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213화 (213/741)
  • 212화

    랭킹전.

    숭무고의 1학년과 2학년 전체가 참여하는 연말 비무 대회.

    여기서의 숭무고는 숭무영재고가 포함되기에 그야말로 엄청난 규모의 비무 대회라 할 수 있었으며 본선동안은 그 비무 대회를 포함하는,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학교 축제'가 열린다.

    11월 초부터 시작하여 진행되는 예선은 눈에 띄는 학생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방문하는 업계 관련자들의 참석하에 진행되고 본선은 업계 관계자들은 물론이요 티켓을 구매한 일반 시민들까지도 관람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본선이 진행되는 시기에 방문자들을 상대로 한 점포가 열리는 등 축제가 열리는 것이다.

    11월 초부터 길면 12월 초까지 진행되는 기나긴 여정의 랭킹전을 학생들은 상당히 중요하게 여겼는데, 자존심이 걸린 진지한 비무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어필할 아주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무협지 식으로 하자면 이름을 날릴 수 있는, 무림맹이 주최하는 '용봉 비무 대회' 같은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번듯한 집안을 배경으로 두고 있는 숭무고 학생이라면 이름과 명예를 빛낼 기회였으며 숭무영재고의 학생이라면 대기업에 좋은 조건으로 입사할 수 있는 스펙을 쌓을 수 있는 기회였다.

    일반 대중에게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자리인 건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 학생들이 랭킹전에 집중할 수 있도록 숭무영재고를 포함한 숭무고는 이 시기에 시간표마저 바꾸었다.

    랭킹전이 진행되는 동안 숭무고에선 무공 수업을 진행하지 않는다.

    그 부분을 '랭킹전을 위한 개인 수련으로 갈음하고 오전에 한해 이론 수업만을 진행한다'고 기간 내의 스케쥴을 조정했다.

    관람객들을 위해 예선은 오후 3시, 본선은 오후 7시부터 비무를 진행하는데 비무가 있다면 그에 대한 준비를 하고 비무가 없다면 알아서 수련을 하든 다음 비무에 대비를 하든 스스로 시간을 쓰도록 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파격적이지만 또 어찌 보면 '무림학교'란 이름에 참 어울리는 수업이기도 했다.

    그 랭킹전을 코앞에 둔 시기.

    도진은 생각했다.

    '세상에 저절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지.'

    그래도 서른 넘게 나이를 먹고 온갖 쓴맛을 보며 살았던 도진은 이 세상에 저절로 되는 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화장실이다.

    일반적으로 개인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서 할 뒤처리는 물을 내리는 것 정도다.

    그것만으로도 할 일을 다 한 것이지만 실제로 진행되는 '뒤처리'는 상상을 넘을 만큼 엄청난 규모로 진행된다.

    청소를 넘어 정화조든 분류식 하수도든 가정 단위에서부터 시작하여 하수종말처리장까지 확대되는, 그야말로 국가 단위의 인프라가 작동한다.

    그러니까 현대 사회에서 아무렇지 않게 누리는 모든 것들은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 거대한 인프라에 의해 가능한 것이고 그 인프라를 구축하고 운용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이 뒤에 있다는 것이다.

    …왜 굳이 이런 생각을 도진이 하고 있냐하면, 랭킹전을 앞둔 지금 도진을 포함한 집행부가 그 랭킹전과 축제가 원활히 진행될 수 있도록 서류 지옥을 소화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선배. 이번 축제에 참여할 업체들 리스트 업이요."

    "응, 고마워."

    숭무고의 축제에 노점을 낼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최고의 인증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기에 엄청난 수의 업체가 참여 신청을 한다.

    그렇게 쓰나미처럼 몰려든 참여 신청을 심사하는 건 다행히 학생의 영역이 아니었다.

    공정성을 포함하여 학생들이 비리를 저지르지 않도록 외부 인원이 포함된 전문 기구에서 심사를 한다.

    그렇게 참여 업체가 확정되면 그때부터 학생의 영역이 되는데 확정된 업체의 규모, 위치 등 세세한 부분은 집행부에서 해결해야 했다.

    여기까지 일처리가 되면 해당 업체에서 실무에 들어가고 그 부분의 현장 관리 등은 숭무영재고의 집행부로 넘어간다.

    -우리 때는 '좋은 게 좋은 거'였는데 이 시대는 복잡하구나.

    -예, 그렇죠.

    규칙이 생기면 동시에 허점도 생긴다.

    그 허점을 메꾸면 또 메꾼 곳에 허점이 생기니 도돌이표다.

    그러다보니 현대 사회는 분명히 발전하지만 또 점점 복잡해지는 것이다.

    덕분에 축제 준비는 전생의 도진이었다면 차라리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숨막힐 정도로 복잡하면서도 업무량이 살인적이었다.

    하지만 이번 생의 도진은 그런 업무를 정면에서 쳐낼 수 있을 정도로 정신적으로든 체력적으로든 성장했다.

    제아무리 양이 많아 보여도 하나씩 쳐내다보면 어느 순간 사라진다.

    그리고 도진은 그것을 빠르고도 정확하게 쳐낼 수 있었으며 도진보다 이쪽으로 특화된 친구와 선배들이 집행부에 있었다.

    도진이 소담과 함께 하나씩 서류를 처리하는 사이 오대용과 주정아는 두 개, 세 개를 척척 해결했다.

    한유아는 태어날 때부터 잘했을 것만 같은 이쪽 분야의 '끝판대장'이고 무엇이든 잘하는 천재 유지은이야 천재라 그렇지만 오대용과 주정아는 그런 게 아니라 숙련된 어떤 느낌이 있다.

    이렇게 보면 과연 실무를 맡고 있는 기업의 3세라는 걸 새삼스럽게 실감하게 된다.

    주정아는 이미 중학생 때부터 후계자로 일을 배우고 있었고 오대용 또한 후계자와는 멀었다지만 배움만큼은 멈추지 않았었고 이제는 어엿한 회사의 대표였기에 더욱 그런 면모가 강했다.

    일반 학생이라면 엄두도 못낼 전문적인 업무였으나 다름 아닌 이곳이 숭무고이며 숭무고의 학생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저게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라는 것이로구나.

    -전문 경영인이란 단어가 있는 이유를 알 것 같네요.

    잠시 숨을 돌릴 겸 느슨해진 시간에 슬쩍 오대용이 보고 있는 서류를 확인하니 이번 축제에 올 초대 가수 리스트였다.

    그 리스트의 라인업은 생각 이상으로 화려했다.

    "어? RTX도 와?"

    RTX는 국내 출신이면서 세계 무대에서 더욱 유명하고 잘 나가는 팀이었다.

    국내 인지도도 대단하지만 그 이상으로 세계에서의 위상이 높은 그룹이었는데 이 팀마저 포함되어 있었다.

    오대용은 여상스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송국이랑도 협업하니까. 그리고 숭무고 축제 정도 되면 그럴 수 있지."

    슬쩍 보니 RTX만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1티어'로 가득했다.

    숭무고 랭킹전의 축하 무대 라인업이 연말 가요제 수준이라고 언뜻 들은 적이 있는데 명불허전이었다.

    '그러고보면 이은지가 여기서 레전드를 찍었었지.'

    숭무고 입학 시험에서 떨어졌던 이은지는 우여곡절 끝에 데뷔했으나 이렇다 할 임팩트가 없었는데 바로 그렇게 떨어진 숭무고 랭킹전의 축하 무대에서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대한민국에 새겼었다.

    그게 몇 년 뒤의 일이다.

    '이번에도 그러려나…….'

    그리고 이렇게 오대용과 가수 이야기, 그리고 생각을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레드슈와 안티체리의 이야기가 나왔다.

    "레드슈랑 안티체리는 못 나오겠네."

    오대용이 피식 웃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집행부에 있으니 1티어라도 힘들지. 괜히 불렀다간 안 좋은 이야기 나올 테니까."

    "그렇네."

    레드슈와 안티체리의 소속사 바른 엔터의 대표가 바로 오대용이고 그 오대용이 집행부에 있으니 어떤 형태로든 레드슈와 안티체리를 공식적으로 불렀다간 뒷이야기가 나올 터였다.

    저번 용인에서의 행사로 레드슈와 안티체리의 여론이 호의적으로 변했다지만 여전히 안티가 있었고 언론플레이를 하려고 드는 DS 엔터 같은 곳이 있는 이상 꼬투리가 잡히면 피곤해진다.

    "그래도 뭐 우리야 그런 거 신경쓸 필요 없지. 표는 샀고 협조도 얻었으니 웹예능 찍으면 되니까."

    씨익 웃으면서 오대용은 그렇게 말한다.

    도진도 '아, 그렇네' 하고선 웃었다.

    일상적인 내용으로 팬들에게 다가가는 웹예능을 하고 있는 레드슈와 안티체리에겐 올라갈 수 없는 축제 무대보다 관람객들 사이에 있는 것이 '아직은' 두 그룹에게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도진과 함께 하며 긍정적이 된 그녀들은 축제 무대를 보며 열패감을 느끼기보다는 향상심을 불태워 줄 것이다.

    "도진아, 도시락 공급 조율 좀 하고 올래?"

    "네, 선배."

    잠시의 이야기를 끝으로 도진은 한유아의 부탁에 따라 다른 업무를 처리하러 움직였다.

    이번 축제에 공급될 도시락 등의 전반적인 업무에 관한 일이었는데 여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야 할 담당자는 다름 아닌 서태주였다.

    "안녕."

    "응, 안녕."

    -제법 쓸 만한 눈을 하게 되었구나.

    처음 보았을 때와 다르게 눈동자에 자신감이 깃든 서태주는 그 자신감만큼이나 근육도 두드러지는 모습이었다.

    도진이 준 연단공을 열심히 익히고 있다는 걸 느껴지는 기세만으로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저번 일진 집단이었던 숭무회의 해산과 얽혀 있던 숭무영재고의 집행부 다수가 사퇴하게 됐는데 그러면서 생긴 빈자리 중 하나를 맡아 잘 해내고 있다고도 들었다.

    "공급량이 생각보다 더 많네."

    "응. 이번에 우리가 물량을 다 공급하기로 했거든."

    진행 요원을 포함하여 축제 기간 중 고용인들에게 식사를 제공해야 하는 등 도시락이 필요한 곳은 적지 않았다.

    서류를 보니 그렇게 공급해야 할 수많은 도시락을 모두 'TJ 푸드'에서 대기로 되어 있었다.

    서태주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TJ 푸드는 요즘 들어 승승장구하고 있었는데 신생인만큼 덩치에 비해 이름값이 부족한 느낌이 강했다.

    그 이름값을 이번 랭킹전에서 퍼뜨리고 올리기 위해 내린 결정이라고 했다.

    "광고란 게 그렇잖아. 익숙하면서도 싸구려 느낌이 들지 않게 하는 거. 랭킹전이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어."

    제안을 한 것은 다름 아닌 서태주였는데, 자신감 가득한 그 눈동자에 도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잘하고 있네.'

    울타리 안의 사람이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건 언제가 되었든 기분 좋은 일이다.

    "오케이. 그럼 이렇게 서류 올릴게."

    "응. 아! 그리고."

    "응? 왜?"

    업무에 관한 이야기가 끝나자 서태주가 잊고 있었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가 우물쭈물했다.

    도진이 눈을 맞추고 재촉하지 않으며 기다리자 서태주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꼭, 좋은 성적 내 볼게."

    무슨 말인가 했더니, 하고 도진은 피식 웃으며 가볍게 받지 않았다.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선 서태주의 불끈 쥔 주먹에 자신의 주먹을 맞댔다.

    "그래. 힘내라."

    * * * *

    "선배. 서류요."

    "응, 고마워."

    서태주와 협의하여 작성한 서류를 한유아에게 건넨 도진은 그녀와 함께 현장 시찰을 나가게 됐다.

    아직 예선조차 시작하려면 일주일이 남았지만 업무량을 생각해보면 이제 겨우 일주일이 남았을 뿐이니 현장도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할 시기였다.

    가장 먼저 간 곳은 다름 아닌 중앙 체육관, 용봉관이다.

    입학 시험의 비무 대회도 치러졌던 곳으로 큰 행사는 보통 이렇게 용봉관에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랭킹전도 다르지 않아서 주무대는 용봉관과 그 일대가 된다.

    예선전부터 사용될 곳이기에 이미 공사에 착수를 했는데 한유아는 혹여 어긋난 곳이 없나 꼼꼼하게 체크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과거 입학식을 준비할 때처럼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카리스마를 두르고 있다.

    평소의 장난스런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감히 아름다움에 취할 엄두도 내지 못하게 만드는 그런 제왕의 기세.

    때문에 한유아는 동경의 대상이며 아무나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존재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런 금봉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또 특별하게 비춰지는 것이 도진이지만 당사자인 도진의 생각과 체감은 전혀 달랐다.

    '그러고 보니 변한 게 없네.'

    평범함과 한참 벗어나 있던 첫만남부터 지금까지.

    도진은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것처럼 자연스레 한유아와 친분을 쌓아왔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어떤 '선'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니까 지인들 중 손꼽힐 정도로 알고 지낸 시간이 길었음에도 서로의 울타리 안으로 상대를 들이지 않았다는 거다.

    계기다 없다? 그런 인위적인 문제가 아니라 좀 더 근본적인 문제다.

    한유아는 여전히 도진에게 단 한 번도 속내를 비친 적이 없다.

    그러니까 피상적인 관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탐나는 사람이긴 한데…….'

    한유아는 지극히 유능한 사람이라 내 사람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이보다 든든할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도진이 한유아를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과는 미묘하게 다르게, 한유아는 도진을 '심복이 되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차이는 지극히 크다.

    도진이 알고 있는 전생의, '미래의 한유아'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이 간극을 좁힐 수 없는 한 도진과 한유아의 사이 또한 더 좁혀질 수가 없었다.

    '어려운 일이네.'

    "갈까?"

    "네."

    그렇게 생각하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며, 도진은 한유아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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