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랭킹전은 눈에 띄는 학생들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참관한 각계의 관계자들 관람 하에 진행되지만 그 관계자들은 랭킹전이 끝나기 전까지 학생과의 접촉이 금지되어 있었다.
여러가지 부정적인 영향을 이유로 들었는데 관계자들은 그 규칙을 철저하게 지켰다.
다른 게 아니다. 그것이 그들에게도 유리하기 때문이다.
랭킹전을 치를수록 학생들의 역량이 더 자세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드러나니 가능한 많은 '정보'를 수집한 뒤에 접촉하는 것이 유리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도진 또한 자신의 비무를 보기 위해 오성의 관계자로서 찾아온 오성아나 명성공방의 대표로 찾아온 우벽진과 우서연, 그리고 우서진과도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바깥에서라면 몰라도 학교 안에서 만나는 건 여러모로 그 규칙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멀리서나마 눈으로 인사를 나누던 도진은 우서진의 반짝이는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피식 웃었다.
'녀석.'
우서진은 중학교에 통학하는 대신 검정고시를 택했다.
어차피 이론 수업이야 얼마든지 과외 등으로 대체할 수 있었고 무공은 가전 무공에 집중하는 게 훨씬 이득이었으니까.
그런 이유로 우서진은 상미에겐 미안한 일이었으나 조금 '반칙'을 썼다.
동경하는 형의 예선까지도 보고 싶어서 명성공방 관계자의 자격으로 이곳에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삼음지체를 치료해준, 우서진의 동경의 대상이 무대 위에 올랐으니 도진이 피식 웃을 정도로 그의 눈동자가 반짝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오랜만이구나.'
도진은 새삼 깨달았다.
이렇게 '비무'를 하게 된 것이 중간고사 이후 처음이라는 것을.
그나마도 중간고사 때의 비무는 시험의 연장 선상에서 조건을 두고 한 비무였으니 공식적인 정식 비무는 입학 시험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대상이 에스포의 마지막 남은 멤버 무진혁.
참으로 재미있는 우연이었다.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도진의 입장에서 재미있는 것이지 마주 선 무진혁은 결코 그렇게 재밌다고 느낄 수가 없었다.
'이 새끼…….'
겉으로는 최대한 담담한 척하고 있는 무진혁은 그러나 속으로는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담담하게 백설을 든 채 비무대 위에 오른 도진을 마주한 순간 무진혁은 정신이 나가 버릴 듯 아득해지고 말았다.
마치 감당할 수 없는 절벽이 자신을 향해 무너질 것만 같은, 그런 막막하고도 '싸운다'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압박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도진은 기세를 일으키지도, 투기를 발산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공간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으니 차라리 적의를 불태우는 것 이상으로 무진혁이 전의를 상실케 만들었다.
말 그대로 오를 엄두도 나지 않는 벽이 눈앞에 있으며 자신은 그 벽에 들이박는 걸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더욱.
'씨발…….'
기권할까.
평소라면 상상도 못할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되는 건 무진혁이 마지막 남은 '에스포'이기 때문이다.
오대용은 잽싸게 '잠룡 패밀리'로 들어가 버려 살아남았다.
하지만 권민국은 대항하다 나락으로 가 버렸고 곽필섭은 아예 범죄자가 되어 최소 수십 년은 세상 밖으로조차 나올 수조차 없게 될 신세였다.
같은 에스포로서 무진혁은 자신이 그 둘에 비해 크게 부족하지 않다 자부했지만 마찬가지로 그들보다 낫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 자신이, 숭무회마저 개박살 내고 양아치를 증오한다고 알려진 도진을 상대로 무사히 비무를 치러낼 수 있으리라고는 스스로 생각해도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옅게 피식 웃는 순간엔 아예 몸이 움찔 떨리고 말았다.
자신을 아껴주던 가문의 어른인 삼촌까지 특별히 찾아온 자리.
차라리 기권을 하는 게 '명예로운 패배'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내 그쪽으로 마음이 굳어가려던 순간.
"례(禮)!"
진행자의 외침에 무진혁은 반사적으로 오른 주먹을 왼 손바닥으로 감싸는 포권지례(包拳之禮)를 취했다.
아차했지만 그때는 이미 늦어서 '시작!'이라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말았다.
'이런 개……!'
속으로 표정을 왕창 구긴 무진혁이었으나 이미 기호지세였다.
이렇게 된 이상 발악이라도 하자는 생각으로 내공을 끌어올리며 달려들었다.
훅-!
단숨에 접근해서 왼손을 가리는 각도로 오른 주먹이 쏘아져 나간다.
특이한 건 그렇게 주먹을 쥔 모양이 평범한 형태와 달리 검지가 좀 더 돌출되어 있다는 부분이다.
군홍무가의 '군홍청권(軍鴻聽拳)'이 가지는 특징으로 이렇게 돌출된 검지에 깃든 여러가지 수법들이 군홍청권의 요결이기도 하다.
힘을 싣기 위해 내딛는 진각은 일반적인 진각보다 아주 조금 더 나아간다.
그리고 동시에 발가락을 오므림으로써 상대의 거리 감각을 또 조금 더 속인다.
마지막으로 주먹을 조금 더 깊숙이 넣음으로써 닿지 않아야 할 주먹을 닿게 만든다.
그리고 검지에 집중된 내공이 한정된 타격점에 때려박히는 것으로 큰 피해를 주는 것이다.
다만 그 모든 요결은 도진에게 무용지물이었다.
툭.
아주 가볍게 도진이 검끝으로 손목을 건드려 투로를 흔드는 것만으로 군홍청권의 일초식이자 무진혁의 주특기였던 일지홍(一指紅)은 무력화되었다.
'미, 미친!'
단순히 무력화한 것이 아니라 일지홍을 구사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내공의 흐름이 무력화된 것이었기에 무진혁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다급히 준비해 두었던, 오른손으로 가렸던 왼손으로 펼치는 바깥으로 휘어 옆구리를 노리는 편훼홍(鞭喙紅) 또한 도진이 손목을 건드렸던 백설을 가볍게 아래로 내림으로써 채 절반도 뻗지 못하고 회수해야만 했다.
그러면서 철판교의 수법으로 상체를 뒤로 휙 넘기며 기습처럼 오른 다리로 도진의 허벅지를 노렸으나 백설이 떨어지던 기세를 더하며 베어오자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회전하여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뭐야.'
공세가 전환될 타이밍이었기에 무진혁은 잔뜩 긴장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으나 평이한 얼굴로 검을 회수한 채 제자리에 선 도진의 모습에 망연자실해졌다.
짧은 순간이었으나 무진혁은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지랄발광'을 했는데 빌어먹을 놈은 그저 검을 여유롭게 아래로 내리그은 것만으로 모든 시도를 무력화해 버렸다.
차라리 몰래카메라에 당하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득한 격차를 체감하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 놀리다 흠씬 두들겨 팰 생각인가?
질질 끌면서 개망신을 주고, 지워지지 않을 흑역사를 안겨 주려고?
생각이 많아지는 무진혁이었다.
허나 그런 무진혁을 바라보는 도진은, 사실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무진혁.
분명히 양아치 새끼이고 아주 많은 사람에게 해악을 끼쳤을 것이다.
그럴 기회가 된다면 분명히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권민국이나 곽필섭과 마찬가지의 꼴로 만들어 주었을 터.
하지만 오늘만큼은, 이 자리에서는 그럴 생각이 들지 않는 도진이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굳이 거창한 이유가 필요할 만큼 무진혁은 도진에게 있어 의미있는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그냥, 그냥 요즘은 기분이 좋았고 지금도 그 좋은 기분이 유지되고 있는데 무진혁을 조져 놓는 것으로 그 기분을 깨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무진혁이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으면 이야기가 달라졌겠지만 요즘 쥐죽은듯 조용하며 허튼짓한 적도 없었으니 오늘만큼은 넘어가도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다.
다만 그 생각을 또 굳이 무진혁에게 알려줄 필요는 없었으니 도진은 저 혼자 똥줄이 타고 있는 무진혁을 상대로 가볍게만 손을 쓰고 있는 것이고.
-그래도 나름 배울 점은 있네요.
도진의 말에 위지혁이 피식 웃었다.
-저 녀석에게서 말이냐?
-아뇨. 그냥 이 비무 자체가요.
비무에서 마주한 무진혁은…… 그러니까 몸은 컸는데 사람을 때리기 위해 주먹을 쥘 줄도 모르는 아둔한 녀석 같았다.
무자비하게 상대를 괴롭히고, 때릴 줄 알며 소위 말하는 '육식계 실습'도 나갔던 게 무진혁인데 그런 비유를 하는 건 놈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실 속 화초였기 때문이다.
도진으로선 조금 미안한 비유지만 저번 실습을 겪기 전의 유지은과 닮은 부분이었다.
안전한 곳에서, 우위가 확보된 상황에서나 기세가 등등할 수 있는 게 무진혁이었다.
군홍무가에서 무진혁을 '과보호'했다는 말이다.
그에 비해 도진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무림'을 겪었다.
저번의 실습은 도진에게 있어 그런 의미였다.
목숨을 노리는 적을 베었고 아차하는 순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의 연속을 자신의 무공을 구사하여 돌파했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 지금 무진혁의 모습이 분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부분에서의 격차.
그것이 도진이 무진혁을 완벽히 꿰뚫을 수 있게 해 주었다.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덤벼드는 무진혁은 도진의 신안에 근본적인 부분에서부터 간파당했고, 그렇기에 거짓말처럼 단순한 검놀림에 모든 초식이 철저하게 봉쇄당하고 있었다.
"으음……."
"이거, 상대가 안 되네요."
지켜보던 각계의 인사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진혁. 군홍무가의 둘째. 에스포. 숭무고에서도 손꼽히는 상위권의 학생.
그 모든 것이 진실이었으나 잠룡에 대는 순간 지극히 초라해져 버렸다.
그야말로 서너살 짜리 꼬맹이가 장난감을 들고 휘뒤르는 걸 '무림인 삼촌'이 놀아주는 것 같다.
지극히 단순한 종베기 혹은 횡베기만으로 그 이름높은 군홍무가의 군홍청권이 파훼당하고 있으니 이건 무진혁과 김도진 사이의 격차가 댈 수조차 없을 만큼 벌어져 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이건 도진의 경지에 감탄은 할 수 있을지언정 그들이 기대하고 있던, 도진의 고유 무공에 관해선 전혀 알아낼 수 없는 일이었으니 동시에 실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관람석에서 순수하게 기뻐하는 건, 그리고 만족하는 건 미소짓고 있는 오성아와 '역시 형이야'란 눈으로 그저 감탄하는 우서진.
'역시 자네는 언제나 나의 기대를 뛰어넘는단 말이지.'
그리고 명장 우벽진 정도였다.
주르륵.
또한 그런 분위기에서 완전히 동떨어져 식은땀마저 흘리며 뚫어져라 비무를 지켜보고 있는 무인도 있었으니 다름 아닌 군홍무가에서 찾아온, 아끼는 조카의 비무를 관람하기 위해 참석한 무준석이었다.
무준석은 전 세대이자 현재 군홍무가를 이끌고 있는 세대의 둘째로 현 가주의 동생이자 무진혁의 삼촌이 되는 인물이었다.
현 가주의 동생이면서 무공 실력 또한 한 손에 꼽히는 만큼 군홍무가의 실세 중 실세이기도 했다.
그런 실력을 지닌 군홍무가의 고수였기에, 무준석은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깊은 부분에서 비무를 읽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시야에서 비무를 읽었기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잠룡이라 불리는 저놈은…….
'군홍청권을…… 꿰뚫어 보고 있다고?'
그의 상식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 상황은 절정에 치달아 이윽고 발버둥치던 조카가 숨기고 있던 군홍청권의 비기를 꺼내려 들었다.
무준석은 다급함에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머, 멈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