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216화 (216/741)

215화

랭킹전의 예선은 꽤 가혹한 강행군이었다.

학생은 하루에 세 명의 상대와 비무를 치러야 했고 2승을 챙겨야만 다음 라운드로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2승을 챙긴 1학년과 2학년이 각각 128명으로 추려질 때까지가 바로 '예선전'이었다.

세 번의 비무를 치르고 나면 하루를 쉬게 되지만 그 하루의 휴식 이후 바로 다음 예선을 치러야 하니 가혹한 강행군이 되는 것이다.

특기할 만한 점은 이 예선에서 도진이 소담이나 우정한 등의 '우승 후보'를 만날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간단한 이유인데, 예선에서 우승 후보끼리 붙이는 건 불합리하고도 불공정한 여러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거창하게 '랭킹전'이라고 해놓고 초장부터 우승 후보끼리 붙어 서로가 공멸하거나 다음 비무에 크나큰 지장이 있을 만큼의 손해를 입게 되는 건 좋은 그림이 아니었다.

대진표는 그런 여러가지 사항들을 고려하여 합리적으로 짜여졌으며 그 합리적인 틀 안에서야 무작위로 상대가 정해졌다.

…그러한 사정 하에 짜여진 대진표였으니 도진은 자신의 상대 중 한 명이 된 무진혁의 이름에 옅게 입꼬리가 올라간 것이었다.

무진혁.

오대용은 절연을 선언했고 사실상 타의로 자퇴하여 폐관수련에 든 권민국, 40년의 징역을 선고받고 항소한, 퇴학을 당한 곽필섭까지 멤버가 다 사라지고 유일하게 남은 에스포다.

리더였던 권민국과 그룹을 이끌던 곽필섭까지 숭무고에서 제명되면서 에스포는 유명무실을 넘어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이름이 되었고 무진혁은 쥐죽은듯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뒤로야 어쩌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숭무고 내에서 일진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학생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도진이 원한 그림이었고 감히 그 그림을 망치려 드는 학생은 없었으니 무진혁 또한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러면서 무진혁은 학업 자체를 소홀히 하게 됐으니 썩어도 준치라고 실력만큼은 있던 무진혁이 우승 후보로 여겨지지 못하고 도진과 예선 첫 번째부터 붙게 된 이유였다.

도진은 대진표를 받아든 무진혁의 표정이 완전히 썩지는 않았을까 생각했고 실제로 그러했다.

"이런 개…… 씨이발."

대진표가 주먹을 꾹 쥐고 파르르 떨리는 무진혁의 손에 처참하게 구겨져 떨렸다.

그러나 무진혁은 그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그저 대진표를 원망할 뿐이었다.

도진을 이기겠다고,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조차 호기를 부릴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무진혁은 심리적으로도 압도당해 있었다.

'나머지 두 번을 이길 수밖에.'

생각대로 되지 않는 학교 생활을 소홀히 했던 게 이런 폭탄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집행부에도 들지 못하고 학교 내에서 어깨에 힘 주고 다닐 수도 없게 됐으니 적당히 졸업장만 받으려 했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랭킹전은 다른 이야기였다.

무진혁 개인이 아니라 군홍무가의 체면이 걸려 있으니 말이다.

최소한의 기준조차 만족하지 못한다면 집안에서의 대우가 달라질 것이었으니 무조건 본선에는 진출해야 했고 거기서 체면치레만큼은 반드시 해야 했다.

때문에 비무를 치르게 될 다음주까지 무진혁은 끙끙 앓아야만 했으나 도진에겐 당연히 남 일이었다.

오전의 이론 수업과 오후의 랭킹전을 대비한 집행부의 활동을 마음 편히, 훌륭하게 완수해냈고 오늘 드디어 시작된 예선의 경기를 보기 위해 용봉관을 찾았다.

도진의 곁에는 유지은이 함께 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한창 진행 중인 1학년의 비무를 담담한 얼굴로 두 눈에 담고 있었다.

보이니까 보인다가 아니라 분명한 의미를 담아 비무를 지켜 보고 있으니 그녀의 변화가 엿보인다.

-시야가 제법 넓어졌구나.

-네, 그러네요.

유지은은 하늘만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날개가 없었으나 하늘을 거닐 수 있는 재능이 있었고 언젠가는 그리될 것임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기에 땅에 시선을 주지 않았다.

허나 그녀는 새가 아닌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살아가야 할 인간이었기에 하늘만을 바라보다 언젠가 파탄이 날 운명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땅에 시선을 주지않다 넘어지고 말았고 말이다.

그런 그녀의 시야가 도진과 함께 했던 시간을 계기로 넓어졌다.

고개를 푹 숙인 게 아니다.

여전히 하늘을 보되 땅을 살피는 것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에 치우치지 않는 넓은 시야.

유지은은 그것을 가지게 되었다.

세상의 기준이 무공이나 재능만이 아니라 더 넓고 큰 것임을 깨달았고 그것이 무공만이 아닌 삶 자체의 변화를 가져오게 만들었다.

이제 유지은은, 전생에서처럼 세상에서 동떨어진 고독한 삶을 살지 않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도진은 생각했다.

그래서 말했다.

"선배."

"응?"

"나중에 선배네 집에 놀러가도 돼요?"

예상치 못했던 질문인지 유지은의 눈동자에 슬쩍 파문이 일었다.

그러나 곧 그 눈동자는 예쁜 곡선을 그렸다.

"응. 나중에 내가 초대할게."

개미굴 토벌을 위한 브리핑에 참여했을 때, 유지은은 집안 사람들에게도 배척받고 있었다.

그것을 꼭 그 사람들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없는 건 유지은에게도 분명한 잘못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 지붕 아래, 같은 가문 아래의 피가 섞인 사람들이 아닌가.

도진은 유지은이 변화함으로써 그렇게 피가 섞인 친척들과, 그리고 가족들과의 관계를 개선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것이 혈연이라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되어 유지은이 자신을 초대해 줄 때를 기대했다.

도진의 마음씀씀이를 헤아린 유지은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화제를 바꾸었다.

"소담이는 어디 갔어?"

서소담.

아닐 때 빼고는 도진과 붙어다닌다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로 도진의 곁에 머무는 시간이 길었던 소담이 보이지 않았다.

유지은의 물음에 도진은 아, 하고 말했다.

"수련을 하러 갔어요."

"수련?"

"네. 요즘들어 열심이거든요."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유지은에게 보이지 않도록 다른 곳을 바라보는 도진의 눈동자는 약간 가라앉아 있었다.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실제로 소담은 요즘들어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그 이유가 단순히 열심이어서나 무언가 진전의 실마리를 잡았기 때문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도진의 눈동자를 가라앉게 만들었다.

저 사람, 1년 뒤에 죽습니다.

다름 아닌 도진이 입학 시험 시즌에 소담을 처음 보고 스승 위지혁에게 했던 말이다.

그리고 그 1년이, 얼마 남지 않은 때가 되었다.

대부분의 학생이 그랬지만 소담 또한 언제나 무공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허나 요즘 들어 보이는 모습은 단순히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마치 조금이라도 달리는 속도를 멈추면 큰일이 날 것처럼 쫓기는 듯한 기색이었다.

때문에 도진은 생각하고 있었다.

슬슬, 서로가 외면하고 있던 울타리 안의 더 깊숙한 곳에 발을 디딜 때가 되었다고.

사실 첫 만남부터 그냥 넘어간 의문도 있었던 게 소담이었다.

이제는 그럴 만한 인연을 쌓았으니 늦기 전에 도진은 소담과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 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후, 안 늦었네."

생각에 잠겨 있던 도진이 새로이 나타난 친구의 목소리와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달려온 듯 보이는 오대용의 모습에 도진이 피식 웃었다.

"뭐가 그렇게 급해?"

"뭐, 늦으면 그렇잖아."

그러면서 흘끔거리던 오대용은 곧 비무대 위에 오르는 '소꿉친구'의 모습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늘 낮에 용봉관을 찾은 이유, 다름 아닌 주정아의 비무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주정아는 예선 첫날 비무가 정해졌기에 오늘 집행부 활동에 빠지고 그에 대한 준비를 했다.

그리고 도진은 유지은, 그리고 오대용과 함께 그 비무를 관람하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당찬 그녀답게 비무대 위에 오른 주정아는 경기를 앞두고 모여드는 시선에도 긴장 대신 도진과 유지은을 찾아내고서 자신감 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찡긋-

…오대용에게는 윙크를 날려 주었고 말이다.

그 윙크를 받은 오대용은 숭무고의 엘리트답지 않게 크게 움찔거렸고.

"얼씨구."

"크흠."

도진의 시선에 멋쩍게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슬쩍 돌렸다.

요즘 들어 둘 사이의 기류가 심상치 않았다.

그것은 비무에서도 확연히 드러나고 있었으니 주정아의 창술에 깃든 '부드러움'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사랑에 빠진 봄처녀로구나.

깨달음을 얻었지만 여전히 강맹함을 버리지 못했던 주정아의 연류창법이 본래의 형태였던 부드러움을 담기 시작했다.

그 계기는 다른 게 아니라 주정아와 오대용 사이의 '청춘 사업'에 순풍이 불며 생긴 심경의 변화였다.

바보가 아닌 이상 주정아의 마음을 모를 수가 없었고 오대용은 당연히 그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알고 있었기에 그것을 과분하여 받을 수 없다 생각한 오대용은 모른 척하고 밀어내며, 스스로를 속여 한유아의 관심을 갈구했었다.

허나 도진의 도움으로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스스로를 믿을 수 있게 되면서 스스로를 속이지 않아도 되는 오대용은 이제 주정아의 마음을 모른 척하고 밀어낼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된 이상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건 필연적이었으며 오대용을 위해 강한 척해야 했던 주정아 또한 힘을 뺄 수 있게 된 것이다.

"어휴. 이거 솔로는 서러워서 살겠나."

"…뭐 임마?"

너스레를 떠니 오대용이 눈을 부라렸다.

장난인데 부끄러워 과민반응하네, 생각하며 도진은 속으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 시기의 소꿉친구는 무적이었죠.

-흠, 그랬었구나.

전생에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도진은 만화나 애니메이션 등에도 심취했으니 이번 생에선 결코 쌓을 수 없었을, 소위 말하는 오타쿠로서의 소양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오타쿠로서 이 시기의 만화나 애니메이션 등에서 소꿉친구는 무조건 승리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제자야, 혹시 너에게도 소꿉친구가 있었느냐?

-아뇨, 없었죠.

스승의 물음에 도진은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그런 소꿉친구가 현실에 있을 리가…… 아니, 저기 있으니 없진 않겠지만 흔한 건 아니죠. 굳이, 억지로 따지면 서진이 정도나 그런 느낌이 아닐까요.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으며 주정아의 비무를 지켜 보았다.

그래도 될 만큼 비무는 시종일관 압도적이었고 주정아는 훌륭히 1승을 따냈다.

"축하해."

"고마워."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주정아에게 오대용이 수건과 음료를 건네며 챙긴다.

주정아는 그것을 기분 좋게 받아들며 미소지었다.

첫 번째 비무를 끝낸 주정아는 이제 상대의 비무가 끝나고 1시간의 휴식 뒤 다음 경기를 치르게 된다.

도진의 기억이 맞다면 두 번째 상대는 숭무영재고의 학생이었는데 특출난 부분이 없는 학생이었기에 굳이 팔이 안으로 굽지 않더라도 주정아의 낙승이 예상되었다.

예선의 비무는 기본적으로 숭무고 학생의 경우 숭무영재고의 학생 둘, 숭무고 학생 하나와 매칭된다.

반대로 숭무영재고 학생의 경우엔 숭무영재고의 학생들로만 매칭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두 학교 사이의 재학생 수가 비대칭이기 때문이다.

이번 숭무고 42기 신입생은 169명이었으며 권민국, 곽필섭을 포함하여 여러가지 이유로 학교를 그만둔 게 7명이라 현재 숭무고 1학년생은 총 162명이다.

여기에 숭무회 사건 등으로 정학을 먹은 학생들까지 포함하면 랭킹전에 참여하는 숭무고 학생은 153명까지 줄어든다.

그에 비해 숭무영재고의 1학년 재학생 중 랭킹전에 참여하는 학생은 766명이었으니 일부 운 없는 대진표를 받아드는 학생들을 제외하고선 초반에 그런 식으로 매칭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네가 누군데, 당연히 박살내겠지. 당연히 의심 안 해."

"그래. 그 새끼가 요즘 좀 잘 나간다고 해도 너한테 비빌 수준은 아니니까."

"걱정마라. 내가 쳐발라 줄 테니까."

용봉관의 다른 비무대 한 켠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도진은 지인 중 한 명이 그 '운 없는 대진표'를 받아들었음을 알게 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