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3주간의 랭킹전 예선이 끝나고 드디어 본선과 함께 숭무고의 축제가 개최되었다.
이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유진이와 호진이는 보물처럼 아끼던, 도진이 사 준 롱패딩을 꺼내며 새벽부터 일어나 부산을 떨었고 서정원은 그런 남매의 모습에 웃으며 아침밥을 차려 주었다.
"언니 오빠 잘 따라다녀야 해?"
"네!"
서정원은 신신당부하며 아이들의 손을 붙잡고 대문 밖으로 나갔고 우서진과 마주했다.
"그럼 잘 부탁할게, 서진아."
"네! 맡겨두세요, 이모님."
아주머니가 아닌 이모님.
그야말로 '이웃사촌'을 상징하는 그 칭호에 서정원은 미소지으며 우서진에게 아이들을 부탁했다.
아쉽게도 평일이라 스케쥴을 맞추지 못한 그녀와 남편은 아이들을 데리고 축제에 갈 수 없었다.
대신 고맙게도 우서진이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가 주기로 했고 똑 부러지는 상미까지 함께 한다니 걱정없이 맡길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응, 어서오렴."
여기에 웨일스 후작 부부의 아이들도 함께 했으니 무려 여섯 명이나 되는 대인원이 되었다.
우서진은 상미와 아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SUV까지 한 대 준비했다.
아직 중학생인 우서진이나 상미는 운전을 할 수 없었으니 운전기사가 함께 했는데 호위를 겸한 사람이어서 더욱 안심이 된다.
"잘 다녀와."
"네! 다녀올게요."
우서진과 아이들을 태운 SUV는 숭무동을 빠져 나가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상미까지 픽업한 뒤 숭무고로 향했다.
"확인되었습니다."
축제 기간 중 설치된 게이트에서 스마트폰을 통해 도진에게 부여받은 프리 패스 권한을 확인 받고 학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럼 저는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운전을 해 주었던 무뚝뚝하고도 단단한 인상의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차에서 대기했다.
사실 말만 이렇게 하고 은밀히 움직이며 우서진을 그늘에서 호위하는 게 남자의 임무였고 우서진도 그것을 알았지만 티내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그리하여 겉으로는 우서진과 상미, 그리고 아이들만의 일행이 숭무고 랭킹전 축제를 만끽하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테마파크 못지 않다는 평가의 숭무고 축제는 과연 그 입구부터 사람을 들뜨게 만드는 분위기로 달아올라 있어 아이들의 볼 또한 금방 발갛게 되었다.
상미가 웃으며 아이들에게 물었다.
"어디부터 갈까?"
"VR 체험관!"
질문이 나오기도 전부터 답이 정해져 있던 물음이었다.
사실 오늘 아이들이 새벽부터 일어나 부산을 떨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VR 체험관이란 말 그대로 요즘 뜨고 있는 VR 기기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었다.
숭무고 축제는 단순히 비무나 먹거리만을 즐기는 게 아니라 무공과 관련된 업계 전반의 부스 또한 들어서는데 이중에서 특히 인기를 끄는 것이 바로 VR 업체, 그것도 게임 관련 부스였다.
VR은 무공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 무공 고수와 같은 체험을 할 수 있게 해주며 이를 응용한 게임을 체험할 수 있는 부스는 아이들부터 심지어 어른까지도 대번에 홀려 버리는 마력이라고까지 할 만한 매력이 있었다.
"이거 네 명까지도 같이 할 수 있대!"
그리고 그런 게임을, 최대 4인 플레이가 가능한 게임을 발견한 유진이의 말에 호진이와 릴리, 윌리엄은 이미 2주도 전부터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정말로 특별한 곳으로 취급되는 '오락실'이 바로 얼마 전까지도 살던 문월동 달동네엔 존재하고 있었다.
불량 학생들이 자주 출몰하는 곳이기도 했으나 한 판에 백 원, 그것도 길게 할 수 있는 게임을 잡으면 그 백 원으로 한 시간도 때울 수 있으며 구경만으로도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오락실은 아이들의 놀이터였고 그것은 유진이와 호진이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 유진이와 호진이의 경험을 들은 릴리와 윌리엄은 호기심을 가지고 상미와 함께 실제로 문월동의 오락실을 찾아가기도 했었으니 그것을 VR로 같이 즐길 수 있다는 말에 덩달아 들떴던 것이고.
그런 배경으로 일행은 가장 처음 VR 체험관으로 향하게 되었다.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곳과 달리 VR 체험관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그나마 말 그대로 이른 시간이라 덜한 편이었고 대기 번호 3번을 받을 수 있었지 피크 타임이었다면 그 대기 번호는 가뿐히 두자릿수로 넘어가 있었을 것이다.
엄청나게 크게 차려진 부스였고 체험 기기만 서른 대가 준비되어 있음에도 이 정도였으니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무림열전'은 인기 무림인 너튜버 분들과 계약을 체결하여 게임 내에서 실제로 그분들의 도움을 받으며 스토리를 진행하는 SRPG 계열의 게임입니다."
그리고 그 VR 게임 체험 부스의 소개와 안내, 진행을 맡고 있는 눈에 띄는 외모와 복장의 여성이 있었으니 나름 5만 명의 너튜브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는 무림고등학생 너튜버였다.
"와, 그럼 누나도 나와요?"
대기 중에 열심히 설명을 듣고 있던 호진이가 똘망똘망한 눈동자로 물으니 그녀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엄. 누나는 처음부터 동료로 함께 하니까 얼마든지 볼 수 있단다?"
그녀가 지금 입고 있는 '선녀옷'을 닮은 옷은 다름 아닌 게임 내에서의 복장이었다.
"와!"
호진이가 그녀의 대답에 숨김없이 감탄했다.
그 모습에 우서진과 상미가 동시에 웃었다.
숨김없이, 느낀 그대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미소를 짓게 만드는 것이었다.
여러 일을 겪다보면 감정이란 것도 굳은살이 생겨 잘 움직이지 않게 되고 겉으로 드러내기도 힘들게 된다.
그렇기에 그런 굳은살이 생기지 않은, 있는 그대로 감정을 표현하는 호진이의 모습은 굳은살이 깊게 박혀 버린 두 사람에게 특별했다.
그리고 의외로 그런 감정을 똑같이 느끼고 있는 아이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릴리였다.
동경하게 된 도진의 동생들은 같은 또래임에도 그리도 순수했으니 여린 친동생과 마찬가지로 그녀가 지켜줘야 한다고 다짐하게 된 것이다.
도진이 그 속내를 알았다면 귀엽다고 미소지을 감정이었다.
그런 릴리와 윌리엄, 그리고 유진이와 호진이가 곧 빈 자리에 나란히 앉아 게임을 즐기게 되었고 우서진과 상미는 아이들의 플레이를 바깥에서 모니터로 지켜보게 되었다.
"아.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
"으그극."
그저 웃으며 지켜보는 상미와 달리 우서진은 연신 중얼거리며 손을 바르르 떨었다.
삼음지체의 저주에 시달렸던 우서진은 방 안에서 게임에 몰두하던 시절이 길었고 그러면서 타인과의 상호 작용이 부족했던 영향으로 이렇게 순수하게 아이들의 플레이를 감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상미가 그런 우서진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주 게임에 대신 들어갈 기세네?"
우서진은 자신의 모습이 어떻다는 걸 인식하고 있었기에 멋쩍게 웃었다.
"내가 좀 그런 성격이거든. 승부욕도 좀 있고."
"응, 그렇지."
"그리고 사실 형도 좀 그런 면이 있다?"
"맞아. 그렇더라."
두 사람은 얼마 전 도진과 함께 피시방에서 게임을 즐겼었고 의외로 도진이 게임에서의 승부욕 같은 게 대단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덤으로 그 승부욕만큼의 실력도 가지고 있었고.
무림인이라면 당연히 돋보이는 피지컬보다 오히려 '뇌지컬'이 더 돋보이는 모습이었다.
두 사람이 알기로 도진은 컴퓨터 게임이나 온라인 게임에 심취한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말이야……."
"응?"
"나중에 형이랑 같이 이 게임 해볼까?"
"어?"
"어쩌면 형이 무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렇네."
우서진의 그 말은 상미에게 너무나도 매력적으로 들렸고 두 사람은 이심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여유롭고 구름 속에 숨은 용처럼 전체를 보여준 적이 없는 도진이었지만 그날 피시방에서만큼은 적극적으로, 크게 감정을 드러냈기에 두 사람에게는 특별하기 그지없는 시간이었었다.
그렇게 모종의 합의를 보는 계기가 되었던 VR 게임의 체험이 끝나고 일행은 점심을 먹기 위해 포장마차 거리로 향했다.
"약선 치킨 먹어볼까?"
"응!"
"네!"
우서진의 말에 아이들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숭무고 포장마차의 명물인 약선 치킨에 대해선 우서진과 상미도 들은 바가 있었고 릴리와 윌리엄 또한 인터넷에서도 여러 번 추천글을 보았기에 이미 먹어본 적이 있던 유진이와 호진이까지 만장일치로 메뉴가 결정되었다.
"내가 사올 테니까 자리 맡고 있어."
"응."
우서진이 벌써부터 늘어선 줄의 끝에 서고 상미는 아이들과 함께 광장 중앙에 마련된 테이블 중 하나에 자리를 잡았을 때였다.
"오, 이게 누구야. 상미잖아?"
"……."
상미에게는 결코 달갑지 않은 감정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들렸고 연신 밝았던 상미의 표정이 미미하게 굳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상미의 눈에, 그 결코 달갑지 않은 목소리의 인물의 얼굴이 들어왔다.
명품으로 도배를 한 훤칠한 키의 남자다.
척 봐도 나 돈 많소하고 광고를 하는 그는 실제로 부잣집 아들이자 무림고의 학생이었다.
삼선 의원의 장남인 그는 기부 입학 등의 방식으로 숭무영재고에 입학할 수도 있었으나 방탕한 생활로 인해 흠결이 생겨 적당한 무림고에 가야 했던, 상미보다 두 살 위의 무림고 2학년생이다.
그리고 상미가 실습을 다니고 있는 미용실의 '단골'이기도 했다.
"뭐야. 바깥에서 봤다고 인사도 안 해주는 거야?"
"…안녕하세요."
껄렁한 태도의 일행과 함께 다가온 남자의 말에 상미는 마지못해 인사를 건넸다.
"응응. 그래. 여기서 만나니까 정말 반갑네."
"……."
상미는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상미와 아이들이 앉은 테이블의 의자를 하나 꺼내 앉으려 했다.
"일행 있으니까 다른 데 앉으세요."
상미가 제지했으나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에이. 일행 오면 일어나면 되잖아. 잠시 이야기나 하자."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잡으니 유진이와 호진이, 윌리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릴리의 눈동자는 차가워졌다.
어리다 해도 릴리는 명문 후작가의 장녀다.
엄격한 교육을 받았고 무공 또한 익혔으니 이런 무례한 태도를 용납할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릴리보다 먼저 나선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주문을 마치고 돌아온 우서진이었다.
"누구시죠?"
"응? 어라. 안녕하세요? 상미 지인인데요. 엄청 미인이시네요."
"……."
우서진의 얼굴 역시 바로 굳었다.
그는 스스로의 모습을 싫어하거나 비하하지 않았으며 외모 때문에 타인이 여자로 착각하는 것도 부드럽게 넘길 수 있었으나 이런 식의 취급까지 웃어 넘길 정도로 속이 없지 않았다.
우서진의 시선이 상미에게로 향했다.
'…….'
말은 오고가지 않았으나 눈동자를 통해 이들이 불청객임을 바로 알아보았다.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여긴 우리가 밥 먹을 자리거든요. 다른 데 가실래요?"
우서진의 냉대에도 그, 장영준은 유들유들한 얼굴로 비죽 웃었다.
"에이, 너무 그러지 마세요. 저 상미네 미용실 단골이라서 꽤 친하거든요. 기왕 이렇게 만났는데 밥 같이 먹으면 좋잖아요. 그렇지, 상미야? 우리 꽤 사이 좋잖아."
그래, 단골이었다. 그녀를 목적으로 찾아오는 역겨운 인간.
그래도 단골이었고 그녀에게 친절히 기술을 가르쳐주는 언니가 일하는 미용실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이런 구역질나는, 가장 싫어하는 부류의 인간에게도 친절히 대하던 상미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게에서의 일이었다.
그리고 도진의 동생들을 불편하게 하는 상황에서까지 친절하게 대하고 싶지도 않았다.
"손님과 직원 이외의 관계로 우리 사이엔 아무것도 없잖아요."
"……뭐?"
"킬킬킬. 야. 아무 사이 아니라잖아."
"아무 사이 아닌데 왜 앉아 있냐?"
"……."
실실 웃으며 지켜보던 일행의 놀림에 장영준의 얼굴이 단번에 굳었다.
체면을 구겼다.
그렇게 굳은 얼굴은 꽤 험악해서 윌리엄과 호진이가 눈치를 보았다.
그 모습에 유진이가 화난 얼굴로 말했다.
"언니가 싫어하잖아요! 빨리 가세요."
"뭐야?"
으르렁거리듯 유진이를 쏘아본다. 그 시선에 상미의 얼굴에도 서리가 내렸다.
"뭐하는 거예요, 지금."
주변의 온도가 서늘해지는 것도 바로 느끼지 못하고 장영준은 지껄였다.
"뭐하냐고? 애새끼들 앞에서……."
그러나 그렇게 둔하던, 사납게 지껄이던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죽어 버렸다.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야."
마치 사나운 발톱이 파고드는 것처럼 무시무시한 기세가 그의 목줄을 조였기 때문이다.
"뭐라고 지껄였냐,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