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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203화 (203/741)
  • 202화

    -흑도 조직의 해당 거점은 붕괴, 현장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토벌대의 무인들과 실습을 진행한 학생들을 포함하여 오십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해……

    토벌 작전은 전생과 마찬가지로 실패했다.

    개미굴은 무너졌고 증거를 제대로 수집하지 못했으며 잔챙이를 제외한 조직원 대부분이 빠져나갔다.

    허나, 같은 실패라도 전생에 비해서는 나은 결과가 나왔다.

    스물일곱 명이 죽고 서른두 명은 은퇴해야 할 정도의 부상을 입고 말았지만, 그래도 전생에 비하면 죽은 사람이 반으로 줄었다.

    학생들의 희생 또한, 네 명으로 줄었다.

    추가 투입조와 함께 움직이던 학생들도 함정으로 인해 바로 탈출하지 못하고 개미파의 무인들과 마주했지만 바로 그 추가 투입조 덕분에 희생을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날 도진 덕분에 목숨을 건진 타격대의 부대장은 깊숙이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시했다.

    "고마워. 은혜는 잊지 않을게."

    도진과 함께 했던 다섯 명의 2학년 선배들 역시 거듭 고개를 숙여 감사를 전했다.

    도진은 그 감사 인사로 위험을 감수했던 오지랖이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생각했다.

    생각보다 위험했고 사서 목숨의 위기를 겪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충분히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허나 위지혁은 그렇게 말했고 도진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도진은 현대인이지만 동시에 무림인이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도진이 살아가야 할 세계였고 그 세계에서 하고자 했던 일을 관철해낸 경험으로써 앞으로의 좋은 양분이 될 것이었으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꼭 연락 주십시오. 힘 닿는 한 돕겠습니다."

    여기에 무림 전담 타격대 부대장과의 인맥이 생겼으며 신변 보호를 위해 보도하지 않았지만 도진이 무려 간부를 생포하고 희생자들을 구해낸 것까지 공적으로 인정받았으니 이제 잠룡은 학생의 영역이 아니라 정부와 무림에서도 무시 못 할 이름이 되어 현실적인 이득도 적지 않았다.

    당장 무림 전담 타격대라고 하면 무림과 관련된 정부측 조직 실무자로는 한 손에 꼽을 만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금전적인 부분에서는 보수로 3500만원을 받았는데 '학생의 실습'으로 받은 금액으로는 역대급이었다.

    정부 주도로 한, 그리 위험하지 않다 판단한 토벌 작전이라 안 그래도 단가가 낮은 상황에서 엄밀히 파고들면 '돈을 내고' 참여하는 게 학생들의 육식계 실습이었다.

    검봉의 인맥으로 참여한 도진 또한 위험 수당을 포함하여 150만원이 보수였는데 토벌에서의 활약에 더해 알려지지 않았던 흑도의 고수를 생포함으로써 추가 수당이 나온 것이었다.

    흉악범이긴 하나 학생에 불과했던 송재익과 달리 이쪽은 그야말로 사회의 실질적인 위협인 '마두'였으니 금액부터가 달랐다.

    -무림맹은 이번 일에 대해 전담팀을 구성하여 정부와 긴밀히 협조하여 적극 대응할 것을…….

    그렇게 여러가지 이득이 남은 사건은 도진의 관여로 인해 전생과 달리 널리 알려졌으며 그로 인해 사건의 전개도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허나 아직 학생인 도진의 손을 떠난 일이었기에 도진은 그 일에 대한 관심을 한 켠에 미뤄두고 해야 할 일을 했다.

    방과 후.

    도진은 집행부 활동까지 마치고 교내의 병원을 방문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시설과 의료진을 자랑함에도 불구하고 유명무실하다는 평가를 받는 아이러니한 숭무고 내의 병원을 도진이 찾은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어서 와."

    바로 이곳에 토벌에 참여했다 부상을 입은 검봉 유지은이 입원해 있었기 때문이다.

    7층의 1인실 침대에 앉은 유지은은 상체 전체에 붕대를 감고 있었으며 심지어 머리 또한 붕대를 감았고 얼굴에는 반창고를 붙였다.

    그날 도진이 사지의 힘줄을 끊고 이빨까지 모조리 박살냈던 간부의 난폭한 검풍에 입은 상처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우며 넓은 1인실에는 그렇게 다친 유지은만이 있었다.

    정의검가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후기지수이지만 반대로 배척받는 유지은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함이 남는 광경이었다.

    "상처는 흉터가 남지는 않을 거래."

    "다행이네요."

    "응."

    말과 달리 유지은은 그리 신경쓰지 않는 기색이다.

    그녀에게 있어 타고 난 것을 무공으로 꽃 피운 외모 또한 그리 가치가 없었기에.

    그리고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이 가치 없어진 유지은이 힘없이 침대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아무것도 안 남았네."

    "선배가요?"

    "응."

    유지은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도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한텐 무공밖에 없는데, 그 무공이 쓸모가 없었잖아. 그러니까 이제 나한텐 남은 게 없지."

    누구나가 입을 모아 희대의 천재라고 했다.

    그래서 유지은은 스스로가 희대의 천재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그저 '조금 더 무공을 잘하는 아이'였던 것 뿐이었다.

    스스로가 그 정도에 불과했음을 그녀는 이번 토벌로 뼈저리게 깨달았다.

    안전한 보호 아래 남들보다 조금 더 잘하는 것을 조금 더 잘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 안전한 보호가 보장되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못한다.

    정말로 위기가 닥쳤을 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인 것이다.

    공포를 몰랐다.

    남들이 그 공포와 싸우며 칼을 휘두를 때 나는 그 공포를 모르고 겁없이 날뛰던 것 뿐이었다.

    그런 생각들이 유지은의 머릿속을 채웠다.

    "이제 정말 모르겠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그나마 무공이라도 가지고 있었다.

    목표없이 하루하루 '죽어가는' 삶이었지만 그래도 무공은 특출나니까 아무것도 아닌 삶은 아니라고 스스로 위안 삼아 왔는데 그것마저 아무것도 아니란 걸 깨달은 그녀는 토벌에서처럼, 자기도 모르게 답을 찾아주길 바라며 그렇게 읊조렸다.

    그런 그녀의 두 눈을 마주하며 도진은 말했다.

    "하고 싶은 걸 하면 되죠."

    "…그게 없잖아."

    당연한 대답에 유지은은 아이가 토라지듯 뾰족하게 말했다.

    도진이 웃었다.

    "선배. 밥 할 줄 알아요?"

    "……어?"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몸은 반사적으로 대답을 했다.

    "몰라."

    "아니 나이가 몇인데 밥도 할 줄 몰라요? 그래가지고 무슨 일 생겼을 때 밥 먹고 살겠어요?"

    "…무슨 소리야, 그게."

    "라면은 끓일 줄 알아요?"

    "그 정돈 할 줄 알아!"

    "그건 다행이네요."

    이게 무슨 대화인지 모르겠다.

    그런 얼굴의 유지은을 보며 도진은 피식 웃었다.

    "선배. 무언가 하고 싶은 걸, 목표가 될 만한 걸 찾고 싶은 거죠?"

    갑작스레 핵심을 꿰뚫는 물음에 유지은의 두 눈이 조금 커졌다.

    "……응."

    "그런데 그게 찾아지지가 않아서, 정작 잘하는 무공은 목표가 될 수 없어서 고민하고 있었죠?"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뭐, 아는 분이 아는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이 있어서요."

    슬며시, 잠시 시선을 피했다가 다시 눈을 마주하며 도진이 말했다.

    "선배. 걱정을 대출받아서 하지 마요."

    "대출?"

    "네. 대출이요. 선배는 지금 그냥 대출도 아니고 아주 인생 전체의 걱정을 대출받아 하니까 힘든 거예요. 대출할 필요도 없는 걸."

    도진이 의자를 끌어 거리를 좁히고선 말했다.

    "살면서 무얼 해야 할지, 무얼 목표로 삼아야 할지는 중요한 문제지만 그걸 굳이 지금 확정해야 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요. 그건 조금 일찍 찾을 수도 있지만 조금 늦게 찾을 수도 있는 일이니까요. 그걸 조금 늦게 찾는다고 해서 문제가 되진 않을 거예요. 적어도 선배에게는요."

    "……."

    "이제 겨우 열여덟밖에 안 됐으면서 뭐가 그렇게 급해요? 아직 새파란 젊은 나이에 말이에요."

    "넌 나보다 어리면서."

    "어허. 좋은 말씀 하고 있는데 말대꾸하지 마요."

    "……."

    그녀가 불만스런 얼굴이 되었다.

    도진은 다시 피식 웃고선 말했다.

    "선배는 아직 밥하는 법도 모르고 라면은 끓일 줄 알지만 된장찌개는 끓일 줄 모를 테고 그것 말고도 아마 아직 모르고 서툰 게 많을 거예요."

    "……."

    "의미없다 생각하지 말고 하나둘씩 그런 걸 배워 봐요. 이름을 불러 주어야만 꽃이 되는 것처럼, 선배가 의미를 가져야만 의미가 되는 것들이 있으니까요. 그렇게 의미를 늘려가다보면 그중에 선배의 삶의 의미가 되는 것을 찾을 수도 있을 거예요."

    눈을 마주한 채 도진이 미소지었다.

    "아직 어린 선배에게는 너무 어려운 이야기였나요?"

    "…아니거든. 무슨 뜻인지 알거든. 나 천재거든."

    "하하. 그랬죠. 선배는 어린 천재였죠."

    유지은이 깊은 두 눈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김도진."

    "네, 선배. 갑자기 왜 이름 불러요?"

    "이름을 불러 주면 꽃이 된다면서."

    "……."

    "앞으로 당분간 네가 내 꽃이야."

    "헐."

    * * * *

    유지은은 며칠 지나지 않아 퇴원했다.

    고대 무림 시절의 무공을 익히고 그 경지가 높은 무림인답게 엄청난 회복력으로 며칠 만에 회복한 것이다.

    비록 군데군데 반창고를 붙이긴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수업을 들었으며.

    "후배!"

    토벌 전과 다름없이 도진의 주위를 맴돌았다.

    허나 모든 것이 그대로인 건 아니었다.

    "안녕."

    "네, 안녕하세요."

    싱긋 웃으며 도진의 친구들에게 유지은이 인사했다.

    그녀는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높은 곳에 올라 높고 먼 곳만을 보던 그녀가 의식하여 아래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시야를 넓히는 건 중요한 일이다. 하늘을 목표로 한다고 하나 사람은 땅을 딛고 살아가지. 아래를 볼 줄 모르면 언제고 파탄이 나는 법이다.

    위지혁의 깨달음이 묻어나는 말에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을 목표로 하는 사람은 땅을 딛고 걷는다.

    화두(話頭)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화두를 유지은은 염두에 두기 시작한 듯 보였다.

    "나도 같이 점심 먹어도 돼?"

    "네, 같이 먹어요."

    어색하던 사이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특히 주정아가 주도하여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다.

    집행부에서의 분위기도 좋아졌는데, 달라진 유지은의 태도를 한유아와 민지서가 몰라볼 수 없었고 그것이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낸 것이다.

    '잘 됐네.'

    미래에, 유지은은 집행부 동기들과도 거리를 두었었다.

    아마도 이번 생에서는 그러지 않을 거라고 도진은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늦은 밤.

    도진은 오늘도 어김없이 치킨을 뜯고 있었다.

    공용 식당에서, 그것도 늦은 밤에 혼자 치킨을 세 마리는 뜯는 도진의 모습은 이제 명물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는데 물론 괜히 그러는 게 아니었다.

    연신극기공으로 인해 자극 받은 몸은 그야말로 가슴에 구멍이 뚫린 듯한 허기를 동반한다.

    내외로 자극이 가해져 진화하는 육체는 그만큼의 에너지를 요구하니까 말이다.

    잠들기 전이기에 특히 연신극기공의 강도를 높이니 육체가 요구하는 에너지는 오히려 치킨 세 마리로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가끔은 치떡, 그러니까 치킨에 떡볶이를 곁들이기도 하는데 오늘은 그 푸짐한 식탁에 한 명의 게스트가 추가되었으니 다름 아닌 유지은이었다.

    "와, 후배. 진짜로 많이 먹는구나."

    "한창 클 때잖아요. 많이 먹어야죠."

    "음……."

    유지은은 무언가 대꾸하고 싶은 얼굴이었지만 막상 반박하려니 할 말이 없어 입술을 우물거렸다.

    당장 도진은 고등반에 오르고 나서만 5cm가 컸다.

    도진은 피식 웃고선 말했다.

    "이게 요즘 유행하는 로제 떡볶이래요. 먹어볼래요?"

    "응."

    유지은은 사양하지 않고 젓가락을 들었다.

    도진이 말한 '의미'를 찾기 위해 요즘 그녀는 적극적으로 몰랐던 것들, 안 해 봤던 것들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물거리며 떡볶이를 삼킨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맛있네."

    "역시 선배도 요즘 아이 입맛이네요."

    도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고선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가리켰다.

    "소스 묻었어요."

    도진의 지적에 유지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거짓말하지 마."

    "아, 이걸 안 속으시네."

    "두 번 당할 정도로 바보 아니거든?"

    도진은 일부러 유지은에게 장난을 걸곤 했는데 역시나 천재라 그런지 같은 수법에 두 번을 속질 않았다.

    그런 식으로 가벼운 분위기 속에 야식을 즐기던 중 유지은이 물었다.

    "이번 주말엔 뭐 해?"

    벌써 다음 주말이 돌아왔다.

    도진은 유지은의 물음에 일정을 떠올리며 답했다.

    "헬스장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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