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즐거운 하루였다.
도진도 사람인 이상 사실 요즘 알게 모르게 피로가 쌓인 부분이 있었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유지은과의 비무를 위해 평소 이상으로 수련을 하고 있었으니 조금은 지치는 게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게 쌓이던 피로가, 동생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해소되었다.
"응? 무림열전을 같이 해 보자고?"
"네. 겨울방학 때 같이 VR방 가요, 우리."
생각지 못했던 우서진의 제안에 도진은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그리고 머릿속에 전생에서의 추억이 떠올랐다.
무림열전.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중소기업이었던 게임 회사를 대기업으로 만들어 주었으며 소위 말하는 'AAA급'으로 성장한 대작이었다.
덤으로, 오늘 만났던 유애라가 이름을 크게 알리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던 게임이기도 했다.
도진도 관심은 있었지만 그것이 VR 게임이었기에 기기 마련은 물론이요 VR방도 돈 문제로 엄두도 못냈었는데 어느날 우서진이 PC 버전을 두 개 구매해서는 같이 하자고 건넸던 것이다.
메인으로 함께 하던 온라인 게임에 흥미가 조금은 식었던 시기라 얼마간 거기에 심취했었고 상당히 즐겁게 플레이 했었다.
VR이 아닌 모니터 너머였으나 화려한 그래픽과 준수한 스토리에 힘입어 당시엔 이루지 못했던 무림 고수가 되어 동료와 함께 스토리를 진행할 수 있었으니까.
다만 게임이 끝나고 잠자리에 누웠을 땐 그만큼 상실감도 컸었다.
바로 그런 추억의 게임을, 현생에서 우서진에게 VR로 하자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느낌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저도 그렇고 상미도 형도 방학이면 시간 맞출 수 있을 거 같은데…… 혹시 바쁘실까요?"
우서진의 물음에 도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나야 언제든 시간 있는 사람이잖아. 그래, 같이 한 번 해보자. 나도 관심 있었거든."
"정말이죠?"
"그럼 정말이지."
웃으며 말하니 우서진이 주먹을 불끈 쥐고 상미의 얼굴도 은근히 피어난다.
잔뜩 기대하고 있었음이 드러나는 모습에 도진의 웃음도 조금 더 짙어졌다.
집에서 해도 될 것을 굳이 VR방에 가서 하는 데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기기를 마련하기 힘든 상미에 대한 배려도 있을 테고 '친구들과 함께 VR방에 간다'는, 우서진으로서는 버킷리스트나 다름없었던 일을 해보고픈 생각도 포함되어 있을 터.
그리고 그것은 사실 전생에서 도진이 동경하던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겨울방학 때를 기약한 즐거운 약속 하나를 했던 동생들과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저녁이 되어 비무를 관람하게 되었다.
재학생과 손님의 자리가 달랐기에 아쉽게도 동생들과 함께 볼 수는 없었고 친구들도 모두 비무를 대비하느라 바빴기에 홀로 재학생들을 위해 준비된 자리에서 비무를 지켜보았다.
주정아는 본선 1차전에서 숭무영재고의 학생을 상대로 변수없이 승리를 거뒀다.
그 뜻을 깨달아가는 연류창법은 외공을 중심으로 하여 파괴력을 앞세웠던 숭무영재고의 학생과 상극이었기에 상대는 더욱 대진운이 나빴다.
그리고 두 번의 경기가 더 진행되고 다음 비무를 치를 학생이 올라오자 함성 소리가 유독 컸다.
와아아아아아-!
"비봉이다!"
이번 비무를 치를 학생 중 한 명이 다름 아닌 후기지수 '비봉(秘鳳)', 소담이었기 때문이다.
소림 속가 제자인 우정한을 이기는 파란을 일으켰으며 그 파란만큼이나 아름다운 외모로 주목 받은, 그러나 그런 주목에도 불구하고 신상이 알려진 것이 없는 무림출도의 로망을 보여준 그녀는 그만큼 커다란 관심을 받고 있었다.
예선은 당연하게도 전승으로 올라왔는데 여기에 단 한 번도 상대의 공격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부분까지 더해져 과연 본선에서도 그 기록을 이어갈 수 있을지도 큰 화젯거리였다.
상대는 숭무고 재학생으로, 소담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겠지만 상대 입장에서는 극악의 대진운이었다.
기껏 본선에 올라왔더니 128강부터 그냥 숭무고 학생도 아니고 비봉 서소담을 만나 버렸으니 말이다.
"시작!"
때문에 잔뜩 굳어 버린 얼굴의 그와 소담의 비무가 시작되었고 도진은 그것을 신안으로 집중하여 지켜보았다.
…그리고 도진의 기분은 낮게 가라앉기 시작한 것이었다.
부웅!
기다란 봉을 무기로 사용하여 거리의 이점을 가지고 선공권을 쥔 남학생의 공격은 일절 소담에게 닿지 못했다.
마치 바람을 상대로 봉을 휘두르는 것처럼 도저히 닿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게 특유의 보법으로 공격을 피하며 빈틈을 노리는 소담의 검에 남학생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보였으며 실제로도 얼마 가지 않아 그런 결과로 이어졌다.
"서소담 승!"
와아아아아아-!!
당연한, 그러나 그러면서도 압도적인 결과에 사람들은 열광했으나 도진은 다른 것을 보았고 얼굴이 굳어 있었다.
-저 아이, 답보(踏步)하고 있구나.
스승의 말대로였다.
소담은 답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천재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소담은 처음 만났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육체는 물론이요 깨달음까지 말이다.
하지만 그랬던 성장이, 요 근래 들어 제자리걸음이라는 걸 도진은 그동안 보았던 예선과 오늘의 본선까지로 확신할 수 있었다.
육체는 무언가에 쫓기듯 필사적인 수련으로 인해 계속해서 강해지고 있다.
그러나 고등 무학(武學)을 익히는 이상, 특히나 진무를 익히는 만큼 그와 함께 성장해야 할 정신적인 부분이 성장하지 못하고 있음을 도진은 신안으로 꿰뚫어 보았다.
진무란 이치를 담은 무학이기에 이치를 궁구하기 위한 정신적인 성장이 없다면 몸만 큰 아이와 같은 꼴이 되고 만다.
도진은 그렇게 정신적인 성장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그것이 전생에서 소담이 죽음을 택했던 모종의 일과 연관되어 있을 거라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위지혁이 물었다.
-참견할 테냐?
도진은 망설임없이 예, 라고 대답했다.
-친구니까요.
무엇을 계기로 친해졌는지 아리송한 부분이 있다.
얼렁뚱땅 인사를 나눴고 그리하여 친구가 된 뒤로 어느새 1년이 되어 간다.
하지만 그런 계기 같은 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소담이 도진에게 있어 전생에서 동경했으며 현생에서 처음으로 친구가 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짧지만 많은 시간을 친구가 되어 함께 보냈고 인연을 쌓았다.
그런 친구에게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있다면 '참견'할 수밖에 없다고, 도진은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얼마 전 했던 결심을 되새기며 도진은 수련에 매진했다.
그리고 주정아와 소담의 비무가 있었던 바로 다음날.
도진은 동생들의 기대에 찬 시선을 마주했으니 바로 오늘이 도진의 1차전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무슨 인연인지, 1차전의 상대는 이미 한 번 겨뤄본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여기서 이렇게 다시 마주하게 되는구나."
"그러게. 전생에 연이라도 있었나 봐."
"징그러우니까 그런 소린 하지 마라."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해 도진이 낄낄 웃도록 만든 건 강정민, 다름 아닌 입학 시험의 비무 대회에서 도진이 처음으로 상대했던 동기였다.
도진을 인정하지 않았던, 그러나 비무를 통하여 도진을 인정했던 바로 그 동기가 입학 시험 때의 비무에 이어 랭킹전에서도 처음으로 도진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니가 밤의 왕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애도 아니고."
머쓱한 얼굴로 중얼거리지만 부정하진 않는다. 강정민 특유의 자부심이다.
실제로 강정민은 진무 소유자이자 특유의 카리스마로 야간반에서 손꼽히는 강자였다.
진무를 보유한 무가의 후계자로서 해야 할 일이 많았던 강정민은 야간반을 다니고 있었고 그러면서 함께 주목받던 동기와 친해졌으니 놀랍게도 소림 속가 제자 우정한이었다.
도진으로서도 의외의 조합이었으며 이런 것 때문에 진짜 인연이라는 생각이 드는 도진이었다.
'그러고보면 진무 소유자 중 한 명이 정한이랑 특히 친했었지.'
다만 전생에서 거기에 대한 관심을 두지 않아 그 진무 소유자가 강정민이라는 건 몰랐던 것이다.
그렇게 친해진 두 사람은 야간반 최강 듀오로 불렸으며 어쩌다 마주치면 인사를 나누면서 안면을 익혔다.
그러니까 어색함 없이 두 사람은 포권지례를 취한 뒤 대치했다.
긴말은 필요치 않았다.
무림인은 무(武)로써 말한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다르지 않다.
터엉!
선공은 권법을 사용하는 강정민이다.
무기를 들어 거리에서도 우위에 있는 도진을 상대로 강정민은 거리를 좁혀야 했고 성공만 한다면 비무를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었다.
수투를 착용했기에 날붙이에 정면으로 주먹을 뻗을 수도 있는 조건이라 거침없이 정권을 쏘아냈다.
도진은 그 정권에 옅게 웃으며 백설을 휘둘렀다.
캉!
맞부딪치기 직전 주먹이 기묘한 궤도를 그리며 휘어 검면을 때린다.
그로 인해 검로가 흔들리며 드러난 틈을 노리고 강정민은 거리를 훅, 좁혔다.
기다렸다는 듯 찰나에 이루어진 폭발적인 가속과 접근. 그리하여 만들어낸 유리한 거리에서 강정민은 흔히 말하는 1인치 펀치, 촌경(寸勁)을 시전했다.
지근거리에서 총알처럼 쏘아지는 펀치는 찰나에, 심지어 직선이 아닌 곡선을 그려 알고도 대처할 수 없을 만큼 그 경로가 난해하다.
그러하기에 진무(眞武).
또한 그러하기에 누구나 구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심지어 구결과 형, 내공의 운용마저 알려주어도 재능을 다 갈아 넣을 정도로 수련하지 않고선 흉내조차 낼 수 없다.
입학 시험 때엔 구사할 수 없었던 그 '곡선'을 그릴 수 있게 된 강정민의 모습에 도진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입학 시험 이후로도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피나는 노력을 했음을, 단 한 번도 자신과 타협하지 않고 재능을 피와 땀으로 연마했음을 그 주먹으로 알 수 있었다.
꽝!
닿기 일보직전의 그 촌경을 도진 또한 천마검공의 이치에 따라 신묘한 검로를 그리는 백설로 받아쳤다.
마찬가지로 촌경의 묘리를 담은 백설의 기운이 강정민의 촌경과 부딪쳐 소총을 쏜 듯한 굉음을 만들어내며 두 사람이 떨어지게 만들었다.
쾅!
하지만 강정민은 그 반발력마저 진각에 담아 자신의 힘으로 삼아 다시 몰아쳤다.
꽝! 꽝! 꽝!
한 발 한 발이 총알을 연상시키는 묵직하면서도 빠른, 그러면서도 곡선을 그려 어디를 노리고 있는지 읽기 난해한 연타다.
간격을 내어 주는 순간 격류에 휩쓸린 듯 난타당하다 패배한다고 알려진 권공.
유수파암권(流水破巖拳).
과연 그 이름에 걸맞는 권법이었으며 그것을 1학년의 나이임에도 능숙하게 구사하는 강정민은 충분히 사람들의 감탄을 한몸에 받을 자격이 있었다.
-편협했던 시야를 넓히고 자신과 타협하지 않으며 재능을 꾸준히 갈고 닦는다. 과연 난놈이로구나.
-예.
유룡 우정한의 옆에는 권룡(拳龍)이 있었다.
도진으로 인해 미래가 바뀌지 않았다면 에스포는 우정한의 심판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심판을 함께 행했던 유룡의 친구가 있었으니 후에 권룡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권룡의 주먹에, 도진은 미소로 경의를 표하며 백설을 들었다.
나는 이만큼이나 성장했다. 그러니 너도 한 번 보여 줘 봐라.
강정민의 그 말에 대답을 해야 했기에.
두웅-!
"……!!"
쏟아지는 유수파암권을 받아내던 도진에게서 쓰나미 같은 기세가 퍼져 나갔다.
강정민은 그 쓰나미를 피하는 대신 가르고 나아가는 걸 택했다.
콱!
쇄암(碎巖).
한 점에 집중된 흐름의 힘으로 거대한 바위 대신 도진의 기세를 가를 각오를 다진 주먹이 도진을 정면에서 노리고 쏘아졌으며.
두웅-!
쓰나미를 닮았던 도진의 기세는 다시 한 번 요동치며 그 주먹을 휩쓸었다.
쿠웅-!
그리고 절벽을 둔중하게 울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비무의 승자가 결정되었다.
"김도진, 승!"
* * * *
도진은 여전히 압도적인 모습으로 1차전의 승리를 결정지었다.
사람들은 그 모습에 열광했으며 앞으로의 대진표를 확인하고선 그 열광보다 더 큰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와, 이거 이번 년도 용봉 비무회랑 진짜 비슷하네?"
"그러게."
결정된 대진표에 따르면, 계속 이겨 나갈 경우 서소담은 우정한과 16강에서 부딪친다.
그리고 그 16강의 승자가 계속해서 이겨 나간다면,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승리할 김도진과 결승에서 맞붙게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