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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215화 (215/741)

214화

흙과 비료를 부어 잘 섞은 뒤 모종을 심고 필요하다면 지지대까지 설치한 뒤 물을 준다.

그 과정은 생각보다 더 힘이 드는 중노동이었으나 도진네 식구와 우서진에게는 그저 기분 좋은 땀을 흘릴 수 있는, 함께 하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즐기던 중 도진은 문득 든 생각에 스승에게 물었다.

-스승님.

-왜 그러느냐.

-무협지에서는 경지에 든 고수들이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흔히 난을 치거나 텃밭을 가꾸는 걸 보여주던데 실제로도 그런가요?

도진의 물음에 위지혁은 피식 웃었다.

-그래, 그렇구나. 그러는 자들이 적지 않았지.

-스승님도 그러셨어요?

-뭐 유행처럼 번지길래 나도 해 본 적이 있었느니라. 나쁘진 않았지.

그러면서 위지혁은 왜 그런 유행이 번졌는지에 관해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해 주었다.

-식물을 가꾼다는 건 자연 속에서 생명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흙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체감하고, 관여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이 정(正)이든 사(邪)이든, 혹은 마(魔)라고 해도 깨달음의 영역에 발을 들였다면 아주 특별하게 보일 수밖에 없지. 그러니까 거기에 매료되는 것이 아니겠느냐.

-음, 그렇겠네요.

마침 텃밭을 가꾸다 든 생각에 해 본 질문이었는데 어쩐지 또 하나의 화두를 엿본 느낌이어서 도진은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지혁은 그렇게 느끼는 바가 있는 제자의 모습에 웃고선 말했다.

-한 번 식물을 길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경험이 될 게다.

-예. 주말마다 텃밭을 한 번 들여다보겠습니다.

삶을 사는 모든 것이 길(道)을 걷는 여정이라는 위지혁의 지론에 따라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위지혁이었기에 도진은 회귀 후 어떤 목적 하나만을 보고 아등바등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의 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걸으며 마음이 이끄는 대로, 그러나 최선을 다해 살고 있었다.

스승들 덕분에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고 그 기회를 헛되이 하지 않도록 무공을 배울 수 있었다.

스승들은 그런 은혜를 베풀면서도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저 '부탁'을 했었다.

하나는 도진이 천마의 이름을 이음으로써 발생하는 의무.

그나마도 내키지 않는다면 행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하던 스승이었으나 도진은 그 의무를 다하기로 했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가 혹여 위지혁과 장호의 후손을 만난다면 필요할 경우 도움의 손길을 건네줄 것이었다.

사실 희박한 확률이었다.

현대의 과학으로도 그 시기를 특정할 수 없으며 무공 또한 단절되다시피했다.

과연 그 후손을 찾을 수 있을지, 최악의 경우 후손이 이어지긴 했을지부터 고려해야 할 일이니 말이다.

허나 도진은 그런 걱정을 할 시간에 최선을 다해 스승들의 부탁을 이행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었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지금은 삶을 살며 무공을 익히는 데에 주력하고 있지만 바로 그 준비가 끝나면, 도진은 주저없이 천마신교의 맥을 이었음을 선포하고 해야 할 일들을 할 것이다.

다만 지금은 스승의 말에 따라 새로 만든 텃밭에 씨를 심고 물을 주는 것에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모든 일을 다 끝내고 나니 어느새 오후가 가까워졌다.

"수고했어."

"도와줘서 고마워, 서진아."

"아뇨. 저도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밥 먹고 갈 거지?"

"예. 그러겠습니다. 그럼 일단 샤워하고 옷 갈아입고 올게요."

기분 좋게 흘린 땀을 샤워로 씻어내고 옷을 갈아입은 뒤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다녀오세요, 아버지."

"그래."

식사 후엔 시간이 되어 출근하는 아버지를 가족들이 함께 배웅했다.

"너도 어디 가?"

그리고 함께 나온 우서진도 볼일이 있어 보였기에 물었는데 예상치 못했던 이름이 나왔다.

"네. 상미랑 만나기로 했어요."

"어? 상미?"

"네."

상미. 윤상미.

도진이 처음으로 울타리 안에 들인 '내 사람'이자 한천검공을 전수한 천재다.

'그러고보면…….'

집들이 파티 때에 보았던 게 떠오른다.

데면데면하던 둘이 갑자기 뭔지 모를 시선을 주고받으며 공감대를 형성했었다.

"꽤 많이 친해졌나 보네?"

아무렇지 않게 물으니 우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앞으로 같은 숭무고 동기가 되기도 할 테고 자주 볼 테니까요."

"응, 그렇지."

그리고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생각보다 더 자주 만난 듯했다.

아무래도 상미가 숭무동에 들어오려면 여러가지 복잡한 절차가 필요한데 그 부분을 우서진이 많이 해결해 준 모양이었다.

덕분에 상미는 동생들과 주기적으로 만나 이것저것 돌봐줄 수 있었고.

"그랬구나. 고마워."

"에이, 인사를 들을 정도는 아니에요. 아! 괜찮으시면 형도 같이 가실래요?"

"응? 어디를? 상미 만나러?"

"네. 오늘 만나는 게 랭킹전 축제 때문이었거든요. 형도 같이 가서 이야기하시면 좋을 거 같아서요."

"아, 너희도 랭킹전 관람하려고?"

"네. 그런 비무 보는 거 자체가 좋은 경험이잖아요. 그리고 형 비무 하시는 것도 보고 싶구요."

"음, 뭐 방해가 아니라면 그럼 같이 갈까?"

"네! 상미한테 문자해 둘게요."

화색을 띠며 크게 고개를 끄덕이니 혹여 방해가 되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일말도 들지 않는다.

도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함께 상미를 만나러 외출하게 되었다.

* * * *

오후 2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에 도진은 우서진과 함께 문월동 가까이 있는 시내의 한 카페에 들어섰다.

안에 들어서자마자 도진은 바로 한곳으로 시선을 주었고 환한 얼굴로 일어서는 상미와 눈이 맞았다.

"잘 지냈어?"

가까이 다가가 웃으며 물으니 네! 하고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생기가 가득한 얼굴을 보니 과연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바로 알 수 있어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우서진도 그렇지만 상미 역시 잘 지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느껴지는, 그들의 테이블로 집중되는 카페 내의 시선들.

당연한 일이었다.

생기 가득한 상미는 마치 눈 내린 추운 겨울날 피어난 작은, 그러나 주변으로 향기를 퍼뜨리는 선명한 색채의 꽃을 닮았다.

우서진 또한 아직 가시지 않은 겨울을 밀어내듯 부는 봄의 온기를 닮은 기세를 머금고 있으니 사람들의 시선을 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둘이 한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 그야말로 청소기처럼 시선을 빨아들이는 그림 그 자체가 된다.

심지어 여기에 문월동 출신의 '잠룡 김도진'이 포함되어 있으니 시선을 주지 말라는 것이 오히려 불합리할 지경이다.

"자리를 옮길까?"

"네."

결국 일행은 시선이 미치지 않는 작은 룸 하나를 잡고서야 음료 하나씩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래, 벌써 실습을 하고 있구나."

"네. 오늘은 오전반이라 오후부터는 자유 시간이에요."

미용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보호소에서 등록해 준 학원에 다니던 상미는 어느새 실습에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실습을 다니는 미용실이 다름 아닌 도진이 처음 데려가 주었던 바로 그 미용실이었다.

상미의 머리카락을 깎아 주었던 젊은 헤어 디자이너가 흔히 말하는 '사수'가 되었는데 친절하게 잘 가르쳐준다고 했다.

도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습을 하고 있으면 이제 내 머리는 정말로 네가 깎아줘도 되겠네?"

도진의 물음에 상미는 입술을 오물거렸다.

"음, 아직은 자신 없으니까 조금 더 연습하고 해볼게요."

한천검공을 익히고 있는 천재인 상미의 손재주가 부족할 리가 없을 텐데 자신감이 부족해 보인다.

"뭘 그렇게 긴장해. 어차피 커트만 해주면 되는 걸."

도진은 헤어스타일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당장 저번에 간 미용실에서도 짧게 커트해 달라고 한 뒤 불편할 정도로 자랄 때까지 방치하는 중이고 말이다.

하지만 상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빠의 머리카락은 중대 사항이야.'

눈으로 강렬하게 그런 의지를 내비쳤고 맞은편에 앉은 우서진이 동의한다는 듯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익혀서 예쁘게 깎아 드릴게요."

상미의 진지한 말에 도진은 결국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때까지 기대하고 있을게."

"네! 열심히 할게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말하는, 기합이 잔뜩 들어간 모습에 도진은 한 번 더 하하 웃었다.

그리고 화제는 랭킹전 축제로 넘어갔다.

"아, 너희는 프리 패스 티켓 사려고?"

"네."

프리 패스 티켓은 입장권을 포함하여 본선 비무 전체를 볼 수 있는 티켓이다.

꽤 비싼 편이었는데 우서진과 상미 둘 다 그 프리 패스를 사려고 했다.

상미가 말했다.

"유진이랑 호진이가 축제에 매일 가고 싶다고 했거든요. 근데 서진이가 알려주기로 집행부원의 가족들은 프리 패스 티켓이랑 동일한 권한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응, 맞아."

우서진은 그것을 할아버지 우벽진을 통해 들어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저희가 프리 패스 끊고 유진이랑 호진이 데리고 같이 다니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물론 어머님도 함께 하실 수 있으면 같이 다니면 더 좋구요."

"릴리랑 윌리엄도 같이 다니게 될 것 같아요. 웨일스 삼촌께서도 매일 함께 하실 순 없어서 저에게 부탁하셨거든요."

"그랬구나."

그 마음씀씀이가 고마워 도진은 미소를 지었다.

유진이와 호진이는 물론이고 릴리와 윌리엄도 축제와 비무에 관심이 많았지만 아직 어린 나이라 아이들끼리 다니기엔 문제가 많았다.

우서진과 상미는 그런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다니려 한다고 말한 것이다.

도진이 미소지은 얼굴로 말했다.

"착한 너희들에게 내가 선물을 하나 주고 싶은데."

"선물이요?"

둘의 시선에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집행부원은 가족만이 아니라 2인에 한해서 프리 패스랑 동일한 권한을 줄 수 있거든. 그걸 너희 둘에게 주고 싶은데 어때?"

"아……."

본래 이것은 일반적으로 상류층 자제인 집행부원이 인맥 관리 목적으로 선물하곤 하는 권한이었다.

도진의 경우에도 이 선물을 할 만한 지인들이 여럿 있긴 했으나 따져보면 우서진과 상미에게 주는 것이 가장 좋을 듯했다.

"너희들이 고맙게도 내 동생들을 돌봐 준다고 하니 선물이라기보단 뇌물이 더 맞겠네. 동생들 잘 부탁한다는 뇌물."

"네! 그 뇌물 받을래요."

상미가 먼저 고개를 크게 끄덕였고 우서진도 감사합니다, 하고 말했다.

돈이 아니라 그 권한을 선물하려 하는 마음이 두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선물이었다.

"고마워. 그럼 그렇게 등록해 놓을게."

축제에 관한 이야기를 그렇게 마무리 짓고 잠시 사담을 나누는 사이 음료를 다 마셨다.

"음, 어디 가려고 했던 곳 있어?"

"아뇨. 이 이야기를 하려고 모인 거였어요."

본래는 이야기를 나눈 뒤 헤어지려 했다.

하지만 도진이 함께 하게 됐으니 우서진도 상미도 이대로 헤어지기엔 아쉽다는 얼굴이었다.

그 기색을 읽은 도진이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음, 그럼 우리 같이 피시방 갈까?"

"네!"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둘이 어디든 좋다는 얼굴이어서 도진은 또 하하 웃고 말았다.

* * * *

전생에서 우서진과는 랜선 친구로 하루 종일 게임을 하며 함께 놀았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전생에서도 생소한 공간이었던 피시방에 가자는 제안을 한 것이었다.

당시엔 하나의 게임을 파고들었으나 이번 생은 그렇지 않았기에 상미까지 포함하여 함께 즐길 수 있는 아케이드 게임을 위주로 골랐다.

셋 다 무림인이라 실력보다는 운에 좌우되는, 그러면서도 같이 유쾌하게 웃을 수 있는 게임을 골랐고 생각 이상으로 재밌게 놀 수 있었다.

그렇게 토요일과 일요일을 보내고 다시 찾아온 월요일.

드디어 랭킹전의 예선 대진표가 확정되었고 표를 받아든 도진은 익숙한 이름에 호오, 하고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도진이 상대해야 할 학생 중 한 명의 이름은 무진혁.

현재 유일하게 학교에 남은 에스포 멤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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