로운 죽음, 아니 패배로 마무리된 도진의 64강 비무는 여러가지로 화제가 되었다.
"이렇게 보니 무진혁 학생이 확실히 상위권이라는 게 드러나네요."
쾅! 쾅!
"예. 저 정도 수준의 힘과 속도, 그리고 초식을 구사하는 대결은 숭무고의 본선 정도가 아니면 보기 힘들죠."
기준이 잠룡 김도진이 되었던 탓에 눈이 너무 높아져 있었음을 그들은 64강 도진과 무진혁의 비무로 새삼 깨닫게 되었다.
굉음이 울리고 물리력을 행사할 정도의 경력(勁力), 그러니까 내공의 힘이 외부로 발출되는 수준의 비무는 학생 리그에선 숭무고 본선 정도는 되어야 견식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것을 전문 용어(?)로 해서 '평타'마다 깃들여 부딪치고 있으니 숭무고에서도 손꼽히는 학생들의 비무에 어울리는, 감탄이 절로 나올 수준이다.
다만 그렇기에 더더욱 도진의 경지가 압도적이고 놀랍기만 하다.
지금껏 구름 속에 본체를 숨기고 꼬리만을 드러낸 용처럼, 혹은 깊은 물 속에서 그림자만을 보여주는 잠룡처럼 비무에 임했던 도진이었다.
그나마 강정민 정도가 제대로 된 일초(一招)를 이끌어 냈을까.
그런 김도진이 선공을 취한 것만으로도 모자라 적극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이유는 분명했다.
잠룡, 그의 부모님이 참관하고 있었으니까.
자랑스런 아들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듯 신명나게 무공을 구사한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제대로 실력을 드러낸 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신명나게 휘두르지만 분명히 손속에 여유를 두고 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미안한 이야기지만 무진혁은 단 한 방에 비무대 밖을 날아야 했을 것이다.
새삼스럽지만 무진혁은 '에스포'라는 이름으로 숭무고에서도 정점을 다툴 그룹의 한 명이었으며 배경으로도 숭무고에서 손에 꼽을 만큼 부족함이 없는 학생이다.
64강이 아니라 8강, 4강에 이름을 올려도 어색하지 않을 학생.
반대로 말하자면, 그 정도는 되어야 '봐주는 김도진'을 상대로나마 합을 맞출 수 있다는 소리다.
도진은 그만큼이나 격이 달랐다.
업계의 관계자들은 물론이요 관람한 사람들 또한 그런 도진의 실력과, 부모님의 참관에 '쇼'를 펼친 행동 등이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잠룡도 휴먼이었구나.
-ㅋㅋㅋ 인간미 ㅋㅋㅋ
-아 ㅋㅋ 부모님 오셨는데 재롱잔치 해야하자너..ㅋㅋ
-무진혁 : 왜 나만..
-무진혁 : 패배가 두 개지요! E번 졌습니다!
그렇게 화제가 되고 있는 도진은 비무가 끝난 후 부모님을 배웅하기 위해 주차장에 와 있었다.
"잘 봤어, 도진아."
"다행이네요."
"하하! 걱정할 게 어디 있겠습니까. 이미 우승은 따 놨는데 말입니다."
혹여 과한 자랑으로 비칠까 자중하는 부모님보다 오히려 우벽진이 목소리를 높였다.
우서진은 그런 할아버지를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합세해서 '당연하죠!'라며 같이 목소리를 높였고 상미도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우서연이라는 브레이크마저 없었다면 우벽진의 주접은 끝을 몰랐을 것이었다.
"아, 그래. 도진아 결승전은 목요일이라고 했지?"
아버지의 물음에 도진은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1학년의 결승전은 목요일 2학년의 결승전은 금요일에 진행된다.
그리고 이 결승전의 우승자 두 명이 토요일에 특별전을 치름으로써 랭킹전은 끝이 난다.
축제는 일요일 마무리 되며 월요일은 학교 재량 휴무로 하루를 쉰다.
"그래, 그럼 금요일이나 토요일 오는 게 좋겠네."
오늘에 이어 가족들은 하루 더 시간을 맞춰 도진의 비무를 보러 오기로 했었다.
도진은 웃으며 말했다.
"언제든 괜찮아요. 편하신 날에 오시면 돼요."
아들은 그렇게 말을 하지만 김서우도 서정원도 편하게 받지 않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도진이 정말로 좋아했음을 부모가 어찌 몰라 보겠는가.
그러니까 금요일이든 토요일이든 꼭 일정을 맞추어서 가능하면 결승을 보러 오기로 다짐했다.
"그래, 그럼 정해지면 알려줄게."
"네, 어머니.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도진네 식구들과 상미, 우 명장네, 그리고 웨일스 후작네가 도진의 배웅을 받으며 함께 떠나갔다.
길었던, 그러나 즐거웠기에 아쉬웠던 하루를 마무리하고 도진은 다음날을 위해 수련을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 * * *
도진은 32강 또한 무난하게 승리했다.
상대는 32강에 올라올 만큼의 실력이 있는 학생이었지만 도진에게 있어 큰 의미를 가질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오대용을 이기고 32강에 올라온 주정아는 여기서 소담을 만나 탈락했다.
소담은 언제나처럼 특유의 움직임으로 주정아를 상대했다.
옷자락을 나풀거리는 선녀처럼, 혹은 바람처럼 움직이며 단 한 대도 허용하지 않았던 그 움직임에 지금껏 모두가 무력하게 패배했다.
허나 주정아는 연류창법으로 그 움직임에 대항했다.
억지로 바람을 꿰뚫으려 하지 않고 부드럽게 받아서 넘기려 했다.
바람을 걷어내 그 안에 숨은 실체, 소담을 치려 한 것이다.
그 시도는 놀랍게도 성과를 거두는 데 성공했다.
처음으로 소담의 움직임을 붙잡은 것이다.
"허, 주정아 학생이 그나마 대처를 하는군요."
"그러게요."
허나 딱 거기까지였다.
소담의 움직임을 붙잡긴 했으나 일순간이었으며 걸음을 잠시 지체시켰을지언정 공격마저 저지하진 못했던 것이다.
오히려 그 한순간의 지체에 너무 공을 들이느라 어느 순간 커다란 빈틈을 드러내고 말았다.
"서소담 승!"
"으음, 비봉은 비봉이네요."
"그렇네요. 주정아 학생도 대단했지만 서소담 학생은 그 이상을 보여주는군요."
패배했으나 주정아는 시원하게 웃었다. 오히려 소담이 조금 난처한 얼굴이었다.
주정아는 그런 소담을 오히려 위로하고선 오대용에게로 향했다.
도진은 위로의 명목으로 끌려다닐 오대용의 모습을 상상하며 옅게 웃었고 수건과 물병을 가지고 소담에게로 갔다.
"수고했어."
"응. 고마워."
도진이 건네는 수건과 물병을 받으며 소담은 옅게 미소지었다.
그 미소는 울타리 너머에 가려져 있어 약간 흐릿한 것 같았다.
아직 서로의 울타리 너머까지는 허락하지 않았으나 문은 열어 두었고 손을 뻗어 서로 잡고 있었다.
한데 지금은 그 문이 닫힌 듯 어떤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16강.
소담은 우정한과 마주하게 되었다.
와아아아아아-!!
손꼽아 기다렸던 매치라는 걸 알려주듯 사람들의 함성은 컸고 관계자들의 주목 또한 여느 때 이상으로 높았다.
비봉과 유룡.
숭무고를 대표하는 후기지수들의 대결이었다.
"입학식 땐 비봉이 이겼죠."
"네.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었지만요."
"이번에는 어떨지 모르겠네요. 비봉이 그때의 아쉬움을 지우듯 깔끔하게 승리할지, 아니면 조용히 수양을 쌓았던 유룡이 친구인 강정민처럼 성장한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가 되네요."
"시작!"
사람들의 기대 속에서 비무가 시작되었다.
타앗!
우정한은 단단히 뿌리내린 거목처럼 비무대 위에 섰고 소담은 그 거목 주위에 부는 바람처럼 보법을 밟았다.
양상은 두 사람 다 지금까지 승리해 왔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소담은 잡히지 않는 바람처럼 상대의 주위를 돌다 틈을 찌르려 했고 우정한은 그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는 철벽처럼 그 자리를 고수했다.
팟-!
선공은 소담이었다.
정석처럼 시야가 미치지 않는 뒤를 잡는 순간 시선이 향할 틈을 주지 않고 번개처럼 덮쳤다.
슥-
하지만 우정한은 뒤에도 눈이 달린 듯 너무나 자연스럽게 소담의 검을 피했고 심지어 그와 연계되는 초식을 펼칠 틈도 주지 않고 역공을 가했다.
쾅!
손바닥과 검에 담긴 서로의 내공이 충돌하며 폭음이 일고 반탄력을 이용하여 소담이 물러났다.
-…허허. 많이 성장했구나.
-예.
단순한 한 수였지만 그 한 수로 위지혁은 물론이요 도진 또한 많을 것을 볼 수 있었다.
지금껏 조용히 학교와 절에서 시간을 보낸 우정한은 그러나 누구보다 큰 성장을 이룬 것처럼 보였다.
-산을 빨리 달린다는 건 주변을 다 담지 못한다는 것이지. 그나마도 그 속도로 계속 달리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천천히 계속 걸어 나가며 모든 것을 눈에 담는 게 더 좋은 법.
도진에게 있어 우정한은 그야말로 '상선약수(上善若水)'란 단어가 떠오르는 친구였다.
흐르는 물처럼 끊임이 없다.
길이 제아무리 복잡해도 유유히 흐르며 부드러우니 부딪침이 없다.
욕심내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사는 우정한은 그렇기에 필사적으로 수련하는 이들보다 오히려 빠르게 길을 걸어 나가고 있었다.
…그에 비해 소담은 거칠었다.
파악!
육체는 성장했으나 조급함을 띠는 정신이 그것을 온전히 다스리지 못한다.
그렇기에 파탄이 보이고 있었다.
쿵!
그녀의 검로가 우정한의 주먹에 막혀 가야할 길에서 튕겨 나가고 만다.
본디 무공이란 심기체(心技體), 그러니까 육체만이 아닌 정신과 기술이 함께 유기적으로 작동해야만 하는 것이다.
육체를 극한까지 활용해야 하는 것이니 그것을 활용하기 위한 기술은 당연히 중요하다.
여기에 어떤 일을 할 때 그 사람의 정신 상태가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으며 그것이 육체를 극한까지 활용하는 무공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하물며 진무는, 신비를 구사하는 진무는 더더욱 미세한 정신 상태에도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으니 소담의 패배는…… 결정된 미래였다.
발전한 육체와 기술을 정신으로 다스리지 못했다.
그래서 소담이 펼친 무수한 검로의 길, 선로(仙路)는 거목의 단단함과 갈대의 부드러움을 동시에 지닌 우정한에게 간파당했고 파훼당했다.
"우정한 승!"
와아아아아아-!!
"허어, 이번엔 유룡이 이겼군요."
"예. 정말로 많이 발전한 게 보였습니다."
"비봉은 뭔가 좀 불안한 면이 보이던데……."
"그 나이 또래의 천재들이 으레 보이는 불균형일 것 같네요. 훌륭하게 이겨내겠지요."
사람들의 함성과 평가 속에서 우정한은 무대를 내려왔고 어느 한 곳을 향해 합장했다.
거기엔 우정한의 부모님, 덕이 높은 승려 부부가 자리해 있었다.
도진은 그런 우정한과 달리 홀로 비무대를 내려와 걷는 소담에게 이번에도 수건과 물병을 건넸다.
"고마워."
"뭘."
소담은 웃으며 그것을 받은 뒤 대기실로 향했고, 따라가지 않고 자리에 남은 도진에게 우정한이 다가왔다.
"축하해."
"감사합니다."
기척을 느끼고 있었기에 인사를 건네는 도진에게 우정한이 합장하며 미소짓고선 말했다.
"소담 보살님이 고민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응. 그런가 봐."
"도진 시주님께서 잘 살펴봐 주십시오."
우정한의 말에 도진이 짙게 웃었다.
그것은 우정한 나름의 친구를 걱정한 말이었다.
더불어 소담과 가장 가까운 사이인 도진을 믿는다는 말이기도 했다.
"응, 눈을 안 떼고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그렇군요."
답답한 건 사실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자신만의 감정으로 무조건 해결하려 들어선 안 된다.
각자의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으니까.
소담은 조금 더 고민하여 스스로 판단할 권리가 있다.
그것이 친구에 대한 존중이다.
그리고 도진은 알고 있다.
더 이상 소담이 도진을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걸.
그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아직 놓지 않은 손을 통하여 전해지는 감정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뒤에서 지켜보고 기다려주면 된다.
* * * *
우정한의 뒤를 이어 도진도 당연하게 8강 진출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그 8강에서, 도진은 친구를 상대로 맞이하게 되었다.
"여기서 만나네."
"그러게."
도진을 마주한 건 수려한 외모가 돋보이는 미소년.
바로 나지윤이었다.
그 나지윤이, 비무 중에 도진의 마음을 흔들었다.
"도와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