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녀가 걸음마를 떼고 말문이 트였을 무렵 가장 처음 무공을 접했을 때 한 생각이었다.
그날 본 것이 다름 아닌 무림 르네상스 시절 크게 이름을 떨친 검공의 고수인 그녀의 할아버지가 펼친 무공이라는 걸 생각하면 무얼 모르는 아이의 치기 같지만, 놀랍게도 그것은 치기가 아닌 사실이었다.
좀 더 나이를 먹어 다섯 살이 되어 그녀는 무공에 입문했다.
"너무 쉬워요. 재미없어요."
직계로서 아버지에게 직접 무공을 사사받던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어떤 쪽으로든 부족함이 있는 인간이었다면 그녀의 말을 허투루 들었을 것이다.
혹은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녀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무림 르네상스 시절 '호부 밑에 견자 없다'는 격언을 증명한 고수였기에 딸의 재능을 알아보고 오히려 전율했다.
"이 아이는…… 우리 가문 최고의 고수가 될 것입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욕심을 내게 됐다.
아이에게는 너무 이르다고 할 만큼 빠르게 진도를 나갔다.
한데 그 '욕심'과 '빠르다'는 상대적인 개념이었다.
오히려 그런 욕심과 속도를 내었음에도 그녀의 재능에 비하면 부족했다.
'이걸 왜 못하지?'
언니, 오빠, 친척들, 심지어 어른들까지도 그녀의 시선에서 보자면 부족하고 또 부족할 만큼 그녀의 재능은 압도적이었다.
마치 신이 재능이란 개념을 아름다운 형상으로 빚어낸다면 그녀의 모습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가전 무공을 익혀 나갔다.
두 번의 가르침도 조언도 필요없었다.
한 번 가르치면 그녀는 그 자리에서 그것을 깨우쳤다.
억지로 말하자면 그것은 '수련'이라기보다는 '익숙해지는' 과정이었다.
그것이 그녀에게 있어 '첫 번째 어긋남'이었다.
보통의 경우 무공을 익히는 과정에서 성취감을 느끼고 그 깊은 세계에 빠져듦으로써 고련을 이기기 위한 원동력을 얻게 된다.
삶의 목적 그 자체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가장 간단한 '정권(正拳)'만 해도 단순히 주먹을 내뻗는 게 아니라 내딛는 발에서 발생하는 힘을 온몸을 연계하여 주먹에 전달하는 수많은 과정의 깨달음이 있다.
내부의 과정까지 더하면 그 깊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깊고도 복잡해진다.
이 깨달음이 쌓이고 쌓여 문파의 '비전(秘傳)'이 되는 법인데 그녀는 그 대를 이어 쌓인 깨달음을 스스로 깨우쳐 버릴 만큼 말도 안 되는 천재였기에.
그것이 어렵지 않고 쉽게 할 수 있기에 계속해 나갈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있어 '두 번째 어긋남'은 삶에 목표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뭘 위해 살아야 하지?'
그녀는 중학생 무렵 그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그것은 존재론적인 고민이었다.
그 나이에 하기엔 너무나 이른.
허나 천재란 더 멀리 보고 더 깊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녀는 거기에 대해 골몰하게 되었다.
"우리 가문은 무로써 악을 단죄하는 정의검가(正義劍家)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그녀에게 그렇게 가르쳤다.
무를 익히고 그 익힌 무로써 악을 단죄하는 정의로운 무림의 검가.
그로써 세간의 존경을 받아왔다고.
와닿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결국 고민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고 목표나 의미없이 바다 위를 떠도는 부표처럼 시간을 보내야 했다.
스스로 걷는 게 아니라 외부의 자극에 떠밀릴 뿐.
하루하루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니라 죽어간다고 그녀는 느끼고 말았다.
그때부터였다.
그녀의 세상에서 색깔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
그녀의 세상은 오래 지나지 않아 무채색이 되고 말았다.
다시 색깔을 되찾고 싶어 그녀는 더더욱 고민했다.
삶의 목표를 찾아보기로 했다.
끌리는 게 없었다.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러다 생각한 것이었다.
'숭무고에 가볼까?'
천재 중의 천재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했다.
그곳이라면, 그녀 못지 않은 천재들이 있을 것이고 '경쟁'이라는 걸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흔히 경쟁이라는 게 삶의 원동력이 되어 준다고들 했다.
아직 그녀는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기에 이것이 답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그래서 세상을 경험해 볼 겸 숭무고에 진학하겠다 말했고 가문의 어른들은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그렇게 가게 된 숭무고는, 오히려 그녀의 세상을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아니야.'
후기지수로까지 불리는, 대한민국 최고라는 동기들은 과연 '나쁘지 않은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앞으로 훨씬 강해질 가능성이 보이는 동기들.
허나 그 가능성은 그녀의 가능성에 비하면 보름달 앞의 반딧불이라 할 만큼 부족했다.
'내가 식견이 부족해서 잘못 본 걸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이 맞기를 바랐기에 동기 중 한 명의 싸움에 끼어들었다.
일진이라며 실력을 자랑하던 1학년들과 부딪쳤고 2학년들과 싸우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와 '경쟁'할 수 있는 상대를 찾기 위해서.
허나 그것은 그녀의 눈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과정이 되고 말았다.
사실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친척들은 물론이요 심지어 가문의 최고수라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마저도.
'지금은 나보다 앞선 것처럼 보이지만 머지않아 결국 나에게 추월당할 사람들.'
…이라는 것을.
삶이 빛나기 위해선 그 빛을 만들기 위한 에너지가 필요하며 그 에너지를 발생시키기 위한 '연료'가 필요하다.
유지은은 자신에게 그런 연료가 없음을 그 압도적인 천재성으로 인해 일찍이 깨닫고 말았다.
더욱 큰 비극은, 그 압도적인 천재성으로도 찾고자 하는 것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녀는 가장 익숙하고 잘하는 것이었던 무공에 골몰해 보기로 했다.
무공의 길에는 끝이 없으며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더 크고 높은 길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으니까.
지속가능한 목표.
무공이 그것이 되어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삶의 목표가 되어주지 못했다.
오히려, 비극을 앞당겼다.
이것은 나의 목표가 되어 주지 못한다는 판단을 내리고 폐관 수련을 나온 그녀는 오히려 타인과 자신 사이에 있는 크나큰 괴리감을 느껴야 했다.
너무 약하다.
경쟁 상대가 되지 못한다.
격차가 너무 크다.
지금은 나랑 비슷하거나 나보다 앞에 있지만 일시적이다.
결국 누구도 나와 같은 속도로 달리지 못한다.
그런 생각들이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폐관 수련으로 인해 무서우리만치 성장한 그녀는 자신과 타인이 '다르다'는 것만 뼈저리게 깨닫고 말았다.
높은 곳에 오르며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된 것이 오히려 독이었다.
숭무고의 학생들마저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1년 전엔 최소한 손이라도 섞을 수 있는 수준이었던 동기들마저, 후기지수들마저 이제는 너무 아득한 아래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거기에서 오는 괴리감과 이질감이 그녀를 괴롭혔다.
목표가 없는 삶에 외톨이라는 것까지 자각하고 말았다.
검봉 유지은이, 냉검후 유지은으로 변모하는 본격적인 출발점이 바로 이곳이었다.
도진의 전생과 달라지지 않았던 길.
허나 그 길이 지금, 분기(分岐)했다.
'……!'
그녀의 눈이 커졌다.
처음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그래 놀랍게도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가 뒤늦게 발견한 사람이 있었다.
못보던 얼굴이다.
1학년들 사이에 있으니 당연히 1학년일 것이다.
그래, 1학년이다.
1학년이, 무려 1학년이 그녀의 눈과 감각마저 피했다.
더 놀라운 건 그것이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태도라는 것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그녀의 시야와 감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소리였고 이는 그녀보다 '앞서는 것'이 있다는 소리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을 따라잡는 것이 시간 문제라는 생각이 결코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가.
'따라잡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처음이었다.
무채색이 되어 버린 세상에 오직 그만이, 색이 깃들어 그녀의 모든 것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빤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시선과 정신을 온통 빼앗기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미소지으면서 물었다.
"너, 이름이 뭐야?"
* * * *
도진은 마치 간절히 바라던 구원을 마주한 사람처럼 진한 감정을 담아 자신을 바라보는 유지은의 시선에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원인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이제는 몸에 배어 버린 무흔잠영의 묘리.
유지은은 놀랍게도 처음으로 그 묘리를 꿰뚫어 보았고 그것이 그녀에게 큰 자극이 되었던 것이다.
다만 '원인'을 안 것이지 '이유'를 안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위지혁이 알아 보았다.
-허허. 너에게 관심이 생긴 모양이구나.
-관심이요?
-그래. 휘 그 친구의 제자도 그랬느니라. 나를 처음 보았을 때의 눈빛이 떠오르는구나.
압도적인 천재들은 저도 모르게 '견적'을 보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 바로 견적이 나온다.
그렇기에, 그렇게 견적이 나오지 않는 상대에게 강렬한 호기심을 느끼고 마는 것이다.
-아하하. 조금 묘한 기분이네요.
재능이라는 단어는 도진과 친하지 않았다.
그런 도진에게 재능의 화신이라 해야 할 만한 사람이 관심을 보이고 있으니 묘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허나 그 기분을 오래 만끽할 수는 없었으니 유지은의 열렬한 시선에 집행부의 모든 시선까지도 도진에게로 모이고 말았기 때문이다.
도진은 소리 내어 아하하,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선배. 집행부의 1학년 김도진입니다."
도진의 대답에 유지은이 두 손을 마주쳤다.
"아! 네가 바로 잠룡이구나.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검봉 선배가 알아봐 주시니 영광이네요."
"얼마나 대단한가 했는데 진짜 대단하구나, 너."
"감사합니다."
훅 다가오는 달콤한 향기와 숨결에 도진은 상체를 뒤로 물려야만 했다.
유지은의 관심은 온통 도진에게로 쏠려 있었다.
마치 주변의 모든 것이 없는 것처럼.
유일하게 색깔이 깃든 눈앞의 상대에 집중하여 낱낱이, 무엇 하나 남기지 않고 알아야겠다는 기세에 도진은 당황했고 그렇기에 반대로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러면 안 돼.'
분위기와 흐름을 바꿔야 했다.
이대로는 자신은 물론이고 유지은에게도 좋지 않았다.
그래서 도진은 자연스럽게 손을 옆으로 향하며 말했다.
"이쪽은 서소담이에요. 저랑 동기고 역시 집행부예요."
"아, 응. 그렇구나. 안녕."
"네. 안녕하세요."
도진의 손을 따라 소담에게 시선이 닿자 유지은이 인사했고 소담도 마주 인사했다.
소담은 조금 경계하는 기색이었으나 유지은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물길을 돌린 도진이 오대용과 주정아, 나지윤까지 1학년의 나머지 친구들까지 인사를 나누도록 했다.
다행히 아직 망가지지 않은 유지은은 도진의 의도에 따라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눔으로써 분위기가 어색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내일부터는 수업 나오는 거지?"
한유아의 물음에 유지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기왕 입학했으니 졸업은 해야지."
그러면서 또 시선은 도진을 향한다.
학교를 졸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진에게 볼일이 있어서, 라는 의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 의도는 당장 행동으로 옮겨졌다.
다음날부터 바로 학교에 이런 의문이 퍼져 나갔다.
-왜 검봉이 잠룡을 따라 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