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자리를 떠난 도진이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다름 아닌 가장 처음 방문했던, 담당 공무원이 업무를 보던 별관이었다.
"어, 어떻게 오셨습니까?"
처음과 다르게 온전히 존재감을 드러내며 방문한 도진을 마주한 담당 공무원은 불편한 기색이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그 모습을 보며 도진은 지금 발생한 문제에 관해 그 또한 전해 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쉽게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었다.
"큰 나무가 있는 쪽 무대에서 문제가 생겨서요."
"아, 예. 전해 들었습니다."
듣기는 했는데 어떻게 우리 쪽에서 해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 말이 생략된 대답에 도진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저희 쪽에서 어떻게든 공연은 가능하도록 손을 좀 보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손을 보신다구요?"
"예. 뭐 시간도 촉박하고 크게 할 수 있는 건 없겠지만 적어도 안무 정도는 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어서요."
"음……."
눈과 함께 머리를 굴리는 공무원은 도진이 무엇을 할 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그저 그런 엔터의 스태프였다면 딱 잘라 거절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건 관현 그룹마저 박살내 버린 '바로 그 잠룡'이었다.
안일하게 대처했다가 똑같은 전철을 밟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애초에 문제의 원인이 그들에게도 있었기에 더더욱.
그래서 고민하던 공무원은 말없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도진의 점점 무거워지는 압박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에라 모르겠다.'
뭘 하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상식적인 선에서라면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다.
이대로 진행해봐야 뒷말이 나오긴 매한가지니 그냥 요구를 들어주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행사가 끝나면 그 무대는 잔디 정원으로 새로 꾸밀 예정이었으니 나무와 주변 경관만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는 손을 쓰셔도 괜찮습니다."
도진이 만족스런 얼굴로 웃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이야기를 마친 도진은 미련없이 별관을 나왔다.
그리고 지체없이 생각해 두었던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그 목적지란 다름 아닌 공원의 외곽, 아직 공사가 진행 중인 현장이었다.
오늘 행사가 진행되는 공원은 아직 완공된 곳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공사가 끝났지만 그 중요도가 덜한 외곽 지역은 아직 공사가 계속되고 있었다.
도진은 공원 안으로 운전해 들어오며 흘끗 그것을 확인해 두었고 다행히 아직 현장은 열려 있었다.
"어, 무슨 일입니까?"
안으로 들어서니 현장 관리 소장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다가왔다.
그 뒤로는 6시가 다 돼 가는 시간이어서 그런지 현장을 정리하고 있는 모습들이 보였다.
도진이 인사하고선 말했다.
"큰 나무가 있는 쪽 바닥에 관해서 좀 말씀드릴 게 있어서요."
"아, 거기요?"
"예."
"어제 아침인가 젊은 친구가 와서 말하더라구요. 어차피 위에 간이 무대 설치할 거고 철거해야 하는 곳이니까 대충 메꿔만 놓으라고. 그래서 그렇게 해뒀죠. 어? 우린 이렇게 안 했는데. 미장까지야 안 했지만 이렇게 개판으로 붓지는 않았어요."
관리 소장은 도진이 카메라로 찍은 현장의 사진을 보여주자 고개를 저으며 그렇게 말했다.
'역시.'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도진은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무대가 되어야 할 곳은 고의로, 악의 가득하게 휘젓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형태로 시멘트가 두텁게 굳어 있었다.
확인을 마친 도진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그런데, 아무래도 시멘트를 좀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몇 가지를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어떤 게 필요하신가요?"
"오함마랑, 폐기물 담을 마대자루, 삽 두어 자루 정도만 빌려주시면 좋겠는데 가능할까요?"
"예, 뭐 그 정도야 얼마든지."
설마 인부들 데리고 가서 작업하라는 소리는 아니겠지, 하고 지레 걱정했던 관리 소장은 장비만 빌리겠다는 도진의 말에 흔쾌히 허락하며 물건들을 내 주었다.
"감사합니다."
도진은 그것들을 가지고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어? 잠룡이다."
"진짜네? 근데 저거 뭐야?"
"싸, 싸우러 가나?"
새로 개장한 공원.
아이돌들을 초청해 행사를 한다는 소식까지 더해졌기에 꽤 많은 사람들이 공원에 입장해 있었다.
그 사람들의 시선이, 이곳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품들을 들고 걷는 도진에게로 모였고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도진은 그 사람들과 함께 현장에 도착했고 다른 물품들을 내려 놓은 뒤 슬래지햄머를 들고 '무대' 앞에 섰다.
보기 싫게 부글거리며 일렁이는 두터운 악의가 그 형태 그대로 굳어 버린 듯 엉망인 시멘트 무대.
이 무대가 안 그래도 상처가 많은 아이들에게 또 상처를 주었다.
보기 싫은 무대다.
부숴 버리고 싶다.
그리고 도진은, 그 생각을 실행할 수 있는 무림인이었다.
스윽-
"어, 어어……?"
슬래지햄머를 높이 드는 도진의 행동에 지켜보던 사람들이 입을 벌렸다.
설마.
도진은 그 설마를 시멘트 무대와 함께 부수듯 슬래지해머를 내리쳤다.
꽈아아아앙!!
폭탄이 터지는 듯한 폭음이 퍼져 나갔다.
"헉!"
"지, 진짜 하네."
입을 쩌억 벌린 사람들이 웅성인다.
허나 도진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슬래지해머를 내리쳤다.
꽈아아아아앙!!
이번엔 더 커다란 소리가 난다.
허나, 두터운 시멘트 바닥에는 금조차 가지 않았다.
"아……. 안 되네."
"저건 전동 공구 아니면 아무리 무림인이라도 힘들지."
때아닌 폭음에 몰려든 사람들이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무림인은 보통 인간을 초월한 힘을 낼 수 있는 사람들이다.
허나 그렇다 해도 한계는 있었다.
아직 '고등학생'인 도진이 두터운 콘크리트 바닥을 슬래지해머 하나로 부수는 건 무리라고, 그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그럼 그렇지.'
그리고 같은 생각을 한, 설마하고 지켜보던 대성기획의 담당자 또한 입꼬리를 올리며 도진을 비웃었다.
욕먹을 걸 각오하고 꼴 보기 싫은 레드슈와 안티체리, 그리고 잠룡까지도 엿 먹어 보라고 벌인 일이었다.
'잠룡 김도진'의 수준을 고려하여 시멘트를 아주 듬뿍 퍼부어 놨는데 그걸 해머 하나로 부수려고 날뛰다니, 멍청한 짓거리였다.
'뭐 그래서 더 기분 좋긴 하네.'
그냥 포기하고 우스꽝스런 무대로 개망신을 당하는 걸로도 충분했겠지만 이렇게 잠룡이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주니 더더욱 보람을 느끼는 그였다.
하지만 그 보람은 너무 이른 것이었다.
꽈아아아앙!
다시 한 번 내리쳐지는 해머.
쩌저저저적!!
그러자 놀랍게도 그 두터운 시멘트 바닥에 금이 가며 주변이 바스러졌다.
"허어억!"
대성기획 담당자의 입이 쩌억 벌어졌고.
"깨, 깨졌다!!"
지켜보던 사람들 중 일부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리고 도진의 안에서 위지혁이 피식 웃었다.
-제법이구나.
-감사합니다.
도진이 내리친 세 번의 해머질에는 모두 의미가 있었다.
단순히 힘으로만 휘두른 게 아니라 정교하게 운용한 내공의 '무리(武理)'가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에선 내공을 '파자결(波字訣)', 그러니까 강력한 힘을 내부에 고루 퍼뜨리는 형태로 담았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사실 내부는 이미 바스러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에서야 '파자결(破字訣)', 순수하게 힘을 폭발시키는 방식으로 내공을 운용했다.
굳이 이런 방식을 취한 것은 혹시 그 파편이 멀리 튀어 예기치 못한 사고를 유발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본디 이런 식의 내공 운용은 대한민국 최고의 인재들이 모인다는 숭무고라 해도 뛰어난 3학년 정도나 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는데 놀랍게도 도진은 이미 그 영역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아니, 사실은 훨씬 오래 전에 도달해 있었는데 육체가 그것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게 옳았다.
그렇게 훌륭하게 내공을 운용하여 두터운 시멘트 바닥의 일부를 부순 도진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그 시선의 끝에는 대성기획의 신입 담당자와 공무원 담당자가 서 있었다.
"좀 거들어 주실래요?"
"아, 아? 예, 예!"
"마대 자루랑 삽 가지고 오셔서 이것 좀 담아주세요."
"알겠습니다!"
대성기획의 신입 담당자는 마대자루와 삽을 들고 달려와 잔해를 담기 시작했다.
허나 공무원 담당자는 눈치만 보고 있다.
도진이 다시 말했다.
"보고만 계시지 말고 움직이시는 게 어때요?"
공무원 담당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왜……."
"태만으로 인한 결과에 책임을 지셔야 하니까요."
"무슨……!"
대꾸하려던 공무원 담당자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옅게 웃고 있던 도진의 표정이 서늘해졌기 때문이다.
기세를 일으켜 핍박하지 않았다.
허나 도진의 시선은 그것만으로도 '죄를 지은 자'가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게 만드는 어떤 힘이 깃들어 있었다.
"그 사람들이 알아서 하겠지. 그런 생각으로 맡은 일을 방치하고 책임을 다하지 않으셨죠. 그 결과가 이것이에요."
"무대를 기다렸던 저 아이들이, 간절히 이루고 싶었던 꿈을 이루기 위해 상처를 딛고 일어났던 저 아이들이 당신의 태만으로 인해 얼마나 상처를 입었을지, 짐작할 수 있나요?"
"……."
"그러니까 최소한의 책임을 지세요. 그게 '도리'라는 거니까요."
거기까지 말한 도진은 고개를 돌리고 다시 슬래지해머를 들었다.
꽈아아아앙!!
꽈아아아앙!!
폭음이 계속해서 터진다. 두터운 악의는 도진이 내리치는 슬래지해머에 계속해서 잘게 부서졌고 대성기획의 신입이 그것을 삽으로 퍼 마대자루에 담았다.
퍽! 퍽!
거기에 잠시 굳어 있던 공무원 담당자가 삽을 들고 가담했다.
표정은 좋지 않았지만 도진의 말에 굴복하여 몸을 움직인 것이다.
무시할 수도 있었다.
허나 인간으로서 가장 밑바닥에서 들려오는, 외면한다면 평생을 두고 떳떳할 수 없을 거라는 외침을 외면하지 못했다.
주변의 등을 떠미는 시선보다도 내면의 그 외침이 더 컸다.
꽈아아아앙!
그리하여 결국, 대성기획이 준비한 악의 가득했던 무대는 도진의 슬래지해머에 모조리 박살이 났다.
그리고 도진까지 삽을 들고 그것들을 마대자루에 모조리 담음으로써 흔적까지 정리되었다.
먼지투성이가 된 도진이 무대를 둘러보았다.
시멘트가 모두 사라지고 흙으로 된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시간은…….'
시간을 확인해 보니 6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툭툭.
도진은 먼지를 털어내고서 레드슈와 안티체리에게 다가갔다.
조금 거리를 두고 멈춰 서서 말했다.
"미안해요. 재료랑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우 명장님이랑 같이 익힌 목공 기술로 번듯한 무대를 만들어 줬을 텐데, 그것까진 해주지 못할 것 같네요."
"……."
"이해해줘요. 저도 아직 초보 매니저잖아요."
"으으응, 이걸로 충분해."
겨우 입술을 뗀 건 안티체리의 리더 주교은이었다.
"맞아. 저 정도면 충분하지."
설현주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훌륭한 거 아냐?"
은미소가 떨리는 목소리에 장난기를 담았다.
"얼굴 닦아 줄게."
우두커니 도진을 지켜보던 박소진이 생수병의 물로 수건을 적시며 다가왔다.
그것을 도진이 손을 들어 막았다.
"내가 닦을게. 너희는 무대 준비해야 하잖아. 먼지 묻으면 안 되지."
"먼지는 털어내면 되지!"
도진이 피식 웃고선 신묘한 무흔잠영의 움직임으로 다가오던 소진을 피해 물러났다.
그리고 언제 낚아챘는지 모를, 소진이 물로 적신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말했다.
"됐으니까 무대나 준비해. 내 가수들 서포트하는 게 매니저가 할 일이잖아. 나는 매니저가 해야 할 일을 했으니까, 너희랑 누나들은 가수가 할 일을 해야지."
도진이 씨익 웃으며 레드슈와 안티체리를 두 눈에 담았다.
"할 수 있죠?"
그것은 답이 정해져 있는 물음.
"……응!"
그리고 그 결과 또한, 이미 정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