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184화 (184/741)
  • 183화

    지금 세계는 전 국가적으로 친환경 정책을 밀고 있다.

    소극적이 아니라 아주 적극적으로, 선진국들이 협력하여 사막을 녹지화하는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있을 만큼 말이다.

    이유는 무공이다.

    무공의 근간이자 인간이 무공으로 초월적인 힘을 낼 수 있게 해주는 내공.

    그 내공을 쌓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자연지기(自然之氣)였으니까.

    자연지기란 말 그대로 자연의 힘이며 이 자연의 힘의 '밀도'가 높을수록 내공 수련의 효율이 높아진다.

    내공 수련의 효율이 높아지면 자연스레 무인의 수준 또한 높아지며 이는 국력과도 직결된다.

    때문에 선진국일수록 환경 보존을 넘어 '환경 강화'를 위해 더 많은 예산을 투자하고 있었다.

    이런 배경으로 전 지구적으로 녹지의 비율이 늘고 있었으며 나름 '무공 선진국'인 한국 또한 상당한 예산을 녹지 조성 사업에 투자하고 있다.

    이번에 레드슈와 안티체리가 공연을 하게 된 공원 또한 그렇게 시에서 예산을 투자하여 새로 조성한 녹지 공원이었다.

    스태프용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렸다.

    "와, 예쁘네요."

    "그러게."

    레드슈와 안티체리의 멤버들은 여름의 더위가 남아 녹음으로 가득한 공원의 풍경에 눈을 반짝였다.

    "아직 완공된 건 아닌가 보네요."

    감성 충만한 걸그룹 소녀들과 달리 도진은 아직 공사가 진행 중인 듯한 흔적에 먼저 눈길이 갔다.

    함께 온 스태프 중 한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공원과 호수를 포함한 대부분의 건물들은 완공이 되었는데 일부 공사는 아직 진행 중이라고 하네요. 그래서 당분간은 오전 11시에 개장한다는군요."

    앞으로 일주일 동안 오전 6시부터 10시까지 공사를 진행하여 완벽하게 마무리를 할 예정.

    녹지 공원에 어울리지 않는 공사 현장의 흔적들은 그런 배경이었다.

    굳이 그럴 거면 일주일만 개장을 미루는 게 낫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드는 도진이었지만 본래 그리 깔끔하게 맞아 떨어지는 일은 드문 게 사회의 일상이라는 걸 알았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간단히 넘어갔다.

    "뭐, 공무원들의 일처리는 대략 이런 느낌이죠."

    이야기를 나누며 담당자를 찾아갔다.

    "오늘 공연하실 분들입니까?"

    여름용 양복을 입은 중년인이 흘끗 일행을 보며 물었다.

    피곤하고 또 귀찮은 티가 역력한 것이 좋은 첫인상은 아니었으나 스태프들의 대표는 전혀 티내지 않고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바른 엔터에서 왔습니다."

    "그러시구나. 저기 본관 좌측에 천막 보이시죠? 저쪽에 가시면 이번 공연 담당자가 있으니 그쪽이랑 이야기하시면 됩니다."

    "예. 수고하세요."

    인사를 하고 나와 천막을 향해 걸으며 스태프들이 공무원을 가볍게 씹는다.

    "어휴, 대놓고 귀찮은 티 팍팍 내네요."

    "뭐 공무원들이 그렇지."

    "공원 오픈 당일이라 뭐 일도 많았을 테니 이해하지 못 할 건 아니지만요."

    "우리 수입가위님이 나서셨으면 달랐을지도요."

    그러면서 두리번거리는데 바로 곁에 있는 도진을 찾지 못하는 기색이다.

    당연한 일이었는데, 지금 도진은 무흔잠영의 묘리에 따라 스스로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무흔잠영의 궁극적인 이치는 스스로를 주변과 동화하는 것이다.

    숨기는 게 아니라 동화하는 것. '숨음으로써 부자연스러운 것'은 감각을 자극하지만 길거리의 돌멩이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아직 도진은 그 이치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끝자락이나마 잡음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옅게 하여 주변에 섞을 수는 있었고 그 때문에 아까 담당자도 도진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굳이 시선을 모을 필요는 없지.'

    웹 예능을 위한 촬영의 허가는 받지 않았기에 차에서 내리며 생방송도 종료한 상황이다.

    이번 행사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레드슈와 안티체리여야 했기에 도진은 불필요한 시선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의 존재감을 지운 것이다.

    팬들이 정말로 찾아오거나 별다른 일이 없다면 나서지 않을 생각이었던 도진은, 그러나 천막에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살을 찌푸려야 했다.

    "아, 바른 엔터 분들이시구나. 여기 말고 공원 가운데 호수 있거든요? 그 옆에 보시면 큰 나무 있는 공터 하나 있을 거예요. 거기서 리허설 하시면 됩니다."

    "……예?"

    무성의하게 흘끗 일행을 보고선 바로 자기 일을 하며 주워담는 말에 스태프의 대표가 당황했다.

    사전에 전혀 듣지 못했던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무대가 둘입니까?"

    표정을 수습하며 묻는 스태프에게 담당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공원 홍보가 목적이라 무대를 둘로 나눴거든요. 여기 메인 무대에서 다섯 팀이 공연하고 그쪽 무대에서 세 팀이 공연하기로 했습니다. 전달이 안 됐나요?"

    "…예. 처음 듣는군요."

    스태프의 대답에 담당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험상궂은 인상에 덩치가 큰 사람이었기에 위협적이다.

    "허, 이런 씨발. 아, 죄송합니다. 저희 쪽에 이번에 신입이 하나 들어왔는데 일 처리를 똑바로 안 했나 보네요."

    "……."

    가만히 듣고 있던 도진은 그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장호에게 배운 '사람을 보는 법'과 '말을 듣는 법'이 담당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악의를 가지고 의도한 일이라는 걸 알려 주었으니까.

    "일단 빨리 무대 쪽으로 가보셔야겠습니다. 시간이 촉박하니까요."

    "…알겠습니다."

    천막을 나오는 바른 엔터 일행을 흘끗 보는 담당자의 입꼬리가 몰래 비뚤어졌다.

    도진은 그것 또한 놓치지 않으며 스태프들에게 말했다.

    "오늘 행사 담당이 어딘가요?"

    스태프의 대표가 답했다.

    "대성기획이라고, DS 엔터 계열입니다."

    DS 엔터.

    3대 기획사 중 한곳으로 그 덩치에 걸맞지 않게 양아치 같은 곳이라는 소문이 인터넷에 자자한 곳이다.

    이른바 파도 파도 괴담만 나오는 '파파괴'.

    그리고 설광수가 한 때 몸담았던 곳이기도 했다.

    '견적 나오네.'

    이번 관현 게이트로 인해 DS 엔터 또한 뒤집어졌는데, 소속 아이돌들 중 여럿이 문방구 엔터의 마약 사건과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안티체리 같은 '힘없는 아이돌'들은 문방구 엔터를 통해서만 마약을 살 수 있었지만 소위 말하는 잘 나가는 아이돌들은 여러가지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마약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잘 나가는 아이돌 몇이 관현 게이트와 엮이며 DS 엔터는 큰 타격을 입었고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이렇게 수작을 부렸다고 도진은 바로 그림을 그려낼 수 있었다.

    '겨우 이 정도가 아니겠지.'

    DS 엔터가 바른 엔터에 엿을 먹이려 했다면 겨우 이 정도로 끝낼 리가 없다.

    도진은 그렇게 생각했고 그 생각은 빗나가지 않았다.

    "아니, 이게 뭡니까!"

    화난 목소리가 들린다.

    다가가니 호수 옆 공터에서 언성을 높이는 공무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있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 남자 앞에는 셔츠 소매를 걷은 젊은 남자가 땀에 흠뻑 젖은 채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고 있다.

    바른 엔터의 스태프 대표가 다가갔다.

    "저, 무슨 일입니까?"

    본능적으로 무대와 관련된 일임을 알 수 있었기에 물었고 거기에 공무원이 공터 전체에 그늘을 드리울 정도로 커다란 나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보십쇼. 저거."

    모두의 시선이 향한다.

    나무 앞으로 공연을 위해 준비한 무대가 보인다.

    천막과 의자, 울타리 등은 이번 무대만을 위해 임시로 준비한 티가 역력했다.

    흔히 TV에서 보았던 번듯한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임시라는 걸 감안하면, 케이블 방송으로도 송출되지 않을 작은 행사라는 걸 감안하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무대'는 아니었다.

    "……."

    도진의 얼굴이 낮게 가라앉았다.

    바른 엔터의 스태프들은 물론이요, 레드슈와 심지어 안티체리까지도 덜컥 굳어 버렸다.

    공연을 해야 할 무대는, 엉망으로 굳은 시멘트로 울퉁불퉁했다.

    "저게 왜……."

    "아 그러니까 그거 때문에 나도 미치겠다는 겁니다! 무대를 만들라고 했는데 저게 뭐나고요!!"

    "죄, 죄송합니다!"

    "아이 씨! 죄송하다고 끝날 일이야 이게!!!"

    버럭 소리치는 공무원.

    어쩔 줄 모르고 그저 고개를 숙이기 바쁜 남자.

    알 수 있었다.

    이게 대성 기획이 준비한 수작임을.

    툭.

    춤을 추기는커녕 걷기도 힘들 만큼 울퉁불퉁한 시멘트 바닥은 마치 깔린 악의를 상징하는 것처럼 두터웠다.

    엉망진창으로 치는 파도의 한 순간을 그대로 굳힌다면 이러할까.

    이런 바닥에서는 결코 공연을 할 수 없다.

    무공을 익힌 레드슈는, 무공을 익혔기에 가능한 수준 높은 퍼포먼스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이런 바닥에서는 무리였다.

    의자를 이용한 퍼포먼스를 준비한 안티체리 또한 마찬가지다.

    설령 의자를 쓰지 않는 안무로 대체한다 해도 여기서 할 수는 없다.

    "도대체 일처리를 어떻게 했길래 일이 이 지경이야!!"

    버럭 소리치는 공무원.

    도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본래 공무원이 관리감독을 했어야 할 일이다.

    그것을 하지 않아서 일이 이 지경이 됐으니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서라도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대형 사고를 친 대성기획의 신입은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고.

    그것까지도 모두 의도된 것이다.

    태만과 무지를 이용한 악의가 낳은 어이가 없을 정도의 사고.

    바른 엔터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항의해 봐야 책임을 뒤집어 쓰게 될 신입은 일을 해결할 능력이 없고 공무원들 또한 책임을 지려 하지 않을 거다.

    행사비는…… 모르겠다.

    토해낼 일은 없을 거 같긴 한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

    도진의 눈에 들어 온, 무대를 기대했던 레드슈와 안티체리의 무겁게 가라앉은 모습들이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떨리네요.

    -사실은 나도 그래.

    그야말로 생일 전날밤 선물을 기대하는 소녀처럼 들떴던 동갑내기 아이돌.

    그리고 전생의 기억을 가진 도진의 입장에서 보면 마찬가지로 어린 안티체리의 기대로 발갛게 물들었던 볼.

    "돌아 버리겠네."

    "이, 일단 메인 무대에서 공연할 수 있도록……."

    "시간이 안 되잖아! 시간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건 바른 엔터의 레드슈와 안티체리, 그리고 작은 소속사의 이름없는 남자 아이돌 한 팀까지 총 세 팀이다.

    동시 공연을 상정하고 준비한 행사였기에 이 무대를 쓸 수 없게 되면 세 팀은 설 곳이 없다.

    서야 한다면, 저 말도 안 되는 '무대'에서 공연해야만 하고 그것은 결코 정상적인 공연이 될 수 없다.

    우스꽝스러운 광대가 되어야만 했다.

    "…여기서 공연합시다."

    "…예?"

    신입이 고개를 들며 반문하자 공무원은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아 여기서 공연하자고요! 안 그럼 어쩔 거야!"

    공무원의 선언에 이름을 모르는 무명 남자 아이돌 팀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그들은 격렬한 칼군무를 내세운 무대를 소화해내야 하는데 역시나 저 무대에선 무리였다.

    "뭐 많은 거 안 바랍니다. 그냥 공연만 해주세요."

    공무원은 아이돌들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돈은 줬으니 무대가 이렇게 됐지만 공연을 해라.

    그런 말이었다.

    "언니."

    "…해야지.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니까."

    여은영의 불안한 얼굴에 그렇게 말하는 건 안티체리의 큰언니 설현주다.

    허나 그렇게 말하는 설현주의 얼굴 또한 편치 않았다.

    편치 않은 얼굴에, 체념의 빛이 묻어났다.

    도진은 그런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섰다.

    "잠깐 다녀올게요."

    "어? 어디 가시게요?"

    스태프의 물음에 도진은 씨익 웃었다.

    "매니저 역할 좀 하게요."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지나 돌아온 도진의 손에는 슬래지햄머, 통칭 '오함마'가 들려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슬래지햄머를 든 도진에게 집중되었다.

    "어, 어어……?"

    천천히 걸어 시멘트 바닥의 앞에 선 도진이 무엇을 할지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었다.

    허나 그것을 실행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기에 모두가 설마하는 얼굴이 되었는데, 도진은 그 설마를 망설임없이 실행해 버렸다.

    꽈아아아앙!!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