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덜덜덜.
장영준의 몸이 사납게 떨렸다.
11월이라 해도 맹추위가 찾아오지 않아 그리 춥지 않은 날이었다.
설령 맹추위가 찾아왔다 해도 무공을 익힌 장영준이 이렇게까지 몸을 떨 정도의 추위가 한국에 내릴 일은 없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인위적인, 구체적으로는 우서진과 상미가 익힌 한기(寒氣)의 영향이었으나 그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뒤에서 쏘아진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김도진.'
그 이름은 차라리 본능이 뒤늦게 떠올린 것이었다.
이미 절반쯤 목줄에 파고든 듯한 공포스럽기 짝이 없는, 괴물의 어금니나 발톱을 닮은 기세는 장영준을 완전히 옭아맸고 굳이 '잠룡 김도진'이란 이름이 아니더라도 장영준을 제압하기에 충분할 만큼 흉포했다.
덜덜덜덜.
어느새 거짓말처럼 한기가 사라졌지만 장영준의 미친듯한 몸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김도진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자신의 목줄을 부여잡고 있다는 상황 그 자체만으로도 알몸으로 남극에 던져진 듯 오한이 들었다.
그 김도진의 고개가 아주 약간, 모로 기울었다.
"왜 대답을 안 하지?"
그것은 장영준의 귀에 '죽일까'라는 단어로 바뀌어 들렸다.
"네, 네! 네!"
그래서 생존 본능이 공포를 이겨 내고 목소리를 짜냈다.
필사적인 그 대답에 도진이 다시 느릿하게 말했다.
"뭐라고 지껄였냐고, 아까."
"……."
머리가 삐걱인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무엇을 잘못했길래 이리도 공포에 떨어야 할까.
눈동자를 겨우 굴려 일행을 찾았지만 그들은 핼쓱해진 얼굴로 장영준이 전혀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장영준은 그런 '친구'들의 모습에 분노가 치밀었지만 지금은 그것을 분출할 때가 아니었고 겨우 짜낸 답을 입에 담았다.
"죄, 죄송합니다."
"뭐가?"
"그, 그, 죄송합니다."
"하……."
도진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그 표정에 장영준은 더더욱 몸을 떨었고, 도진이 긴 숨을 내쉰 뒤 다시 말했다.
"아저씨."
"네, 네."
"뭐가 죄송한데요?"
연신 눈만 굴리는 그를 보며 도진이 말했다.
"아저씨. 그냥 사과만 하면 일이 다 해결 돼요?"
"아, 아니요."
"그걸 알면서 왜 뭐가 미안하지도 모르면서 죄송한데요?"
"……."
미칠 것 같다.
평소 그의 성격 같았으면 뒤엎어 버렸을 텐데 이 자리서 그랬다간 그의 인생이 뒤엎어질 것이었기에 발작도 하지 못하고 그저 식은땀으로 등이 축축해질 뿐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도진이 결국 답을 말해 주었다.
"아저씨. 형제자매 있어요?"
"아, 네? 네. 있습니다."
"그 형제자매가 남한테 욕먹으면 기분이 더러워요, 안 더러워요?"
"더, 더러울 것 같습니다."
사실 그는 하나 있는 누나와 남보다 못한 사이라 전혀 안 더러울 것 같았지만 여기서 그딴 식으로 대답하면 한 대 맞을 것 같아서 그렇게 대답했다.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그걸 알면서 왜 내 동생들한테 그딴 식으로 말했어? 기분 더러워서 칼 날릴 뻔 했잖아요."
움찔!
그는 히익, 하고선 몸을 떨었다. 실제로 움직이진 않았으나 잔뜩 겁을 집어 먹은 그는 도진의 말만으로도 그 유명한 백설이 날아올 것만 같은 감각에 몸을 떤 것이었다.
그는 나름 배경도 있고 무공 실력도 나쁘지 않았으나 당연히 태양권가나 관현 그룹, 군홍무가엔 댈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그런 배경을 둔 후기지수들도 나락으로 보내 버린 도진이 칼을 날릴 뻔 했다고 하니 겁을 집어먹지 않을 수 없었다.
"자, 그럼 이제 뭘 잘못했는지 알았으니 뭘 해야 할지도 아시겠죠?"
"예, 예. 죄송합니다."
"네. 저는 사과 받았고 이제 더 중요한 저쪽에도 하셔야죠?"
"예.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사과 받아 줄 거야?"
도진의 시선이 장영준이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는 대상인 유진이와 호진이에게로 향했다.
반짝이는 눈으로 오빠, 형을 지켜보던 유진이와 호진이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 다행이네요. 사과 받아줘서."
"예, 예."
"그럼 이제 서진이랑 상미에 관해서도 이야길 해 봐야겠네요. 누가 잘못했는지 따져봐야죠."
장영준은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사과하겠습니다!"
그러고선 적극적으로 잘못했습니다를 반복하며 상미와 우서진에게도 사과했다.
우서진과 상미는 탐탁지 않은 기색이었으나 그 사과를 받기로 했다.
좋은 날 좋은 자리에서 이런 불쾌한 일을 크게 벌리며 길게 끄는 건 시간 낭비였으니까.
하물며 주변의 시선이 모여 있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들만으로도 시선을 모으기에 충분했는데 무려 김도진이 나타나서 양아치를 조지고 있으니 아마 축제 기간 내내 인터넷에서 장영준은 가루가 되도록 조롱을 당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조롱을 당하는 장영준은, 말이 친구지 똘마니처럼 함께 하던 놈들과 틀림없이 '뒤풀이'를 할 것이었고.
"우리에게의 무례도 사과하셔야죠?"
"예! 잘못했습니다!"
분명히 짚고 넘어가는 릴리와 윌리엄에게까지 허리를 숙여가며 사과를 끝내고서야 장영준은 일행과 함께 부리나케 현장에서 도망갈 수 있었다.
그리고 도진은 우서진이 주문했던 약선 치킨 외에 몇 가지 먹거리를 사서 한적한 공원에서 동생들과 함께 점심을 먹게 되었다.
도진이 웃으며 우서진과 상미에게 사과했다.
"미안. 너희가 처리해야 할 일인데 내가 나서 버렸네."
"으으응, 아니에요. 오히려 오빠가 저 대신 혼내줘서 고마웠던 걸요."
"맞아요, 형. 동생이 괴롭힘 당하면 형이 나서 줘야죠."
"아하하. 그거 참 어깨가 무거워지는 소리네."
도진은 어깨를 으쓱였고 상미가 말했다.
"사실 그 사람, 제가 실습하는 미용실에 자꾸 찾아와서 추근덕거리던 사람이었거든요."
과거의 말버릇대로 하면 '질척거리는 새끼'였다.
근처 무림고에 다니던 장용준은 본래 비싼 미용실에 다녔으나 우연히 실습을 위해 출근하던 상미를 발견한 뒤 혀를 날름이며 어울리지도 않게 '구멍가게'에 들락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젠틀한 척했고 가게의 매상도 엄청나게 올려주어 친절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으나 상미는 한천검공을 무서운 속도로 익혀 나가는 천재답게 그 본성을 바로 간파했고 철저하게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장영준은 다 알면서 모르는 척 능글거리는 태도로 질척거렸고 상미는 가게에 피해가 갈까봐, 특히 미용 기술을 알려주는 직원 언니에게 피해가 갈까봐 참아온 것이었다.
그것이 오늘 사건으로 이어졌다는 말에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혼내줄 걸 그랬네."
오늘 크게 혼이 났으니 다시 축제에서 마주쳐도 감히 시비를 걸지는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 모자란 성격과 지능으로 볼 때 상미에게는 또 찾아가 질척거릴 확률이 얼마든지 있었다.
상미는 도진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녜요. 그건 제가 해결해야 할 일이니까요. 제가 잘 해 볼게요."
상미는 자신이 오빠의 도움이 되기를 바랐지 오빠의 도움만을 받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의지가 느껴지는 상미의 눈동자에 도진은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똘똘한 상미니까 걱정할 필요 없겠네."
아이 취급하는 말이었음에도 상미는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네, 하고 말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점심 식사가 거의 끝나갈 즈음 도진이 물었다.
"낮에는 뭐 할 거야?"
"음, 저희는 VR 체험관에 한 번 더 가보려구요."
"그래?"
"네. 아이들도 좋아하고 저희도 관심이 좀 있거든요. 어차피 축제는 최소 2주 넘게 진행되니까 오늘 하루 정도는 VR 체험관에 올인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요."
"응, 그렇지."
하루이틀이 아니라 2주 이상 진행되는 축제다.
하고 싶은 것을 얼마든지, 실컷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형은요?"
축제 기간이라 해도 오전 수업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여러가지 활동을 이유로 빠지는 학생이 많다지만 공식적으론 변경된 스케쥴에 따라 수업이 진행되는 것이다.
때문에 도진은 오전 수업을 다 듣고서야 찾아오기로 한 동생들을 만나기 위해 나온 것이었고.
"나는 뭐 특별히 할 게 없긴 한데……."
평범한 학생들이라면 이 시기에 조금이라도 더 등수를 높이기 위해, 나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수련에 매진할 테지만 도진은 약간 달랐다.
평소 이상으로 연신극기공에 투자하였고 심상세계에서도 특훈을 진행하고 있기에 역시나 평소 이상으로 몸과 정신을 '쉬어주는' 것 또한 필요했기에 남들이 보기엔 팔자 좋게 노는 것처럼 비칠 정도로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시간이 남는 도진은 동생들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너희랑 놀기로 할까?"
"진짜?!"
호진이가 기뻐 목소리를 높이자 도진이 더 크게 웃었다.
"그래. 너희만 좋으면?"
"응! 같이 놀자!"
"저도 좋아요!"
호진이와 릴리의 발갛게 된 볼을 보는 순간 도진의 오후 스케쥴은 결정된 것이었다.
"오케이. 그럼 같이 VR 체험관 가자."
* * * *
다시 찾아간 VR 체험관의 게임 부스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으나 다행히 한자릿수의 대기 번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대기 번호를 나눠주던 선녀옷을 닮은 옷을 입고 있던 너튜버 소녀는 도진을 보고선 앗, 하고 놀란 얼굴이 되었다.
"아, 안녕하세요! 팬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무언가 대사가 바뀐 듯한 상황이다.
그리고 도진은 그런 감정을 더 강하게 느꼈으니 '미래의 그녀'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은지의 단짝이었던 사람이네요.
-그렇구나.
이 소녀의 이름은 유애라로, 톱스타가 되는 이은지의 단짝이자 마찬가지로 '대기업 너튜버'로 성장하여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인플루언서가 되는 사람이었다.
작은 체구에 동안이지만 사실 도진보다 두 살 연상의, 그러니까 열아홉 살이다.
'지금은 아직 생계형 너튜버였지?'
어려운 집안에서 자라 꿈이었던 연예인을 포기했었던 그녀는 그 상실감을 메꾸기 위해 취미로 시작한 너튜버가 생각보다 잘 돼 그쪽으로 진로를 정했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 이것저것 하다 이렇게 홍보 모델 겸 코스튬 플레이어로서도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녀의 이력이 알려지면서 슬슬 채널이 성장하던 시기였던 것으로 도진은 기억하고 있었다.
사족이지만 이렇게 상세히 기억하고 있는 건 레드슈와 얽히면서 이 시기의 위키를 한 번 정독했었기 때문이다.
위키의 특성상 관련된 다른 문서도 뒤적이게 마련이고 그 범주 안에 유애라도 있었던 것이다.
"저, 저기 사인해 주실 수 있나요?"
"어, 사인이요?"
그렇게 잠시 그녀에 대해 생각하고 있자니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던 부탁을 그녀가 해 왔다.
그녀는 귀여운 얼굴로 꾸물꾸물하면서도 펜과 종이를 건넸다.
"네! 그, 그리고 이 사인 제 채널에서 자랑해도 될까요? 제가 너튜브를 하거든요……."
…꾸물꾸물하면서도 부탁할 건 다 부탁하는, 이런 모습은 그녀 특유의 행동인데 뻔뻔하게 느껴지기보다 오히려 부탁을 들어주고픈 생각이 들게 하는 게 정말로 특별한 부분이다.
"네, 괜찮습니다."
도진은 피식 웃으면서 펜과 종이를 받아들었다.
미래의 톱스타와 이런 식으로 친분을 쌓아둬서 나쁠 건 하나도 없었다.
"감사합니다!"
굳이 그런 계산적인 생각이 아니더라도 유애라는 도진 또한 호감이 가던 너튜버였으니 이 정도 부탁쯤이야 얼마든지 들어줄 의향이 있었다.
-호오, 천마와 사신의 후계자의 사인이라니. 저 처자도 꽤 운이 좋구나.
-아하하.
펜을 든 도진은 잠시 고민하다 펜을 움직였다.
사인.
주로 쓰던 게 있었는데 거기에 스승들에게 배운 '이치'를 살짝 담아 보았다.
그리하여 '道', 종이에 펜으로 그어진 '도'라는 글자는 현묘한 궤적을 그린 사인이 되었다.
"와……. 사인도 진짜 멋있으시네요. 가보로 간직할게요!"
"아뇨, 그건 좀."
"제가 따로 드릴 수 있는 건 없구, 나중에 제 피규어 나오면 하나 보내드릴게요!"
"네, 기대할게요. 감사합니다."
분위기를 즐겁게 만드는 그녀와의 이야기가 끝나고 도진은 동생들과 함께 차례를 기다렸다.
"오늘 비무는 소담 선배 차례죠?"
우서진의 물음에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소담이랑 정아가 오늘이었지. 근데 너, 벌써부터 선배라고 하는구나?"
조금은 짓궂은 도진의 말에 우서진은 오히려 당당한 얼굴이었다.
"네. 저랑 상미는 입학 확정이니까요. 지금부터 그런 호칭에 익숙해져야죠."
"하하. 그렇네."
우서진의 말대로였기에 도진은 기분 좋게 웃었다.
우서진, 그리고 상미가 후배가 되는 건 도진으로서도 바라던 일이었으니까.
이미 확정된 그 미래는 그저 즐겁게 기다리기만 하면 찾아올 것이었다.
"소담 선배도 정아 선배도 당연히 이길 테고 걱정할 것 없겠네요."
이어진 우서진의 말에도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를 비하하는 건 아니지만 소담도 주정아도 1차전에서 떨어지기엔 그 수준이 너무 높았으니까.
"……."
하지만, 저녁에 진행된 소담의 비무를 지켜본 도진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허어…….
위지혁 또한 안타까워했다.
-저 아이, 답보(踏步)하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