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무공은 '수 싸움'이다.
서로 마주한 상황에서 우측의 인물이 주먹을 뻗어 상대를 공격하려 한다.
좌측의 인물이 그걸 알고 있다면 회피를 하든 맞받아치든 수를 써야 할 것이다.
여기서 다시 우측의 인물이 좌측의 인물이 취할 행동을 예상하고 있다면 그 한 수를 앞서는 또 다른 한 수를 준비해야 한다.
무공은 이런 '수'가 고도화된 재주이며 이 재주를 겨루기에 수 싸움이 되며 흔히 바둑에 비유된다.
그리고 이 '수'의 집합이 무공이기에, 현대에서는 알려진 무공에 대한 '묘수풀이'가 널리 이루어지고 있다.
고도화된 수, 초식의 분석은 그 자체만으로 경지의 상승에 도움이 되며 이를 통하여 해당 무공이나 초식에 대한 약점, 손쉬운 파훼법을 도출해낼 수 있다.
어떤 무공은 오히려 전수자에게 적극적으로 그런 묘수풀이를 권장하여 부족한 부분을 찾아내게 한 뒤 그것을 보완하는 식으로 무공을 발전시켜 나가기도 한다.
이런 방식은 국가 단위에서 특히 널리 쓰이고 있는데, 이런 식의 분석, 해체, 보완의 형태로 무공을 발전시키고 그 성과의 일정 부분을 국민들에게 보급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이러한 만큼, 고유 무공을 보유한 무인들은 묘수풀이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현대 사회는 옛날과 달리 너무나 쉽게 녹화가 가능한 세상이고 그렇게 녹화된 영상으로 인해 드러낸 무공이 분석당할 수 있다.
이렇게 무공이 분석당해 버린 무인은 근간이 되는 기술이나 비법을 도난당한 회사와 마찬가지 신세가 되어 버리니 무협지에서 흔히 말하는, '수련을 훔쳐본 자는 목숨을 잃어도 할 말이 없다'는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시대에 뒤떨어져 있던 신비 가문 하나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며 무공을 경계없이 구사하다 완벽하게 분석당해 몰락한 사례가 있었기에 그 누구도 이런 무림인들의 태도를 과민반응이라 할 수 없었다.
허나 무림인이란 무공을 행사하는 사람이며 행사하지 않고선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니 그와 별개로 묘수풀이에 대한 대비를 해야만 했고 현대의 무공은 그런 묘수풀이를 막기 위한 형태로도 발전을 했다.
보아도 알 수 없도록 중요한 부분을 의복으로 가리는 건 흔한 수법이다.
혹은 보아서 읽은 게 함정이 되도록 몇 겹이나 되는 함정을 깔기도 했으며 아예 대놓고 다지선다, 선택을 강요하여 틀리면 큰 손해를 보는 초식을 만들기도 했다.
고급 무공이 되면 정말로 보아도 알 수 없을 만큼 그 기술의 수준이 높다.
여기에 움직임, 그러니까 형(形)을 알아도 내공의 운용법을 모르면 의미가 없는 초식이 대부분이다.
무공이 무공이 되는 건 내공의 존재 때문이었으니 이 내공의 운용법을 모르고서는 움직임을 따라해도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수학 시험에서 공식을 모르면 결코 시간 내에 풀 수 없는 수학 문제에 비유할 수 있다.
군홍청권은 바로 그런 수준이 높은 고유 무공이었고 무진혁이 구사하는 초식은 공식을 모르면 풀 수 없는 수학 문제 같은 것이었다.
…바로 그랬기에, 군홍무가의 이인자이자 무림에서도 이름 높은 무준석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된다.'
처음에는 우연일 수 있었다.
권사의 손목을 노리는 건 기본이자 흔한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손목을 노린 것이 공교롭게도 일지홍의 내공 운용에서 약점이 되는 부분일 수는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뒤이어 그렇게 손목을 건드린 검이 노렸다는 듯 편훼홍이 다 시전되기도 전에 완벽하게 차단하는 검로를 그리고 또 이어서 하체를 노리는 다리마저 기다렸다는 듯 검로를 그리는 순간에는 등줄기가 서늘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모든 검로 역시, 마치 군홍청권을 '알고 있다는 듯' 파훼하는 최적의 검로를 그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군홍청권을 파훼한다고?
군홍청권쯤 되면 수백 년이 넘도록 풀리지 않는 수학 난제에 버금갈 만큼, 공식을 모르고서는 결코 묘수풀이를 할 수 없을 만큼 발전한 무공이란 말이다.
한데 군홍청권에 관해 알지 못하는 문외한이 분명할 놈이, 제아무리 또래에 적수가 없는 놈이라 해도 그 자리에서 난제에 대한 '공식을 만들어내는' 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
무준석은 그렇게 현실을 부정했지만, 눈에 때려박히는 비무는 그런 그의 부정을 다시 부정하는 듯하다.
저도 모르게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 군홍청권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광경이 '군홍청권을 파훼하는 비무'라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무진혁의 경지가 부족하여 김도진에게 너무나 쉽게 초식들이 막히는 장면으로만 인식하고 있다.
이렇게만 비무가 끝나면 다행일 텐데, 무준석은 연신 압도당하던 무진혁이 무언가라도 보여주겠다는 의지로 비기를 꺼내려 하자 얼굴이 새하얘져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외치고 말았다.
"머, 멈춰!"
기존의 초식은 괜찮다. 그러나 비기는, 그것도 아직 미숙한 상태로 펼치는 비기는 이 자리의 식견 있는 자들에게 빈틈을 보여주게 되고 심지어 도진에 의해 '파훼'당하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때문에 무림의 명숙이라 할 수 있는 무준석이 상황도 잊고 벌떡 일어나 내공을 담아 외친 것이었으나…….
"……?"
"뭐, 뭐야?"
주변 사람들은 당연히 그런 사정을 알 리가 없으니 웅성거림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왜 저러시지?"
"김도진이 무슨 살수(殺手)를 쓰려고 한 것도 아니었는데?"
조카가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다고는 하나 이건 어디까지나 비무이지 학교 폭력의 현장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멈춰!'라고 외치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분위기가 퍼져 나가자 무준석 또한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고 아차 싶었다.
진행되던 비무가 멈춰 버렸고 도진과 무진혁의 시선 또한 무준석을 향해 있었다.
내가 조카의 비무를 망치고 말았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비기가 유출될지도 몰랐을 상황을 막았으니 차라리 다행이다.
아니, 어쩌면 내가 과민반응을 한 것이었나?
아니다. 그건 분명히 '파훼법' 같았는데?
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괴물인 유지은조차 군홍청권 같은 무공의 파훼는 불가능할 것인데 정말로 그저 실력차와 우연이 낳은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조카가 구사한 건 어디까지나 군홍청권의 기본이었으니 실력차가 많이 난다면 이런 식으로 밀릴 수도 있는 일이지 않은가.
정말로 그저 우연히 이런 형태로 비무가 진행됐을 수도 있다.
아니, 아니다. 어쩌면 김도진 저놈이 부정한 일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혹여 문파의 배신자나 모종의 루트로 인해 군홍청권의 비밀이 새어 나갔을 수도 있다. 조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다. 말도 안 되는 망상이자 억측이다. 설령 그렇다 해도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그런 걸 지적한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무준석의 머리는 심상세계를 최대로 가속한 수준으로 온갖 생각이 날뛰었다.
그것은 짧은 순간이었으나 짧다 해도 분명한 침묵이었으며, 사람들은 무준석이 무슨 말을 할지를 기다렸다.
그리고 무준석은 이내 결론을 내리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무언가 착오를 하여 비무를 방해하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말하지 않는, 그러나 분명한 사과.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힘든 대처였지만 사과만큼은 분명했으니 따지고 들기도 애매해졌다.
그리고 이런 애매함에 쐐기를 박은 건 비무 당사자였던 무진혁이었다.
"그대로 진행했다면 분명히 제가 졌을 것입니다. 그러니 패배를 인정하고 내려가도록 하겠습니다."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하며 포권하는 무진혁.
그렇게 고개 숙인 무진혁의 입꼬리는 슬쩍 올라가 있었다.
'됐어! 깔끔하다!'
그야말로 언제 부서질지 모를 살얼음판을 코가 꿰인 소처럼 걷는 듯했는데 이렇게 '명예로운 패배'를 할 기회가 생겼다.
무진혁은 다시 없을 협객처럼 그렇게 포권을 한 뒤 미련없이 비무대를 내려갔고 도진은 그저 속으로 허허허, 웃을 뿐이었다.
-뭐냐. 진 건 저놈인데 어쩐지 네가 진 것 같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왜 저렇게 좋아하지?
전문 용어로 '완전히 쫄아 있던' 건 읽었지만 자존심 강한 양아치인 무진혁이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고 내려가는 순간에 오히려 이긴 것처럼 좋아하는 기색이었으니 도진으로서도 조금 의아한 순간이었다.
장호에게 사람의 기색을 읽는 법을 배운 도진이었지만 아직 그 나이 또래의 복잡한 심사를 완전히 읽지는 못했기에 느낀 사소한 의아함이었다.
또 다른 사소함으로는 아끼는 조카라지만 그 성격에 하자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던 무준석이, 자신으로 인해 패배를 인정해야 했던 조카가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이니 '인격적으로 성장하여서 삼촌을 위해 패배를 인정하고, 그것을 오히려 양분으로 삼을 줄 알 만큼 성장했나?'하고 이틀 정도 착각을 했다는 것 정도다.
그렇게 첫 승을 거둔 도진은 당연하다는 듯 3승을 올렸고 듯 그 뒤로도 단 한 번의 패배없이, 전승으로 본선 진출을 결정지었다.
도진의 친구들 역시 단 한 명도 탈락없이 본선에 올랐다.
관람객들은 초식 하나 보여주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도진의 모습에 감탄하고, 동시에 초식 하나 볼 수 없었던 예선에 아쉬워 했지만 그 아쉬움보다는 기대가 컸다.
"드디어 본선이네요."
"예. 그리고 이제는 잠룡의 실력을 좀 볼 수 있겠죠."
'잠룡 패밀리'는 변수 없이 모두가 본선에 올랐다.
그 말은 즉, 정식 비무에서 잠룡이 비봉은 물론이요 유룡과도 정식으로 붙어야 한다는 소리였으니 말이다.
제아무리 도진이라도 비봉 서소담이나 조용히 수련에 매진하고 있던 유룡 우정한을 상대로도 그런 식으로 승리하진 못할 것이었으니까.
설령, 정말로 설령 그 둘마저 압도한다고 해도 '통합 결승'이 있다.
통합 결승이란 랭킹전의 백미로 1학년 우승자와 2학년 우승자가 맞붙는 특별 비무다.
그리고 예외가 없다면 이번 년도 특별 비무를 치를 두 사람은 확정되어 있었으니.
그 비무는 다름 아닌 잠룡 김도진과 검봉 유지은을 위해 준비된 무대였다.
* * * *
3주간의 예선을 거쳐 1학년 128명, 2학년 128명의 본선 진출자가 확정되었다.
후기지수로 불리는 '용봉(龍鳳)'들은 모두 결승 진출을 확정지었으며 그 안에는 무패를 자랑하던 압도적인 천재 검봉 유지은과 벌써부터 검봉만큼의 유명세를 떨치는 잠룡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올해 숭무고 랭킹전의 관심은 평소 이상으로 뜨거웠다.
그 관심을 반영하듯 축제와 함께 학교가 개방되자마자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포장마차와 노점이 이어지는 거리를 가득 메웠다.
그 안에는 입학식 때도 가게를 냈었던, 하오문도들이 운영하는 약선 치킨도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이런 축제에는 생각 이상으로 특별한 정보가 되는 사람과 사건이 많이 모였으니 하오문을 자처하는 그들로서는 빠질 수 없는 자리였다.
그리고 그렇게 거리를 지켜보던 하오문도들의 눈에,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행이 들어왔다.
수수한 옷차림이지만 새하얀 눈밭에 핀 꽃에서 퍼져 나가는 은은한 향기와 같은 존재감을 발산하는 소녀와, 그런 소녀의 곁에서 부는 봄바람 같은 존재감을 드러내는 '남학생'이 돋보이는 일행이다.
여기에 금갈색 머리카락을 지닌, 예쁜 인형 같은 꼬마 남매와 한국인 남매가 함께 하고 있었으니 그들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시선을 모을 수밖에 없는 조합이었다.
하오문도답게 그들은 이 조합의 면면이 누구인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윤상미에 우서진, 그리고 웨일스 후작 부부의 아이들과 잠룡의 아이들. 충분히 모일 수 있는 조합이군.'
세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윤상미가 잠룡 김도진에게 도움을 받았으며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것까지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여기에 이 그룹의 중심점이 잠룡 김도진이라는 것까지도 말이다.
축제를 즐길 겸 김도진의 비무를 보기 위해 방문했으리라 생각하며 그들 그룹을 주시하던 하오문도들은, 어느 순간 눈을 빛내며 작업하던 손마저 느려졌다.
그들의 눈이, 상미 일행에게 접근하는 일련의 무리를 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