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강당 내의 실습을 위해 모인 학생들 중 구면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타 무림학교에서 온 학생들과는 당연히 안면이 없었고 숭무고와 숭무영재고에서 온 듯한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중 일부를 숭무고와 숭무영재고의 학생들이라 짐작한 것도 학교를 다니며 본 기억이 있는 얼굴들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지 아는 사이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들은 정부 쪽의 무림 전담 타격대나 무림맹 소속의 무인들, 혹은 민간 군사 기업 등 각자의 소속에 따라 자연스럽게 구분된 자리 중 연관이 있는 그룹에 나뉘어 앉아 있었다.
'육식계 실습'이기에 그 모습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날붙이를 들고 싸우는 건 말 그대로 목숨을 거는 행위다.
이런 행위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곳이 '무림'이었으니 현대의 인간이 무림, 강호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철저한 연습과 준비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연습과 준비가 '육식계 실습'이고 이 실습을 조금이라도 더 안전하게 치르기 위해 무림학교 학생들은 학연, 지연 등 가능한 인맥을 총동원했다.
그러니까 기존의 무림에서 활동하는 그룹에게 실습 때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부탁하며 여러가지 형태로 인연을 맺는 것이다.
그 부탁에 동반하는 여러가지 것들, 그리고 실습의 퀄리티 등이 또 있는 자와 없는 자 사이에 격차를 만드는 큰 요소 중 하나였다.
배경이나 인맥이 없으면 육식계 실습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으며 설령 겨우 자리를 얻었다 해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느라 제대로 된 실습을 치르기도 힘들었으니.
즉, 이런 대규모 실습에 참여한 학생들 대부분은 그런 좋은 환경을 타고났거나 그에 준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소리였다.
그런 그들은 갑작스레 참여한, 그것도 1학년이면서 '검봉의 연줄'로 낙하산을 타고 나타난 듯한 도진에게 은연중 곱지 않은 눈길을 보냈다.
허나 도진은 그런 시선 대신 유지은과 정의검가 사이의 보이지 않는, 그러나 명확한 거리감에 신경을 두고 있었다.
다른 그룹들이 그렇듯 민간 무림 군사 기업의 무림인 자격으로 참가한 정의검가의 사람들 또한 그들만의 그룹을 만들어 앉았다.
하지만 거기에 유지은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자리는 바로 옆이다.
허나 그런 물리적인 자리는 보이지 않지만 그래서 더욱 두터운 벽으로 인해 아득하게 멀게만 느껴졌다.
'사람보는 법'을 장호에게 배운 도진이기에 그것을 확연하게 체감했다.
저쪽의 무림고 학생들이 유지은에게 보이는 건 이미 차갑게 식어 버린 질투나 동경 등이다.
한때는 거세게 느꼈을지 모르겠으나 오래 지속되어 그 열기가 모조리 날아가 버린.
하지만 정의검가 사람들의 유지은에 대한 질투나 동경에는 열기가 깃들어 있었다.
아직 식지 않은 것이 아니라, 새로이 지펴진 열기가 말이다.
-어릴 적 저 아이는 처음엔 동경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 동경은 시기와 질투로 바뀌었을 터.
장호는 그렇게 말했고 도진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압도적인 재능은 시기와 질투마저 허무하게 만들었겠지.
그즈음 정의검가의 직계와 방계가 유지은에게 느끼던 시기와 질투 또한 지금 무림고 학생들의 감정과 다를 바 없이 차갑게 식었을 것이다.
그렇게 차갑게 식은 감정이 다시 열기를 띠게 된 건, 두말할 것도 없이 '지금' 유지은이 보이는 모습들 때문이었을 거라고 도진은 생각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느꼈을 감정을 한 지붕 아래 사는 가문의 사람들이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다.
오히려 더 확실하게 느꼈을 것이고 도진이라는 완충재도 없으니 더 격렬했을 것이다.
그로 인해 느낀 감정들이 식었던 감정에 새로이 불을 지폈을 터.
전생의 미래에 냉검후가 정의검가가 번성했음에도 독보강호했던 이유를 여기서 도진은 볼 수 있었다.
'가능하면 그렇게 되기 전에 선배가 바뀌면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도진은 유지은의 곁에 앉아 서류를 정리했다.
이 서류는 실습에 참가하면서 비밀 엄수 서약서에 사인을 하고 받은 이번 실습의 자료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흑도 소탕 작전을 펼침에 있어 보안이 철저해야함은 강조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도진은 실습 참여가 확정이 되고 학교가 끝난 뒤 서약서에 사인을 하고서야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밤에 그것을 숙지하고서 이 자리에 참여한 것이었다.
서류를 정리하며 내용을 되새기길 5분.
시간이 되어 단상에 이번 실습, 소탕 작전의 총책임을 맡은 정부 쪽 인물인 무림 전담 타격대의 선임자가 올라섰다.
정복을 차려입은 그가 커다란 스크린을 레이저 포인터로 가리키며 브리핑을 시작했다.
"이번 작전의 목표는 개미파의 개미굴입니다."
개미파. 그들이 스스로를 칭하는 이름이 아니라 경찰이나 무림맹 쪽에서 임의로 붙인 이름이다.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는 흑도 조직의 정식 명칭을 알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고 편의에 따라 이렇게 구분하기 쉽고 특징이 드러나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그렇게 개미파라 이름 붙은 이들이 하는 일은 다름 아닌 밀수다.
"이들은 사람과 마약을 전문으로 밀수하는 조직입니다."
그것도 인신매매나 마약을 밀수하는 악질 중의 악질이다.
그들이 개미파라 이름 붙은 이유, 그리고 그들의 소굴이 개미굴이라 이름 붙은 것도 납치하거나 장기밀매를 하기 위해 사 온 사람들을 은어로 개미라 부르기 때문이었다.
그런 짓들로 덩치가 커져 알려진 개미파를 두고 볼 수 없었기에 이렇게 소탕 작전이 결정된 것이다.
"본거지는 인천항 외곽과 연결된 공장 겸 창고입니다. 지하에 근거지를 두고 사람들을 감금해 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신속하게 침투하여 그들을 일망타진하고 아이들을 구출하는 것입니다."
본격적인 브리핑에 앞서 개요를 한 번 더 되새긴다.
그리고 여기서 도진은 확신했다.
이 작전은, 전생에서 실패했던 그 작전이 맞다는 것을.
'보험을 들어 둬야겠네.'
이미 며칠 전부터 심상세계에서 이번 일에 대비한 특훈을 장호에게 받고 있었다.
허나 도진은 스스로에게 충분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만용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때문에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보험을 들어두기로 했다.
도진이 머릿속으로 차곡차곡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브리핑은 구체적이고 본격적인 내용에 접어들었다.
물론 도진은 그 내용 또한 하나도 빠짐없이 머리에 새겼다.
"작전 결행은 익일 공일시 정각입니다. 정해진 분대 규모로 대기하다 지정된 장소에서 결행하겠습니다."
브리핑이 끝났다.
도진은 유지은을 따라 정의검가 사람들을 따라 움직이게 됐다.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합니다."
그들은 유지은의 곁에 있는 도진과 굳이 친해질 생각이 없어 보였기에 도진도 형식적인 인사만 나누었을 뿐 굳이 섞이려 들지 않았다.
유지은에게 있어 그들은 '사돈의 팔촌'만큼이나 혈연이 옅었고 그들은 특히 유지은을 싫어하는 기색이었으니 괜히 친한 척 해 봐야 어색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그들과 유지은의 관계를 당장 개선할 수 있을 만큼 도진은 만능이 아니었으니까.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약간 거리를 두고 걷는 도진의 귀에,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존나 부럽네. 누구는 존나 뺑이쳐서 실습하는데 누구는 천재녀 덕분에 낙하산 타고 내려오네."
"시팔. 그 정도 낙하산이 있으니까 귀한 칼로 나무나 자르는 거겠지."
"낄낄."
소리의 근원지는 소규모 민간 군사 기업 중 한 곳 소속으로 보이는 학생들이었다.
그것도 얼굴을 본 적이 있는 숭무영재고 학생들.
대놓고 하는 말이 아니라 섭음술로 충분한 주의를 기울인 뒷담화였지만 그들이 어설픈 내공 운용으로 세운 막은 도진의 이목을 속이기엔 너무 엉성했다.
그래도 섭음술은 섭음술이었기에 들었다고 따지기엔 애매한 상황. 그러나 도진은 애초에 따질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룻강아지가 짖는다고 해서 일일이 화를 내고 신경쓰기에 도진은 이미 너무 큰 사람이 되어 버렸으니까.
그 수준으로 볼 때 나름 아등바등 노력해서 이곳에 참여했을 그들이 도진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지 못하는 것도 이해할 만한 일이었고.
오히려 도진은 내게 있어 검은 동반자요 친구이며 피륙을 가르기 위해서만 있는 흉기가 아니라는, 일종의 깨달음이나 사고방식을 그들이 원한다면 이야기해 줄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생각이었고 그들과는 아무런 일 없이 헤어졌다.
정의검가의 대기 장소는 작전 장소와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호텔이었다.
인천항 근처 고급 호텔의 큰 방 두 개를 빌렸다.
그중 한 곳에 정의검가의 나머지가 머물렀고 다른 한 곳에 도진과 유지은이 머물게 되었으니 바보라도 모를 수가 없는 의도가 보이는 배치였다.
허나 유지은은 신경쓰지 않았고 도진도 별말을 하지 않았다.
이 문제는 유지은이 해결해야 할 일이지 도진이 참견할 일이 아니었으니까.
"선배, 밤까지 뭐하실 거예요?"
아직 새벽까진 많은 시간이 남았다.
도진의 물음에 유지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별로 할 건 없네. 너는?"
"저녁까지 잠을 자둘까 싶네요."
아마도 밤을 새야 할 테니 평범하면서도 당연한 선택이었다.
뭐 도진의 경우엔 심상세계에서 장호에게 특훈을 받기 위해서가 진짜 목적이었지만 말이다.
"제가 일어나면 같이 저녁 먹어요, 선배."
"응."
유지은은 별다른 말 없이 언제나 그렇듯 고개를 끄덕였다.
도진이 하는 것이면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보는 그녀였다.
그리하여 도진은 심상세계에서 장호에게 이번 실습을 위한 특훈을 받고, 일어나선 작전을 대비하여 유지은과 함께 든든하게 식사를 하고 정의검가 사람들과 함께 작전 장소로 이동했다.
눈에 띄지 않도록 시간차를 두고 분대 단위로 지정된 장소에 인원의 배치가 끝나자 건물 지붕 위에 위치한 정부 기관의 요원이 수류탄 비슷한 것을 꺼내 그대로 던졌다.
착탄 지점은 개미파의 본거지가 숨겨져 있는 공장 겸 창고로, 그것은 벽에 닿자마자 스파크를 튀기며 에너지를 퍼뜨렸다.
파지직!!
"뭐, 뭐야?!"
그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EMP 폭탄이었다.
전자기기를 무력화하는 파동에 일대의 CCTV 등의 장비가 모조리 무력화되었다.
-진입!
인이어를 통해 들리는 짧지만 묵직한 목소리와 동시에 토벌대가 움직였다.
퍽!
"컥."
선발대로 정예 중의 정예들이 나섰다.
무언가 반응하기도 전에 외부를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일부가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도 신속하게 망을 보는 자들을 제압하기 위해 움직이고 그 외 선발대는 거침없이 내부에 진입했다.
스각-!
날붙이를 쥔 그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흑도인들의 힘줄 등을 갈라 버린다.
죽이진 않는다.
허나 죽이지만 않을 뿐 그 손속은 과감하면서도 거침이 없다.
효율적이고도 빠른 움직임에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인이네.'
토벌대의 정예는 과연 무림인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깔끔한 움직임으로 공장 겸 창고를 제압했다.
그리고 어떤 장치를 이용하여 대번에 비밀 통로를 찾아냈다.
기계를 치우자 계단이 드러났고 그것을 타고 내려가자 투박한 통로가 드러났다.
이번 작전의 목표인 '개미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