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191화 (191/741)
  • 190화

    오랜 폐관 수련을 끝낸 검봉 유지은이 복학했다.

    그녀는 복학하면서 평범한 시간표를 짰었는데, 돌연 그것을 변경했다.

    숭무고와 숭무영재고의 학생들은 다수가 오전에 수업을 집중한다.

    여타의 대학생들이 꺼리는 '1교시', 그러니까 오전 9시부터 시작하는 1교시를 기본으로 넣음으로써 설령 점심을 늦게 먹더라도 가능하면 이른 오후에 수업을 모두 듣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오후에 집안의 일이나 필요한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은 반대로 야간반에 수업을 집중시킨다.

    한데 유지은은 오전반을 선택했다 그것을 정정하여 야간반도 아니고 '새벽반'으로 바꾸었다.

    그러니까 무려 새벽 4시에 시작하여 오전 8시 이전에 모든 수업을 들어 버리는 것이다.

    무림학교의 정점인 숭무고와 숭무영재고에 다니는 엘리트들을 배려하기 위한 정책 중 하나인 새벽반.

    유지은은 수강 신청을 정정하여 그 새벽반에 모든 수업을 몰아넣었다.

    정정 이전 신청했던 수업을 진행하던 교수들은 남몰래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대한민국 사상 최고의 천재라는 소리까지 듣던 유지은은 '교수처형자'로도 유명했다.

    조금이라도 잘못되거나 깊이가 부족한 소리를 하면 대번에 '왜?'라는 반론이 유지은에게서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왜?'에 답하는 건 두려울 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그로 인해 망신당한 교수가 한두 명이 아니었기에 작년 2학기 유지은이 수강 신청을 한 과목의 교수들은 철저하게 수업을 준비하느라 그 학기 내내 피가 마르는 경험을 해야 했다.

    때문에 갑자기 떨어지던 날벼락의 급커브에 그들은 안도의 숨을 내쉰 것이다.

    반대로 급격히 방향을 꺾은 날벼락을 얻어맞게 된, 그것도 비인기인 새벽반을 맡은 교수들은 '갑자기 왜?'라고 생각하며 이유를 알고 싶어했는데 소문을 통해 금방 알게 되었다.

    "……."

    오전 2교시 수업 시간.

    과목명은 '운신법(運身法)의 이해'로, 정운(正運) 정한수가 맡은 수업이었다.

    정한수는 삼재인 정도수의 동생으로 형만큼 다재다능하진 않았으나 그 별호처럼 '올바르게 움직이는 법'에 관해서만큼은 형 이상으로 출중하다는 평가를 받는 무인이었다.

    대부분의 것이 그렇듯 무공 또한 바른 자세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었는데 그 부분이 출중한 만큼 정한수 또한 고수였고 학생들의 평가 역시 높은 교수였다.

    "…항상 강조드렸듯 바른 자세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과하지 않습니다. 아, 물론 말이란 것은 상황과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유의해야겠지만 일반적인 경우라면 이것이 틀린 말이 아닐 겁니다. 2학기의 주제인 하체를 고정하고 상체만을 이용해 봄으로써 몸 전체가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함을 다시금 깨달아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이런 이유로……."

    그에 관한 자부심을 가지고 항상 당당하던 정한수가 지금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신중하게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흔히 '운신법'하면 다리를 움직이는 보법이나 경공으로 뜻이 국한되는데 이 수업은 말 그대로 '몸을 움직이는 법'에 관해 가르치고 있었다.

    중간고사 이전까지는 상체를 고정하고 하체만을 움직이는 식으로 수업했고 이후로는 반대로 하체를 고정하고 상체만을 움직여 여러가지를 경험하게 했다.

    제한을 두는 건 그가 말하는 대로 무공이란 '전신운동'으로 몸 전체가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함을 깨닫고 그 유기적인 움직임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깨닫기 위해서다.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목표였으며 실제로 학생들은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그러니 당당해도 될 정한수가 갑자기 이렇게 긴장하는 건, 뒷자리에 바로 그 교수처형자 검봉 유지은이 청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강(聽講).

    강의를 신청하지 않은 학생이 요청을 통하여 그 수업을 들어보는 것이다.

    숭무고에도 당연히 그 제도가 있었고 실제로 이를 신청하여 듣는 학생이 적지 않았다.

    학생들 사이에서 평가가 좋은 정한수 또한 그런 경험이 많았다.

    문제는 그 학생이 다름 아닌 유지은이라는 것이다.

    정한수는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었기에 '그 유지은'의 청강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고 이렇게 구차하게 말이 길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원망의 화살은 유지은이 아니라 김도진에게로 향했다.

    뜬금없이 도진이 나오는 건 유지은의 청강의 이유가 도진이기 때문이다.

    '음…….'

    장호에게 여러가질 배운 도진은 당연히 정한수의 원망 또한 읽고 있었다.

    그리고 내심 곤란해 했다.

    유지은이 복학하고 벌써 일주일.

    그녀는 복학 후 내내 도진의 곁을 맴돌았다.

    이렇게 도진의 수업을 찾아와 청강하거나 점심시간은 물론이요 집행부 활동 때에도 지구를 도는 달처럼 주위를 맴도는 것이다.

    그러면서 도진을 관찰했다.

    도진의 입장에서는 꽤 곤란한 일이었지만 유지은은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감정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하체의 움직임을 완전히 제한하고 상체만을 움직이는 수련.

    나쁘지 않아 보였다.

    다만 그 수업을 받는 학생들의 수준은 역시나 실망스러웠고 '무채색'이었다.

    유지은은 그것을 직접 실행하지 않고 머릿속의 시뮬레이션만으로도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는 천재였고 실제로 해 보았다.

    그 내용에 비하면 피상적이기만 한 후배들의 수준은 그녀의 괴리감을 자극할 뿐이었다.

    그에 비해 도진은 어떠한가.

    겉으로 보기엔 다른 학생들과 달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부족해 보인다.

    다른 학생들이 이래저래 시행착오를 거쳐 나은 모습을 보여주는 데 비해 도진은 계속 서툰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1학기에 도진은 그런 모습 때문에 은연중 그를 싫어하는 학생들에게 내심 비웃음을 샀으나 그것이 오히려 멍청한 행동이었음을 시험에서 증명해 보였다.

    서툰 게 아니다.

    오히려 그런 행동을 통하여 더 깊이 연구하고 이해하여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었다.

    이것을 유지은은 단번에 알아 보았다.

    아니, 그것을 넘어 더 깊은 영역까지도 꿰뚫어 보았다.

    도진의 시행착오에는 '이치'가 담겨 있었다.

    단순히 제한된 환경에서의 움직임을 연구하는 게 아니라 그 환경을 넘어 이치의 영역에 이른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체를 고정하고 상체만을 움직이는 수련'이 아니라 '그 현상에서 비롯하는 모든 것을 꿰뚫을 수 있는 이치'를 연구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야말로 '도가도비상도'라 할 수 있는 영역에서의 이야기였고 유지은은 그렇기에 더더욱 도진에게 홀릴 수밖에 없었다.

    저것이다.

    따라잡고 말고가 아니라 그녀마저도 정의할 수 없는 영역에서의 이야기였고 그렇기에 도진만큼은 그녀의 무채색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색을 가지고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다.

    때문에 그녀에겐 오직 도진만이 보이고 있었으니 사실 정한수의 걱정은 괜한 것이었지만 그것을 정한수는 알 도리가 없었기에 전전긍긍하는 가운데 수업이 끝나 버렸다.

    그렇게 수업이 끝나자 유지은이 후배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도진에게로 다가갔다.

    "후배!"

    "네, 선배."

    "이제부터 뭐 할 거야?"

    오직 자신만을 두 눈에 담으며 묻는 유지은에게 도진이 웃으며 말했다.

    "점심 먹으러 가야죠. 선배도 같이 가실래요?"

    그러면서 함께 한 소담과 오대용, 주정아에게 양해를 구하는 걸 잊지 않았다.

    "응!"

    유지은은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가요."

    그리하여 다섯 명이 함께 점심을 먹게 되었다.

    본래 친구들과 식단을 맞추기 위해 채식을 위주로 하던 도진은 그동안과 다르게 육식 위주의 푸짐한 메뉴를 선택했다.

    크고 날카로운 기세를 은연중 풍기는 것과 달리 소식을 하는 유지은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후배. 그렇게 먹어도 괜찮은 거야?"

    무림인은 아이돌 등 몸이 재산인 사람들 이상으로 몸이 재산이며 때문에 그 이상으로 엄중하게 식단을 조절한다.

    내공 수련에 있어 '불순물'이 몸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런 이유로 화기(火氣)가 닿은, 특히 온갖 인위적인 성분이 가득한 육류 등은 피하는 게 기본인데 도진은 그것을 지키지 않았다.

    양념 소스는 물론이요 아예 치즈 가루 범벅인 치킨을 뜯고 있으니 유지은은 궁금증에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도진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심법 수련하면 괜찮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굳이 불필요한 시간을 더 투자할 필요는 없잖아?"

    내공이 일정 경지 이상에 이르면 몸 안의 불순물을 심법 수련을 통하여 몰아낼 수 있다.

    다만 그 경지에 이르는 것이 쉽지 않고 오랜 시간이 걸리니 그 전엔 식단 조절을 해야 하는데 무림인들은 그런 식단 조절에 익숙해져 달고 짠 음식 등을 아예 입에 대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유지은의 경우는 더 심했다.

    심법 수련을 더하면 좋으면 좋았지 나쁠 게 없다.

    게다가 먹는 게 낙인 무림인이 없지는 않았고 아예 전문적으로 '먹방'을 하는 무림인도 있다.

    허나 그런 사람들과 달리 유지은은 먹는 데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고 굳이 심법 수련을 더 해야 할 만큼 '재능이 부족한' 사람도 아니었기에 그것을 불필요한 시간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두 눈을 마주하며 도진은 자신의 순살치킨을 덜어 일부를 소담에게 먼저 주고 다음으로 유지은에게 건넸다.

    "한 번 먹어봐요. 그럼 이해하실 수 있을지도?"

    "음……."

    유지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하다 이내 하압, 치즈 치킨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야무지게 꼭꼭 씹어 삼킨 뒤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네."

    "그렇죠?"

    "응."

    도진의 물음에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래서?'라는 감정이 눈에 묻어났다.

    그런 그녀에게 도진이 말했다.

    "먹는 낙이란 게 있잖아요. 거기에 맛들리면 까짓거 심법 수련 몇 시간 더한다 생각하고 먹고 싶은 걸 먹는 거죠."

    "헤에. 그럴 수도 있는 거구나."

    "그렇죠."

    "난 잘 모르겠네."

    설명에도 유지은은 어깨를 으쓱였고 도진은 역시 안 되나, 하고 생각했다.

    -강적이로구나.

    -그렇네요.

    지켜보던 위지혁의 말에 도진이 속으로 긍정했다.

    평소와 다른 식단을 선택한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유지은에게 색다른 자극을 주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유지은에게 삶의 목표를 주기 위해서'였다.

    도진은 '사람을 보는 법'과 자신의 경험, 그리고 위지혁과 장호의 조언 덕분에 유지은이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것을 해결해 줄 수 있을까 싶어 이래저래 생각나는 대로 여러가지를 시도해 보고 있는데 역시나 쉽게 되지 않았다.

    그녀가 안고 있는 문제의 근본은 목표의 부재(不在)다.

    그러니까 그것이 어떤 것이든 목표가 주어지기만 한다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소리다.

    그녀가 가장 잘하는 무공은 그녀의 삶에서 목표가 될 수 없었다.

    때문에 여러가지를 제시해 보고는 있는데 이렇다 할 반응이 오는 게 없었다.

    -쉽지 않을게다. 그래도 꼬시는 걸 포기하지 않을 테지?

    -꼬시다니 어감이 좀 이상하지만 또 틀린 말은 아니라서 억울하네요. 말씀대로 포기하진 않을 겁니다.

    유지은은 전생에서 소담처럼 동경하던 대상도 아니었고 너무나 다른 세상에서 살던 사람이라 소위 말하는 '내적 친밀감'을 가지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진이 유지은을 신경쓰는 건 도진을 두 눈에 담고 있는, 재능의 화신인 그녀와 도진 사이에 놀랍게도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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