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199화 (199/741)
  • 198화

    "……."

    토벌대와 고립된 학생들은 도진을 필두로 하여 최대한 소리와 기척을 줄인 채 걷고 있었다.

    그 학생들의 뒤에서 걸으며, 유지은은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깊은 두 눈동자에 도진을 담고 있었다.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도진의 말에 유지은은 물었다.

    '왜?'

    '여기 있는 게 더 위험할 것 같아서요.'

    그러면서 설명을 해 주었다.

    '보통 미아가 된 아이가 하면 가장 좋을 행동으로는 가만히 있기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래야 부모가 아이를 잃었던 지점 근처를 찾다가 만날 확률이 가장 높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번은 경우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해요.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건 거기가 안전할 때인데 지금 미아가 된 우리가 있는 이곳은 안전하지 않으니까요.'

    처음 벽이 토벌대를 분단할 때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일련의 함정은 마치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처럼 발동하였고 흑도의 무인들이 나타났다.

    이것을 생각하면 이 일을 벌이고 있는 자들은 토벌대는 물론이요 학생들까지도, 당장 지금도 감시를 하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쿠르르르르-

    여기에 간헐적으로 계속되는 진동.

    개미굴이 붕괴할지 모른다는 위험성은 지금 그 어떤 것보다 위협적인 요소였으며 만약 무너진다면 완전히 끝장이었다.

    '그러니까 차라리 움직여서 떨어진 토벌대 분들을 찾든 탈출구를 찾든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

    유지은은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도진의 말은 분명히 설득력이 있었지만 반대로 불안 요소도 컸으니까.

    어찌되었든 소수의 학생들만으로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위험을 찾아가는 것이라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도진은 유지은의 깊은 눈동자에서 그런 생각을 읽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확실한 건 없죠.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구요. 하지만 선배,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최선을 선택할 수 없다면 차선을, 선 자체를 선택할 수 없다면 하다못해 차악이라도 선택해야 한다구요.'

    '차악.'

    '네.'

    차악(次惡). 그녀에겐 생소한 단어였다.

    그녀에겐 언제나 최선(最先)이 따라붙었으니까.

    한데 지금 그 생소하고도 낯선 단어가, 마치 새로운 의미와 함께 온 깨달음처럼 와 닿았다.

    최선의 답을 도출해낼 수 없었기에 멈춰 있던 그녀와 달리 도진은 차악을 선택하고 결론을 내렸다.

    그 의미와 깨달음이 계속해서 머물며 도진의 존재감을 키워 나갔다.

    유지은은 천재였기에 이제는 분명하게,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녀가 공포감을 느꼈던 이유부터 순간 도진의 존재를 잊었던 이유까지도.

    '무섭다는 걸 몰랐어.'

    지금껏 그녀는 압도적인 천재성으로 인해 모든 것이 쉬웠고 간단했다.

    때문에 그녀는 스스로 '아직 익숙하지 않을 뿐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에 매몰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스스로가 '온실 속의 화초'였다는 걸 자각했다.

    모든 게 쉽고 간단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가 쉽고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일만을, 그것도 안전한 보호 아래 해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순간, '당장 할 수 없는 위험한 일'과 맞닥뜨렸을 때 공포감에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 공포감이 침착하게 생각했으면 풀 수 있었던 일조차 대처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한데 도진은 어떤가.

    은연중 그녀는 도진을 한 수 아래로 생각하고 있었다.

    도진의 무공 실력은 그녀로서도 완벽하게 파악해낼 수 없었다.

    '모르는 것'이기에, 그래서 도진은 그녀의 흑백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색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어디까지나 '그녀의 세계 안에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모르지만 결국 나보다 못할 것이다.

    그래서 대련을 하자고 말하지 못했다.

    대련을 해 버리면, 결국 도진의 모든 것을 파악해 버리고 몰랐던 것을 알게 되며 색이 꺼져 버릴 것 같아서.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자만이었다.

    유지은이 공포에 굳었을 때 도진은 이미 대처를 하고 있었다.

    자신만이 아니라 주변까지 살피면서.

    그녀가 자신 있게, 여보란 듯 구사하던 검풍을 아무렇지 않게 구사하며 다른 학생들을 지켰다.

    두려울 것 하나 없다는 듯 행동했으면서도 정작 보호가 사라지자, 방향을 가리키던 이정표가 사라지자 우두커니 서서 어쩔 줄 몰랐던 자신과 달리 최선이 안 되면 차악이라도 선택해야 한다며 망설임없이 선두에 섰다.

    그 모든 것이 그녀의 세계 안에는 없는 것이었다.

    그래, 도진은 차라리 그녀의 세계 바깥에서 그녀의 세계에 빛을 비춰주는 존재에 가까웠다.

    몰랐던 것을 비춰주는 그런 빛을 내리쬐는, 닿을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져 버렸다.

    선두를 걷는 도진은 그런 유지은의 복잡한 감정이 담긴 시선을 느끼면서도 한 켠으로 미뤄두며 현실에 집중했다.

    우두커니 서 있어선 안 된다 판단했기에 선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차악이라도 선택하자는 생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하진 않았지만 그 '차악'의 판단 기준에는 스승 장호의 조언도 있었다.

    -진법조차 적용되지 않았으니 길을 읽을 수 있다.

    사람인 이상, 그리고 '구조물'인 이상 일정한 법칙이 있으며 구조를 읽음으로써 길의 추론이 가능하다.

    고대 무림엔 그렇게 구조를 읽히는 걸 막기 위해 사람의 감각을 현혹하는 진법 등을 설치하곤 했지만 현대에선 그런 진법이 등장하지 않았다.

    진법을 대신하듯 첨단 과학 기술이 적용되었고 그런 기술에 대해선 알지 못했기에, 도진 또한 접한 적이 없었기에 장호는 벽을 쏘아내는 함정 등은 잡아내지 못했으나 '원시적인 구조'인 개미굴의 구조만큼은 어느 정도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감시 카메라는 멈추었구나.

    -예.

    추측했던 대로 요소요소엔 감시 카메라가 숨겨져 있었다.

    감시 카메라를 알고 있었던 장호는 대번에 정교하게 숨겨져 있었던 감시 카메라를 찾아냈고 다행히 그것이 꺼져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토벌대와 학생들을 감시하던 카메라의 기능이 정지했다.

    여기에 바깥으로 이어지는 길을 걷고 있음에도 흑도 무인들이 더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몇 가지 요소를 더해 추론해보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

    -놈들은 이미 대부분이 탈출했다.

    함정을 발동하여 토벌대를 갈라놓고 외부의 시선까지 잡아 두어 시간을 끄는 사이 놈들은 챙길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챙겨 탈출하기 시작했다.

    쿠르르르-

    그리고 그 작업이 모두 완료 되었을 때, 이 개미굴을 무너뜨려 증거를 파묻어 버릴 것이었다.

    그것을 다시 파낸다 해도 이렇다 할 만한 증거는 챙기지 못할 테고, 토벌대의 시신만을 겨우 수습하게 만들 작정이다.

    전생에서 본 위키에는 이렇게 개미굴이 붕괴했다는 기록은 없었다.

    하지만 그 기록은 이 시점에선 크게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현생의 사건이 전생과 무조건 일치하지 않는다는 건 이미 몇 번이나 경험했으니까.

    무수한 우연이란 톱니바퀴의 조합에 따라 사건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었고 이번 토벌의 톱니바퀴는 너무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러니 전생의 기억은 이제 참고로만 도움이 될 뿐 그 이상의 의미가 되지 못한다.

    -저쪽이다.

    드러난 통로는 여러 개의 갈래길이 나타났으나 도진은 장호의 조언에 따라 거침없이 걸어 나갔다.

    -좌측은 사람이 드나든 흔적이 희미하다. 함정으로 만들었으나 드나들 일이 관리할 때 말고는 없으니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이동하며 장호는 간결하게 판단의 근거를 알려줌으로써 제자를 가르쳤다.

    도진은 그것을 잊지 않고 새기며 나아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귀를 때리는 소름끼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아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아!!

    "……."

    도진과 유지은이 동시에 멈춰섰다.

    그 사이에 있던 숭무영재고의 학생들은 이유도 모른 채 흠칫 놀라 무기를 불끈 쥐었다.

    도진이 섭음술을 사용하여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비명 소리입니다."

    "……!!"

    -산 채로 해체하고 있구나.

    그 비명소리는, 일찍이 본 기억이 있는 광경을 만들어내는 소리였다.

    "…어떡할 거야?"

    유지은이 도진을 보며 물었다.

    도진은 생각했다.

    도기로서의 도진은 당연히 지금 일어나는 일을 막고 싶었으며 그 잔혹한 짓거리를 하는 자들을 징치하고 싶었다.

    허나 감정만으로 달려드는 건 그 의도만이 좋았을 뿐 더 나쁜 결과를 이끌어낼 수도 있는 행위다.

    당장 지금, 만약 저곳에 감당할 수 있는 적이 있다면?

    고깃덩이가 될 희생자를 더 늘리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이성적으로 판단한다면 차라리 저들이 모두 떠난 뒤 이동하는 것이 희생자를 더 늘리지 않는 것이다.

    선(善)은 착한 것이지만 선행(善行)으로 인한 과정과 결과가 항상 옳은 것이 되지는 않는다.

    도진은 그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실행할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기였기에 도진은 할 수 있다면 선을 행하고 싶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요. 앞을 확인하고 올게요."

    "같이 가."

    학생들의 눈빛이 불안해졌고 유지은이 함께 가자고 말했지만 도진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선배는 은신할 줄 모르잖아요."

    "……."

    유지은은 천재였지만 모르는 것마저 알 수 있는 능력은 없었다.

    도진은 안심시키려는 듯 옅게 웃으며 말했다.

    "아마 지금 흑도 놈들 대부분은 탈출한 거 같은데 소리가 들린다는 건 우리가 출구에 가까운, 올바른 방향으로 왔다는 거겠죠. 하지만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해요. 감당할 수 없는 게 앞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제가 몰래 확인하고 올게요."

    숭무영재고 학생들도 보았다.

    도진이 신출귀몰하게 움직이는 것을.

    유지은은 그것이 그녀마저 파악할 수 없을 만큼 고도의 은신술이자 잠행술이라는 것까지도 알았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최선이 안 되니 차악.

    이번에도 그 말대로였다.

    도진은 유지은과 학생들을 남겨두고 무흔잠영을 최대한 펼쳐 움직였다.

    지금 중요한 건 '시선'이 아니라 '기척'이다.

    점과 점을 잇는 건 무흔잠영의 근본이자 오의이지만 오롯이 구사할 수 없는 지금 도진은 선택과 집중을 해야 했고 그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할 것이 기척이었다.

    가는 길에 사람은 없다.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 자신을 감추고 거기서 더 나아가 주변과 동화하는 데에 배운 모든 것을 최대한 발휘했다.

    그래서 조금 느린 속도로 움직여야 했지만 다행히 도진은 불이 환히 밝혀진 넓은 공동 앞 그늘까지 들키지 않고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

    공동 안에선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었다.

    마취조차 하지 않고 무인들을, 아이들을 해체하는 현실 같지 않은 일이 자행되고 있다.

    그것을 실행하고 있는 악마들은 마치 도축업자처럼 해체한 것들을 밀봉하여 담았다.

    그렇게 곁에 둔 아이스박스가 채워지자 귀신 가면을 쓴 무인이 들어 반대편에 난 길로 사라졌다.

    출구였다.

    도진은 이성을 잃지 않고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내부를 확인했다.

    확인하면서 고민하던 도진은, 일순 어떤 사실을 깨달았고 결론을 내렸다.

    * * * *

    스슥- 스슥-

    "끄으으……."

    쿠르르르르-

    죽음에 이르러 새어 나오는 소리에도, 천장이 흔들리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는 메스.

    슥-

    그 메스가 거짓말처럼 멎었다.

    메스를 움직이던 악마들의 시선이 공동의 입구로 향했다.

    그 입구에, 토벌대와 떨어지고 만 학생들이 서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