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도진의 회심의 한 수는 분명히 독고혁의 급소, 명치를 강타했다.
이곳은 현실이 아닌 심상세계이며 상대하고 있는 독고혁 또한 위지혁이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기에 거리낄 게 없었다.
때문에 단순히 어깨로 명치를 친 것이 아니라 천마기를 자제없이 때려박았는데 그것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독고혁이 아무렇지 않게 중얼거렸으니 도진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툭.
"……!"
가벼운 밀어내기에 도진의 몸이 주욱 밀려났다.
단순한 움직임에 고등 수법을 깃들인 한 수였다.
그렇게 밀려난 도진을 보며 위지혁이 씨익 웃었다.
"무엇을 놀라느냐. 네가 아무렇지 않게 일어났던 것처럼 혁이 또한 일어날 수 있는 게 아니겠느냐."
"…그렇군요."
스승의 말에 도진은 상황을 바로 이해했다.
그래, 이곳은 심상세계였다.
도진이 본래 죽었어야 할 상처를 아무렇지 않게 지우고 일어난 것처럼, 독고혁 또한 마찬가지의 조건이라는 뜻이었다.
동시에 이 '한판승'만으로는 특훈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았다.
훅!
자세를 잡는 순간 독고혁이 다시 몸을 날렸다.
운위의 묘리를 따르는 그 움직임은 신안으로 계속 보고 있음에도 여전히 읽을 수 없고 잡을 수 없는 빛무리와 같다.
본다고 해서 그것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 이것은 신안의 문제가 아니라 도진이 본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 도진이 대응조차 하지 못하고 당했던 것도 운위의 이런 특성 때문이었으니 천마군림을 통한 세계와의 연결로 확장된 감각이 아니었다면 대련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카앙!
이어서 휘둘러지는 성린소요검의 검로 또한 마찬가지다.
잡을 수 없는 빛무리의 일부가 쏘아지는 것처럼 대응이 어렵다.
추상적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공격. 그에 비해 날카로움만큼은 지독히 현실적이어서 도진은 거기에 담긴 '이치'를 읽고 대응해야만 했다.
…또한 그렇기에, 이치를 읽을 수 있었기에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무공을 무공으로써 구사하는 독고혁은 이치를 따라 움직임으로써 무공을 자아내는 도진과 근본적인 부분에서 격차가 있었고 그렇기에 경지의 높음에도 불구하고 도진에게 한 번 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격차는 안다고 해서 바로 메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초식을 버리란 것이 이런 뜻이었구나.
독고혁은 그렇게 말했다.
뜻을 안다면 무시무시한 소리였다.
초식을 버리라는 건 무협지에서 흔히 말하는 형(形)에 구애되지 않는 경지, 그러니까 무초식(無招式)의 경지다.
형을 '십이성대성'하여 완전히 깨닫고 자신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더 이상 거기에 구애받지 않을 수 있는 경지.
지금의 도진과는 반대로 무공을 무공으로써 완전히 터득하여 이치에 이른 형태다.
지극한 깨달음의 경지였고 당연히 아무나 이를 수 없는 지고의 경지다.
무림인이라면 다 알고 배우는 것이었으나 안다고 해서 다 할 수 있다면 어떤 그림을 잘 그리는 아저씨의 '참 쉽죠?'란 말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슥-!
독고혁의 검이 가로로 그어진다.
당연히 단순한 검이 아니며 이것은 중단을 노리다 거짓말처럼 하단을 베는 검이 된다.
비결은 뻗은 손을 그대로 두고 허리를 교묘히 움직이면서 동시에 무게를 뒤로 뻗는 다리로 옮기어 자세를 낮추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까와 마찬가지로 검을 강하게 내리침으로써 아래로 향하는 힘을 역이용함으로써 유리하게 대처할 수 있다.
말은 쉽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이야기였다.
평범한 무인은 그 '구조'를 수백 번 보거나 당해도 결코 간파할 수 없을 것이었으며 알려준다 해도 이해하지 못할 만큼 지극한 기술들의 연계이자 정수가 이 초식이었기에.
힘을 역이용하는 것 또한 아득해질 만큼의 정교하고도 정확한 내공 운용을 요구한다.
가령 스마트폰을 이용할 때 여기서는 닫기 버튼을 눌러야 하고 여기서는 어디를 눌러야 어느 기능을 실행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을 '모든 상황에 맞게' 일일이 행동을 지정하는 게 초식이고 본능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게 '이치'다.
그야말로 상황을 꿰뚫는 근본적인 부분을 추구하는, 볼 수 있는 신안을 가지고 이치를 행하는 도진이기에 가능한 묘기였다.
상황에 맞는 동작을 일일이 행해야 하는 독고혁은 따라올 수 없는 영역.
그렇기에 도진은 다시 한 번 승리할 거라 예상했으나.
카칵!
"……!"
그 예상은 빗나갔다.
놀랍게도 독고혁이 그 찰나에 정해진 초식의 형(形)을, 틀을 깨고 검로를 바꾸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틀을 깨기만 해선 초식에 담긴 이치가 어그러진다.
하지만 독고혁은 그 이치를 담으면서도 이치를 구현하는 형, 초식을 바꾸어냈다.
도진의 백설이 칼날에 미끄러져 검로가 틀어진 순간 독고혁은 빗겨내며 생긴 힘을 고스란히 이용하여 한 바퀴 몸을 회전시켜 증폭, 그대로 휘둘렀다.
스각!
도진은 그 검을 완전히 피하지 못하고 팔뚝을 베였다.
얕지 않은 상처. 피가 흩날렸으나 그것은 도진에게 있어 큰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독고혁의 '발전'이 가져다 준 충격이다.
'…발전했어.'
안다고 해서 다 할 수는 없다.
그게 가능했다면 사람은 벌써 신의 영역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알게 된 것을 바로 실행하는 인간이 눈앞에 있었다.
일상에 비유하자면 스마트폰 사용법을 모르던 할아버지가 설명 한 번으로 젊은 사람 수준으로 스마트폰을 다루는 걸 본다면 이러할까 싶은 상황이다.
독고혁. 천무지체를 타고난 천재 중의 천재.
그는 그야말로 도진의 상식에서 벗어난 천재였음을 지금 체감했다.
대번에 무초식의 경지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
카캉!
허나 알게 된 것을 조금씩 체득할 정도는 되었고 거기에 실시간으로 익숙해지고 있다는 걸 지금의 대련으로, 신안과 몸으로 생생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이치를, 독고혁의 성린소요검의 부족한 부분을 파고드는 도진의 검이 오히려 독고혁의 발전을 재촉하고 있었다.
도진의 우위가 실시간으로 지워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직 완벽하지 않았으나 마찬가지로 도진 또한 '최선'을 찌를 수 없었기에 서로의 차선이 상쇄되었고 본래의 격차가 남게 되었다.
카캉!
도진이 이를 악물었다.
'아직이야.'
하나의 무기가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번에 무릎 꿇을 만큼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도진은 포기하지 않고 이길 수 있는 길을 찾았고, 이내 또 하나의 답을 이끌어냈다.
카카캉!
"……!"
도진의 공세가 강해졌다.
이치를 따르던 고요한 기세가 갑자기 태풍을 만난 바다처럼 거세진 것이다.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이는 도진의 공세에 독고혁은 내공을 더욱 끌어올려 맞섰다.
콰과과광!!
대련은 아낌없이 내공을 쏟아붓는 힘 대 힘의 대결 양상이 되었고 독고혁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이것은 자멸이었다.
제아무리 후기지수를 넘어선 무공 실력을 가졌다 해도 내공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이것은 온갖 영약과 벌모세수의 혜택을 받고 천무지체를 가졌으며 검성의 무공을 익힌 독고혁 또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허나 독고혁은 그 한계가 또래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높았으니 그를 상대로 '내공 싸움'을 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보통이라면 그럴 것이었다.
콰앙!
"……!"
하지만 도진은 아니었다.
점점 더 거세게 독고혁을 몰아붙이는 도진의 내공이 마를 일은 없었다.
도진이 구사하는 것이 바로 천마군림이었기에.
자연과 일체화하여 그 힘을 행사하는 천마군림 사용자의 내공이 마를 일은 결코 없다.
독고혁이 제아무리 또래에서 독보적인 내공을 지녔다 해도 자연을 넘어설 수는 없었으니 먼저 지치는 건 독고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콰앙!
"컥!"
결국 힘에서 밀린 독고혁이 무너졌다.
두웅-!
이어서 백설에 막대한 천마기의 기운이 담기더니.
쿠오오오오오-!!
효아의 포효하는 이빨이 독고혁을 휩쓸었다.
"허억, 허억."
도진이 숨을 몰아쉬었다.
또다시 '한판승'이었다. 쉽지 않았던.
천마군림을 구사하는 도진의 내공은 마르지 않는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출력'이 무한한 건 아니었으며 매개가 되는 도진의 육체에 한계가 있었다.
그러니까 방수 처리가 된 종이 수도꼭지 같은 것이다.
물을 계속 끌어올 수 있지만 감당할 수 있는 수압에 한계가 있으며 무리를 하면 방수 처리에도 한계가 와 이내 수도꼭지 자체가 녹아 버리는.
이번은 그 한계가 이르기 전에 가까스로 승리할 수 있었다.
이치를 따르던 것과는 정반대의, 난폭한 힘을 이용한 승리였다.
"그렇군. 최선이 언제나 최선일 수는 없는 것이로군."
…그리고 패배한 독고혁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또 깨달음을 중얼거렸다.
툭.
도진은 다시 한 번 독고혁의 손에 뒤로 밀려났다.
그리고 세 번째 대련이 시작되었다.
이번엔 도진이 선공을 취했다.
칵!
"……!"
시작부터 막대한 내공이 담긴 도진의 한 수를 독고혁은 정면에서 받지 않았다.
신묘한 검놀림으로 빗겨내 도진의 자세를 무너뜨리곤 대번에 허리를 베어 버렸다.
단 한 수에 패배하고 말았다.
팍!
도진은 멍하니 있지 않고 거리를 벌렸다 다시 공격했다.
아까의 우격다짐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과한 힘을 쏟아선 안 된다.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수준으로, 그러나 가볍지 않은 공격을 계속하여 독고혁을 깎아낸다.
체력은 물론이요 정신력과 내공은 이쪽이 우위에 있다.
그런 계산 하에 신중하면서도 묵직한 검을 계속해서 쏟아냈다.
카칵. 칵.
독고혁은 그런 도진의 검을 결코 정면에서 맞상대하지 않았다.
교묘하게 빗겨내고, 피하고, 오히려 역이용하여 되돌려줌으로써 도진의 소모를 유도했다.
그것은 개미굴에서 유지은이 마두를 상대할 때 보여 주었던 수법을 닮아 있었으며 그 이상으로 높은 경지의 것이었다.
독고혁은 초식을 틀에 박힌 형태로 구사하지 않았고 그 힘의 가감에도 변화를 주기 시작하여 자신의 체력과 내공을 온존하고 일방적으로 도진의 손해와 소모를 유도하기 시작했다.
조금 파탄이 나 손해를 보더라도 도진이 조금 더 손해를 보면 된다.
그런 식의 '융통성'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오히려 장기전으로 끌고 가 도진의 자멸을 유도하는 것이다.
도진은 그것을 알면서도 상황을 타개할 방도를 찾지 못했다.
도진에게는 안다고 해서 대번에 그것을 타개할 수법을 찾을 정도의, 혹은 발전할 정도의 재능이 없었으니까.
오히려 도진을 상대하는 독고혁의 수법이 점점 더 정교해지고 있었다.
까득.
도진이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는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기만 할 뿐이다.
그렇다면 도진으로선 좀 더 파격적인, 틀을 깰 수 있는 수법이 필요했으며 다행히 아직 하나가 남아 있었다.
두웅-!
"……!"
독고혁의 눈이 커졌다.
도진의 기세가 갑자기 폭증했기 때문이다.
오오오오오오-!!
그것은 지금껏 억누르고 있던, 5성을 향해 가고 있던 천마기의 진면모였다.
퍼걱!
피부가 터지고 피가 솟구친다.
목줄을 완전히 놓아 버린, 괴물이 되어 버린 천마기가 도진의 몸마저 공격하는 것이다.
오래는 지속하지 못할 과출력. 그러나 짧은 순간만으로도 충분하다.
지금의 구도를 완전히 뒤엎어 버릴 막대한 힘으로 단번에 승부를 결정짓는다.
그렇게 마음 먹은 도진이 폭주하는 천마기를 휘감고 쇄도했다.
콰아아앙!
휘둘러진 도진의 검을 독고혁은 완전히 흘려내지 못했다.
흘려내지 못한 천마기는 독고혁을 뒤흔들었고 그렇게 생긴 작은 파탄을 도진은 놓치지 않고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콰아앙! 콰앙! 콰아아아앙!!
연신 폭음이 터지고 흉포한 천마기는 독고혁을 찢어발기기 위해 휘몰아친다.
"……."
위지혁은 그것을 가라앉은 눈으로 지켜보았다.
본래 저것은 자살행위였다.
이곳이 심상세계이기에 시도할 수 있는 수법이요, 본래는 '반칙'이라 해야 할 수단이다.
허나 위지혁은 그것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고, 그저 결과를 기다렸고.
"커헉."
이내 천재를 따라잡지 못한 도진의 패배로 '한 판'이 끝나고서야 천천히 다가가 제자를 내려다보았다.
폭주하는 천마기를 어떻게든 다잡아 이치의 영역에서 구사한 도진은 육체는 물론이요 정신력까지 고갈되어 있었다.
그리고 패배에, 단순히 지친 게 아니라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고 꺾이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제아무리 달려도, 심장이 터질 듯 달려도 따라잡기는커녕 점점 멀어지고 마는 천재의 등에.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제자를 내려다보며 위지혁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일어날 수 있겠느냐."
평소의 장난기가 지워진 위지혁의 목소리가 내려앉는다.
그 목소리가 닿은 도진의 피에 절은 눈꺼풀이 열리고.
"당연히 일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스승님."
형형히 빛나는 눈동자가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