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도진은 마중나온 나성보의 차를 타고 숭무경찰서로 향했다.
가는 길에 나성보가 그 직원, 정종호의 지인에게 들은 정보를 이야기해 주었다.
"홀어머니 밑에서 힘들게 자란 사람이더군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식당에서 일하며 힘들게 키운 게 정종호라고 했다.
형편이 좋지 않았기에 무림학교로의 진학은 엄두도 내지 못했고 대학 또한 가지 못했다.
그런 집안 환경을,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고 정종호는 오히려 빠르게 취직해 어서 돈을 벌고 싶어 했고 스펙을 따지지 않으면서 나쁘지 않은 보수를 약속하는 '그리드 디스크'에 취직했다고 한다.
"…취약 계층 가구에 컴퓨터와 인터넷을 지원하는 사업을 했었는데 그 덕분에 생긴 컴퓨터를 계기로 컴퓨터에 관심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공부도 꽤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쪽에 지원한 모양인데……."
그리드 디스크는 직원 '상시 모집'이었다.
왜 상시 모집인지는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사장이 양아진인 곳.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회사가 아니었으니 얼마 못 버티고 나가는 퇴사자가 많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약 정종호가 절박하거나 부당한 대우에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코가 꿰이기 전에 퇴사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정종호는 이를 악물고 버텨서 오히려 이런 곳이니 더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양아진과 엮이고 말았다.
그때부터가 지옥의 시작이었다.
온갖 부당하고 불합리한, 폭력이 동반된 대우.
그리고 그 대우 뒤에 주어지는 '치료비'가, 정종호를 옭아맸다.
"결국 참지 못한 정종호 씨는 증거를 차곡차곡 모아 신고를 결심했고 그냥 신고해서는 안 될 테니 이번 일을 계획한 것 같습니다."
담담히 풀어놓는 나성보의 이야기가 끝날 즈음 두 사람은 숭무경찰서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숭무경찰서 앞에는 토요일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그리고 도진의 신안에, 경찰서 입구의 광경이 들어왔다.
경찰들, 그리고 흑도의 쓰레기들로 보이는 양복 입은 자들이 입구를 봉쇄하고 있으며 그들의 기세가 입구 앞에 선 소수의 사람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인터넷에 정종호 씨의 이야기가 퍼지고 오늘 경찰서에 조사를 받는다는 이야기가 퍼지자 사람들이 몰려왔던 모양입니다. 한데 그것을 저쪽에서 '불법 시위를 위한 모임'으로 판단하고 만일에 대비해 경계한다는 명목으로 실력을 행사한 모양이더군요."
"…그랬군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될 수 있는 게 법이다.
양아진의 일에 분노하여 나온 사람들은 분명히 좋은 의도로 나왔을 테지만, 그것이 집단 행동으로 취급되어 저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을 거라고까진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그로 인해 이렇게 양아진에게 돈을 먹은 것들에 의해, 양아진을 위해 움직이는 양복 입은 흑도 찌꺼기들까지 가세하여 입구가 봉쇄된 것이다.
의도는 좋았으나 사태를 더 어렵게 만든 행위.
힘이 없는, 그리고 무턱대고 나서는 정의는 이렇게 오히려 역효과를 내곤 한다.
이런 이들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요즘 많은데 도진은 그런 목소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의도와 선의 자체는 분명히 틀리지 않았다고도 생각했다.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행동에 나서는 그들의 의지 자체는 분명히 옳은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당장 은근히 가해지는 압박에도 불구하고, 악의적으로 기사를 쓰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있는 '기레기'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허리가 굽은 노파를 지키듯 둘러싸며 서 있지 않은가.
"…갈까요?"
"그래야겠군요."
도진은 천천히 경찰서를 향해 걸었다.
걸어서, 가해지는 기세에 무너지는 노파를 붙잡았다.
우연히 이쪽에서 부딪친 것처럼 웃으며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그리고 노파를 단단히 지지하며 순수한 자연지기를 불어넣어 활기를 북돋았다.
젊은 시절의 고생으로 허리가 굽고 세상의 풍파에 푸석해진, 그러나 아들을 위해 이 자리에 선 노파의 두 눈을 마주한 뒤 도진은 고개를 들었다.
웃으면서 경찰들을 보며 말했다.
"길 좀 비키시죠?"
"……."
경찰들은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옆을 흘끔거렸다.
우습게도 판단을 바라며 흘끔거리는 시선의 끝에 있는 건 흑도의 찌꺼기들을 통솔하는 인물로 보였다.
도진은 그 자에게 기세를 일으켜 쏘아냈다.
"으헉!"
쿠당탕!!
마치 맹수가 목을 물어뜯기 위해 덮치는 듯한 감각에 그가 나자빠졌고 혼란이 일어났다.
"뭐, 뭐야!!"
경찰들이 화들짝 놀라 제압봉을 들었고 '경호원'들 또한 몽둥이를 들었다.
그만큼 도진이 일으킨 기세는 강렬했으며 그들이 지금 명분으로 삼고 있는 '위협 행위'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도진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흥분하지 않기 위해 지은 미소를 더 강렬하게 만들고선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꼭 뒷골목 양아치들이 시비를 거는 것 같은 기세가 자극하길래요."
노파에게 향하던 기세를 꼬집은 말이었다.
기세를 뿌리던 뒷골목 양아치들, 경호원들은 눈깔만 뒤룩뒤룩 굴렸다.
그들은 기세를 일으킨 순간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애송이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어디선가 본 얼굴이었고 학생이었다. 여기에 학생 같지 않은 엄청난 기세가 더해지니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이다.
그 학생, 잠룡 김도진이 나자빠진 경호원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제 탓이 아니지만 미안합니다. 아시잖아요. 무림인한테 그런 식으로 기세로 자극하면 반사적으로 공격할 수도 있는 거. 앞으로 좀 주의해 주세요."
"……."
너희는 무림인으로 취급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었지만 험상궂은 인상의 경호원은 대꾸하지 못했다.
본래 성질이 더러운 그는 그러나 감히 잠룡에게 발작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기에.
도진은 대꾸하지 않는 그의 손을 강제로 잡아 일으켰다.
그렇게 일어난 그에게 이번엔 함께 온, 넉넉한 인상의 50대 남자가 명함을 강제로 쥐어 주었다.
겉보기엔 위협적이지 않은데 강제로 명함을 쥐어 주는 손의 힘이 항거할 수 없을 만큼 대단했다.
"도진 학생의 법무를 맡고 있는 나성보입니다. 혹시 무언가 문제가 생기면 이쪽으로 연락 주시면 됩니다."
"……!!"
그가 마치 사신이라도 만난 것처럼 흠칫 놀라 물러섰다.
나성보. 그와 같은 흑도의 인물들에겐 정말로 사신이나 다름없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경찰들 또한 얼굴이 해쓱해졌다.
켕기는 일을 하고 있는 지금, 결코 마주해서는 안 되는 이름이었기에.
나성보는 해쓱해진 얼굴의 인물들을 한 명도 놓치지 않고 두 눈에 담았다.
그렇게 눈이 마주친 순간 그들은 직감했다.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정종호 씨 어머님 되시죠?"
"예, 예."
노파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도진의 손을 앙상한 양손으로 꼭 붙잡았다.
"함께 들어가실래요?"
"예, 예. 감사합니다."
"아뇨, 감사할 일은 아니에요."
대답하며 도진은 몸을 돌렸다.
어쩐지 좀, 화가 난다.
나성보와 함께 경찰서의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섰다.
정종호를 압박하던 내부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도진을 스쳐갔다.
도진은 당당하게 자리에 앉아 있던 양아진과 시선을 마주했다.
마음 속 살생부에 기입되어 있던, 연필로 슥슥 그어 두었던 양아진의 이름을 지우개로 문질렀다.
유성 매직으로 써 두었던 양아진의 이름이 깔끔하게 드러났고 도진의 웃음에 사나운 기세가 깃들었다.
아이들의 수준에 맞춰 했던 참교육으론 아쉬운 감이 있었다.
지금부터는 어른의 눈높이에 맞춘 진짜 참교육을 해 줄 시간이었다.
* * * *
-속보)양아진 대표 구속!
양아진 대표는 며칠 지나지 않아 구속되었다.
그 며칠 사이 혐의가 구르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정종호는 자신이 당한 일들에 대한 증거를 꼼꼼히 수집해 두었고 그것만으로도 양아진의 혐의를 입증하기엔 충분했는데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나성보는 일을 맡자마자 바로 양아진이 운영하던 웹하드 사이트부터 털었다.
불법적으로 업로드된 자료를 방치한 혐의를 물었고 이어서 회사의 자금을 유용한 것 또한 밝혀냈다.
다름 아닌 그가 살고 있던 숭무동의 집을 구매한 자금의 출처가 유용한 회삿돈이었던 것이다.
더불어 이렇게 유용한 자금의 흐름을 추적함으로써 양아진을 완전히 끝장낼 수 있는 것들을 찾아냈으니 마약의 구매였다.
마약은 관현 그룹 게이트 때 나왔던 바로 그 마약이었다.
양아진은 관현 그룹에서 흘러나온 마약을 다른 루트를 통하여 구매했고 그렇게 구매한 마약을 지역의 유지와 의원들에게 뇌물로 공급함으로써 영향력을 확대하고 여러 혐의를 미꾸라지처럼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었다.
나성보는 이렇게 꼬리가 잡힌 자들을 누구 하나 놓치지 않고 잡아 넣었다.
그렇게 단죄의 칼을 휘두르던 나성보는 이번 일에 정종호가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정종호 씨의 기술이 보통이 아니더군요. 회사의 컴퓨터를 해킹해서 결정적인 자료들을 모아 두었는데 그것을 저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덕분에 이렇게 꼬리를 자르기 전에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랬군요."
정종호는 관심만으론 일이 해결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때문에 또 하나의 무기를 준비해 두었으니 회사의 컴퓨터를 해킹하여 양아진이 저지른 부정 행위에 대한 증거를 수집해 두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양아진은 뇌물을 먹였던 자들과 함께 나락으로 가게 되었다.
여기에 공을 세운 정종호는…… 일자리를 잃었다.
더불어 벌금형을 선고 받았는데 어찌되었든 다른 곳도 아니고 숭무동의 CCTV 영상을 해킹하여 뿌린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회사의 컴퓨터를 해킹하여 자료를 뽑아내기까지 했으니 업계의 다른 곳에 취직하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
-와씨, 좀 안타깝네.
-그러게. 이런 걸 좀 유도리 있게 처리해주면 안 되나.
-그래도 잠룡이랑 당사자들이 괜찮다고 해 주고 나성보 변호사님이 잘 변호해 줘서 벌금으로 끝난 거긴 함.
사람들은 씁쓸한 맛이 남는 이야기에 안타까운 댓글들을 남겼고 누군가는 정종호를 자신들의 회사에 고용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가장 빠르게 움직인 사람이 있었으니.
"안 그래도 우리 회사에 그쪽 관련 기술 가진 사람이 필요했거든."
바로 나지윤이었다.
정보 회사의 아들인 나지윤은 정종호가 가진 기술을 발휘하기에 최적의 회사였던 것이다.
"사택도 제공해 드릴 거고 위험하지 않은 부서에 배치해 드릴 테니 그 부분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정종호는 도진과 함께 온 나지윤에게 깊이 허리를 숙여 감사했다.
그가 회사를 그만두지 못했던 커다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리드 디스크에서 제공하던 사택이었다.
회사를 나오게 되면서 당장 사택을 비워야 할 상황이 되어 난감한 처지였는데 나지윤이 그것을 해결해 주었으니 진심으로 감사했다.
-갓지윤! 갓지윤!
-여윽시 잠룡 패밀리다..
사람들은 사택까지 제공하며 정종호를 스카우트해 간 나지윤을 찬양했다.
"…정보 회사인데 이렇게 일이 알려져도 돼?"
도진은 그런 부분을 걱정하여 나지윤에게 물었지만.
"오히려 알려져서 더 이용하기 좋은 정보란 것도 있잖아?"
나지윤은 오히려 멋있게 웃어 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헬스장에서부터 비롯된 일은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11월.
도진이 유지은과 맞붙기로 했던 랭킹전이 성큼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