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무슨 생각해?"
스윽, 갑자기 마주친 눈동자에 도진이 고개를 들었다.
거리를 좁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생각에 잠겼던 도진과 시선을 맞춘 유지은의 신묘한 눈동자가 도진을 한가득 담고서 속내를 궁금해 하고 있었다.
도진은 웃으며 말했다.
"선배."
"응?"
"혹시 그 실습, 저도 참여할 수 있나요?"
"오?"
유지은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거기에 담긴 감정은 갖고 싶은 게 있지만 말하지 못했던 장난감을 갑자기 선물받은 아이를 닮아 있었다.
유지은이 고개를 휙휙 끄덕였다.
"응응! 원래는 안 되는데 내가 말하면 될 거야. 같이 갈래?"
"아하하. 어쩐지 부정 청탁을 하는 기분이네요."
"에이, 그건 아니야. 그건 실력이 안 되는 사람을 꽂아 넣을 때 이야기고 너 정도면 오히려 없는 자리를 만들어서라도 초빙해야 되는 수준인 걸."
"감사합니다. 그럼 부탁드려도 될까요?"
"응! 내가 가서 말씀드려 보고 전화로 결과 알려줄게. 번호 줄래?"
"네. 그러고 보니 우리 번호 교환도 안 했었네요."
그리하여 유지은과 번호를 교환한 그날 저녁, 도진은 심상세계에서의 수련 중 휴식시간에 위지혁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선배, 역시 조금 어긋나 있네요."
도진은 유지은이 어긋나 있다는 걸 오늘 일로 새삼 느꼈다.
다른 게 아니라 오늘 실습에 참여할 수 있겠느냐는 말에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습 때문이었다.
무공을 배웠다고 해서 모두 무림인은 아니다.
경지의 이야기가 아니라 심성의 이야기다.
칼을 들었다고 해서 모두가 그것으로 생명을 상하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날붙이를 들고 대련을 할 수는 있다.
날붙이를 무서워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것으로, 진심으로 사람을 상하게 하는 건 꺼리는 사람들.
설령 무림인이라 자처해도 될 만큼의 무공을 익혔다 해도 '강호'에 뛰어들지 않는 사람 또한 적지 않았다.
이런 사람들은 보통 아이돌의 경호를 겸하는 매니저나 무공 교사 등 피를 보지 않을 수 있는 쪽으로 빠진다.
소위 말하는 노가다판으로 가면 갔지 사람을 상하게 하는 일은 못하겠다는 사람들이다.
이는 숭무고나 숭무영재고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유형이었다.
사람은커녕 동물, 심지어 곤충이라 해도 쉽사리 죽일 수 없는 사람들마저 있다.
때문에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초식계'와 '육식계'라는 단어로 성향에 따라 무림인을 나누곤 했다.
마초적인 성격이 강한 무인들은 초식계를 아예 강호인으로 취급하지 않았는데 초식계는 굳이 그 분류에 반발하지도 않을 만큼 간극이 크다.
그리고 이 분류에 따르면 유지은은 육식계이겠지만 깊이 파고들면 그 본질이 다르다.
육식계라 해서 사람에게 날붙이를 들이밀고 피륙을, 뼈를 가르는 게 적성에 맞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게 적성에 맞으면 애초에 정상인이라 하기 힘들다.
때문에 이들은 필요하다면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 봐야 한다.
그러니까 어떤 기준이 되는 선이 있는데 '그 선을 낮출 수 있는' 사람이 육식계다.
유지은은 다르다.
유지은은 애초에 그 선이 '낮은 상태'인 사람이다.
굳이 익숙해지거나 필요하니까 해야 한다는 의식이 없어도 타인에게 날붙이를 들이댈 수 있는 유지은은, 애초에 선이 낮기에 더 낮아질 수 있다는 소리이고 그 선은 '넘어서는 안 될 선'이다.
얼마든지 '마두(魔頭)'와 같은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말이다.
그 본성이 선하기에 전생의 미래에서 마두가 되지 않고 '냉검후'가 되었지만 사람들이 꺼리는 존재가 되었다는 부분에서는 일치하고 만다.
아직 냉검후가 되지 않은 유지은은 그러나 검봉인 지금도 그런, 아마 사람에게 날붙이를 들이대야 하고 흉기와 피가 난무할 실습에 도진이 참여해도 되겠느냐는 말에 그저 순수하게 기뻐했다.
그런 유지은의 미래를 가능하면 바꿔주기 위해 도진은 확실하지 않음에도 실습에 참여하겠다 말한 것이었다.
"확실하지 않은 일인데 괜찮겠느냐?"
위지혁의 물음에 도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쪽이든 괜찮은 일이라 판단했습니다."
위키에서 기록하길 무림고 학생 엽기 감금 해체 사건.
시기는 일치하지만 이번에 유지은이 참여한 실습이 맞는가에 관해선 여러모로 의문이 있었다.
무협식으로 말하면 관과 무림이 힘을 합쳐 시행한 토벌 작전이었다.
비록 그 대상이 규모에 비하면 그리 대단치 않은 흑도 조직이고 무림학교 학생들의 실습까지 허가할 정도였지만 따져보면 무림 전담 경찰과 무림맹, 무림세가, 숭무고와 숭무영재고의 학생들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니 재계도 연관된 어마어마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소탕 작전이 실패하고 인질까지 잡혀 버렸다.
상식보다 체면을 중시하는 세상인 만큼 그것을 은폐하려 시도하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허나 그 정보가 새어 나간 마당에 그 안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검봉 유지은'이 있었다면 그 존재를 지우는 게 가능할까.
도진은 결코 불가능하다 생각했다.
하물며 냉검후가 될 때까지 활동했던 유지은에게는 그와 관련한 어떤 소문도 존재하지 않았다.
때문에 짧은 순간 위지혁과 대화를 나누면서 결론을 내리지 못했던 것이다.
허나 그럼에도 실습에 참여하겠다 말한 건 도진이 스승에게 말한 대로 그것이 어느 쪽이든 괜찮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건이란 시간 속에서 무수한 우연이 겹쳐져 발생하는 것이다.
우연은 맞물린 톱니바퀴이니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이 된다는 나비효과가 그대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아주 작은 톱니바퀴 하나로 인해 거대한 흐름이 변화할 수 있는 것.
혹은 자그마한 돌덩이는 댐의 물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댐의 일부라면 댐 전체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
도진이란 변수로 인해 전생에 있었던 사건에 변화가 발생했을 확률이 얼마든지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어떤 경위인지는 짐작할 수 없지만 그런 일이 발생했을 수 있다고 추론하는 건 그리 무리인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유지은 때문이 아니더라도 알게 된 이상 도진은 사건을 바꾸고 싶었다.
배드 엔딩이 될 바엔 개연성을 망치더라도 해피 엔딩이 낫다 생각하는 게 도진이다.
토벌에 실패하여 더 많은 희생자가 나오는 미래를 알고 있으니 그 사건을 다시 쓰자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까 어느 쪽이든 괜찮다.
도진은 그런 결론을 내렸고 위지혁은 흡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면 더 열심히 수련을 해야겠구나.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스승님."
* * * *
다음날.
도진은 유지은에게서 실습 허가가 났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너라고 말하니까 바로 허가가 났어."
"감사합니다, 선배."
허가가 난 뒤 도진은 신청 절차를 마치고 소담을 포함한 친구들에게 실습을 나가게 됐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번 주말엔 실습을 나가야 해서 연락하기 힘들지도 몰라."
"그렇구나. 잘 다녀와."
소담과는 보통 주말엔 본가에 가기에 전화로 이야기를 주고받곤 했는데 이번 주말엔 힘들 수 있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흑도 토벌 작전에 관한 정보는 일절 주어지지 않았다.
도진도 미래를 알기에, 위지혁 덕분에 내용을 짐작하고 있는 것이지 아주 자그마한 정보도 유지은에게서 얻지 못했다.
때문에 친구들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리고 저녁엔 부모님에게 안부 전화를 통해 실습을 나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구나. 조심해야 한다."
'육식계 실습'이란 이야기를 솔직하게 했기에 도진의 아버지, 김서우는 걱정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 아시잖아요. 아버지 아들 잠룡 김도진이잖아요."
"그래, 그렇지."
"못 믿으시네. 그럼 내기할까요? 제가 조금이라도 다치면 '야근권' 1회 드릴게요."
야근권.
일주일에 두 번은 약속에 따라 집에 들어와야 하는 김서우가 한 번은 야근을 해도 된다는 소리다.
피식 웃음이 나올 만한 농담이었지만 김서우는 웃지 못했다.
그리고 평소와 달리 조금, 속내를 드러내고 말았다.
"매력적인 제안이지만 그 야근권, 안 받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구나."
"…네. 절대로 다치지 않을게요, 아버지."
어머니도 그렇지만 아버지도 아들을 굳게 믿어주지 못했다.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설령 아들이 역대 최강의 천마가 되었다 해도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걱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버지와 어머니였기에.
도진은 그 걱정에 감사하며 몇 번이고 굳게 약속할 뿐이었다.
그렇게 약속한 밤이 지나고 주말, 실습날이 되었다.
본가에 가지 않은 도진은 이른 아침 학교 앞에서 유지은을 만났다.
유지은은 외관부터 범상치 않은 승용차를 몰고 나타났는데, 운전의 조작감과 차량의 운동 능력을 극대화한 모델이었다.
"수동이네요?"
스틱 모델이었기에 보조석에 앉아 말하니 유지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토는 반응이 느리거든."
시대가 발전하며 오토와 스틱의 차이는 미미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유지은 정도 되는 사람에겐 천지차이였기에 그녀는 스틱을 선호하는 것이었다.
"너는 안 그래?"
"뭐, 저는 좀 곰 같은 사람이어서."
"그렇구나."
유지은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항상 그랬듯 동의하는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소소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무림맹 남산 지부였다.
정확한 위치는 남산 경찰서 부지 내에 있는데, 경찰 조직의 무림 전담 부서와 업무를 쉽게 연계할 수 있도록 무림맹 지부 중 다수가 경찰서 안에 있기 때문이다.
'무림맹 지부'라는 무협지의 느낌이 진한 이름과 달리 건물은 현대식이며 넓고 깨끗했다.
그 건물의 커다란 강당이 오늘의 목적지이자 토벌 작전의 최종 브리핑이 진행되는 장소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시선이 집중되었다.
마치 칼날이 몰아치는 듯 날카로운 시선들이었는데, 그만큼 분위기가 살벌했다.
이번 일에 동원된 무림 전담 타격대와 무림맹 소속 무림인들, 그리고 민간 무림 군사 기업 소속의 무림인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보이는 실습 나온 학생들은 살벌한 분위기 때문에 완전히 얼어붙은 모습이다.
여타 무림학교만이 아니라 숭무고의 2학년들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학생들을 굳이 겁주려는 게 아니라 이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흑도의 토벌은 하하호호 웃으면서 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날붙이는 기본이고 심지어 필요하다면 전기톱까지도 휘두를 수 있는 내일없이 사는 자들이었으니까.
그들을 상대로 마찬가지로 날붙이를, 무공을 행사하여 싸우는 자리에서 느슨한 정신으로 임했다가는 바로 사지가 날아갈 수 있다.
때문에 이렇게 작전을 앞두고서 분위기를 다잡는 것이다.
허나 그 분위기에서 유일하게 유지은만큼은 예외였다.
굳이 소란스럽게 하지 않지만 긴장하지도 않고 여타 무림인들도 유지은을 터치하지 않는다.
그것은 유지은이 이미 민간 무림 군사 기업을 운영하는 정의검가의 후계자로서 훨씬 이른 나이부터 무림의 일에 참여해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무림학교 학생은 1학년 2학기부터 실습이 가능하지만 무림세가의 후계자 같은 특수한 경우엔 그 시기가 15세 이후로 앞당겨질 수 있었다.
유지은은 그에 따라 15세부터 이미 실적을 쌓아왔던 것이다.
그 실력은 물론이요 실전에서의 흔들리지 않는 모습까지, 유지은은 이미 무림인이었다.
도진은 유지은과 함께 자리에 앉아 브리핑을 들었다.
"이번 작전의 목표는 '개미파'의 개미굴입니다."
브리핑의 목적지는, 전생에서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