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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178화 (178/741)
  • 178화

    아직도 아이돌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남아 있으신가요.

    도진의 그 물음은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진위 여부가 아닌 그녀들의 의지를 확인하기 위한 물음이었고 거기에 대한 안티체리의, 주교은의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응. 남아 있어. 아니, 남아 있는 게 아니라 그대로야."

    그 답은 이런 상황에서도, 아니 그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을 것이었다.

    안티체리는 정식 데뷔 무대를 가지기도 전부터 욕을 먹어야만 했던 걸그룹이었다.

    설광수 특유의 과도한 언론플레이 때문이었는데, 이것이 눈살 찌푸려질 정도로 무리수가 많았다.

    설광수는 그렇게 될 것을 알면서도 이 방식을 고수했는데 무플보다 욕이 훨씬 효과가 좋다는 지론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런 언론플레이와 잡음으로 인한 노이즈마케팅은 소위 말하는 '3대 기획사'가 아닌 문방구 엔터 출신의 안티체리가 그 못지 않은 화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으니까.

    심지어 '단가'도 훨씬 가성비가 좋다.

    다만 한 가지, 거기에 욕을 먹는 안티체리 당사자들에 대한 배려가 없었을 뿐.

    안 좋은 관심 속에서 안티체리는 데뷔 무대를 가져야만 했고 조롱도 들어야 했다.

    허나 그럼에도 주교은은 웃었다.

    무대에서, 진심으로 웃었다.

    아이돌로서 무대에 서고 활동을 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상처를 딛고 웃을 수 있었다.

    그만큼의 열정이 있었기에 원년 멤버의 대부분이 떠나고, 새로 들어오고 또 교체되는 중에도 안티체리는 주교은을 중심으로 하여 유지되었다.

    살인적인 스케쥴과 꼬리표처럼 붙은 조롱, 그로 인해 쌓인 피로와 울화 때문에 대기실에서 서로 쌍욕을 하고 폭력을 쓰는 대형 사고가 터졌음에도.

    스폰서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설광수가 어찌어찌 무마시켰으나 '스폰 걸그룹'이란 꼬리표가 떠나지 않게 되었음에도.

    이제 만천하에 드러난 스폰과 마약, 빚이라는 두려울 만큼의 환경에서도.

    몇 번이고 꺾이고 이내 꿈을 포기하게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시련 속에서도 주교은은, 남은 다섯 멤버는 미운 정 고운 정이 가득한 안티체리의 이름을 버리지 못했다.

    -사실은 마약 때문이었어.

    주교은은 방송에서 그렇게 말했지만 그날 방송을 보았던 사람들은 이제 안다.

    주교은이 정말로 문방구 엔터에서 나오지 못했던 이유.

    그리고 아이돌을 포기하지 못했던 이유.

    그 진짜 이유가.

    -사실 나는 정말정말 아이돌이 하고 싶었거든.

    아이돌이라는 꿈을 이루고 그것을 계속 해 나가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녹화본을 보았던 도진 또한 그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다.

    방송임에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모니터 너머의 표정만으로도.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목소리만으로도.

    주교은은 정말로 아이돌을 하고 싶어했고, 그것은 주교은에 이어 폭로했던 안티체리의 멤버들 또한 마찬가지임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도진은 예상했던 대답에 미소지었다.

    "역시 그렇죠?"

    주교은 역시 그동안 TV에서 전혀 보여주지 않았던 하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지만 이제는 정말 다른 길을 찾아야지."

    꾸역꾸역 아이돌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건 또 아이러니하게도 문방구 엔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라하다 해도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숙소가 있었기 때문에.

    그 숙소에 지원되는 생필품과 쌀 등이 있었기 때문에.

    무대에 서기 위한 화장품과 의복이 제공되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그 무대, 일거리를 잡아주었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들에도 댈 수 없을 만큼의 돈을 받으면서도 안티체리는 아이돌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 문방구 엔터는 없다.

    최악의 이미지를 가지고 수익성조차 보장되지 않는 안티체리를 굳이 데려가려는 소속사는 당연히 없다.

    괜히 과거 생각나게 하는 인터넷 방송조차 접고 그녀들은 완전히 다른 일자리를 찾고 있던 중에 도진의 연락에 다시 모인 것이었다.

    "…처음에 말씀드렸던 대로, 저는 한 가지 여러분들에게 제안을 하고 싶어서 연락을 드렸어요."

    "그게 뭔데? 혹시 증언이라도 더 필요한 거야? 그거라면 얼마든지 더 해 줄게."

    이쯤되면, 수많은 눈칫밥을 먹었던 안티체리라면 당연히 알 만한 이야기인데도 굳이 모르는 척한다.

    "아뇨. 그건 괜찮아요."

    그래서 도진은 자신의 입으로 제안했다.

    "아이돌, 다시 도전해 보지 않으실래요?"

    "……."

    조용해진다.

    갑작스런 침묵이 내려앉는다.

    그러나 도진을 마주한 그녀들의 눈동자는 거세게 떨리고 있었다.

    주교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시…… 도전해 보자고?"

    "네. 여러분들을 영입하고 싶어하는 소속사가 있거든요."

    "사기…… 지?"

    눈가가 젖어든다.

    "뭐 신생이긴 한데 오성 계열사니까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거예요. 저도 같이 갈 거고 나성보 변호사님, 나성보 변호사님 아시죠? 나 변호사님도 같이 가실 거예요."

    "조건이 너무 좋잖아. 안 믿겨."

    "아, 그건 아닐걸요? 조건이 좋다 뿐이지 어디까지나 비즈니스거든요? 우쭈쭈 안 해 줄 건데요?"

    "거짓말 하지 마."

    "지원을 해 줄 뿐이고 결과는 여러분들 하기 나름이에요. 그리고 아이돌이란 부분만으로 영입하는 것도 아니구요."

    "거기가 업계 노하우는 많은데 정작 소속 연예인은 없던 곳이거든요. 그러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 무려 업계 9년차인 여러분들의 경험도 같이 사고 싶어해요. 아이돌 활동도 하면서 회사원 같은 느낌이기도 한 거죠. 어때요, 이러니까 좀 거짓말이나 사기 아닌 거 같아요?"

    웃으며 묻는다.

    주교은은 결국 눈물을 훔치고 말았다.

    "씨발. 쪽팔리게……."

    눈물을 훔치고서 또 물었다.

    "왜 이렇게 잘 해 주는 거야. 이런 거 너무 어색해서 아무리 너라도 믿기 힘들잖아."

    "아, 그건 좀 설득력 없겠지만 그냥 마침 보인 게 여러분들이라서요."

    "진짜 성의없네."

    "근데 뭐 사람 일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사람이 어떻게 논리만으로 살겠어요."

    레드슈에게 안티체리에 관해 들은 게 있었다.

    "그 언니들, 이미지랑 다르게 나쁜 언니들은 아니야."

    "그래?"

    "응."

    레드슈는 '그 문방구 엔터' 소속이었던 만큼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거기에 무려 숭무고 합격생들로 이뤄진 그룹이란 것이 강조되다 보니 질투나 시기도 샀고 말이다.

    "안녕하세요."

    "좀 재수 없네."

    "그러게. 겉으로는 모범생인 척 해도 속으로는 깔보고 있을지도 모르고 말야."

    인사하는 그녀들을 모른 척하며 뒷담화, 사실은 들으라고 '앞담화'를 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레드슈는 지나칠 수밖에 없었고 그런 그녀들을 그제서야 선배들은 지적한다.

    "얘! 너희들!"

    "네?"

    "선배를 봤으면 인사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니니?"

    "어떻게 뻔히 보고도 모른 척 지나갈 수 있어? 이건 좀 아닌 거 아냐?"

    "그게……."

    뻔한 수작이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들은 그저 죄송하다고 고개 숙일 수밖에 없었고 그것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상황.

    "아주 가지가지로 지랄을 하는구나."

    "앗!"

    바로 그때 나서 주었던 것이 안티체리였다.

    "서, 선배님들."

    "재수없으니까 후배 교육은 좀 나중에 할래?"

    "예, 예."

    안티체리는 2세대 걸그룹이었다.

    이제는 아이돌 활동을 하지 않는, 차라리 말 그대로 연예인으로서 각 분야에서 롱런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위가 없는 세대 말이다.

    이 바닥에서 선후배 관계는 중요하지만 그보다 인기가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도 체면을 차릴 때의 이야기다.

    더 떨어질 곳도 없고 체면 차릴 것도 없는 안티체리는 말년 병장급의 지위요 잘못 물렸다간 100% 광견병으로 고생한다는 이야기가 돌 만큼의 재해였기에 그야말로 언터쳐블이었다.

    "너희들도 좀 가지?"

    "네, 네에."

    안티체리는 같은 소속사인 레드슈에게도 고운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하지만, 턱짓으로 어서 가라는 은밀한 신호를 레드슈는 결코 놓치지 않았다.

    레드슈를 배려해 나서 주었다. 그러지 않아도 됐을 텐데.

    오히려 저 꼴을 보라며 안 좋은 소리만 들을 텐데.

    그러면서도 혹여 엮일까봐, '가해자'가 될까 봐 그 이상의 악역을 자처해 주었다.

    그러니까 레드슈는 안티체리를 항상 선배님이라 불렀고 백안시하지 않았다.

    안티체리도, 레드슈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도진은 한 팀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오대용의 말에 안티체리는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인기나 성공과 별개로 안티체리는 논리적으로도 회사에 도움이 될 만한 인재였다.

    아이돌이 아니더라도 그간의 경험이 회사의 직원으로서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정을 완전히 제외하고 객관적으로 말할 수도 있었다.

    감정적으로는, 상미 때와 마찬가지로 본성은 선한 안티체리는 얼마든지 갱생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에.

    그 어떤 상황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은 '선한 사람'에게는 한 번쯤 기회가 주어져도 괜찮다고 생각하기에.

    도진은 마침 손을 내밀 수 있는 거리에 있던, 눈에 띄었던 안티체리에게 손을 내밀기로 한 것이었다.

    "대단한 건 안 해 드릴 겁니다. 제가 이래봬도 감정적이지만 원칙주의자라서요. 무조건 대박나도록 해 드릴 것도 아니고 전폭적인 지원이라고 하지만 상식적인 선에서 해 드릴 겁니다. 그러니까 뭐, 당분간은 최저 시급 받는 알바 정도밖에 안 될 것 같기도 하네요.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한 번, 만나 보시는 건 어때요?"

    그런 도진의 제안에, 안티체리의 대답은 역시 정해져 있었다.

    "한 번, 만나볼래."

    흔히 말하는 '답정너'였다.

    * * * *

    그리하여 안티체리는 바른 엔터에 합류하게 되었고 계약을 결정한 레드슈와 다시 한솥밥을 먹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며칠 뒤.

    "지각 안 하셨네요?"

    "야. 이래봬도 우리 회사 사정 때문 말고는 지각한 적 한 번도 없거든?"

    "에이, 농담이잖아요. 누나들 바른 생활 소녀인 거 아니까 찐텐으로 받지 마요."

    "어휴, 저거 진짜 아저씨랑 영혼 바뀐 거 아냐? 진짜 능글능글하다니까."

    투덜거리면서도 웃으며 안티체리는 자리에 앉았다.

    회의실에는 오대용과 주정아, 김도진, 그리고 레드슈와 안티체리가 모였다.

    전문가들의 일처리 덕분에 모두가 깔끔하게 계약을 완료하고 새로운 숙소도 잡힌 가운데 앞으로의 일정을 논의하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오늘 모인 건 공지드렸던 대로 레드슈와 안티체리의 앞으로의 활동 방향을 의논하기 위해서입니다. 괜찮다 싶은 의견이 나오면 전문가 분들이 잘 다듬어 주실 테니 부담없이 이야기해 주세요."

    "음……."

    오대용의 말에도 쉽사리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관현 게이트라는 거대한 사건의 여파가 아직 몰아치는 가운데 그 중심에 있었던 레드슈는 무엇을 해도 주목 받겠지만 동시에 그 주목은 결국 관현 게이트와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아이돌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해야만 하는 레드슈에게는 역으로 속박이나 다름없는 관심이었다.

    안티체리는 더욱 힘든 것이,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피의자'였다.

    설광수 일당에 의해 강제로 하게 됐다지만 어쨌든 마약을 구매해 사용하고 말았으니까.

    처지를 감안하여 집행유예가 선고되었지만 보호 감찰과 함께 재활을 겸한 교육 이수가 조건으로 붙었다.

    이런 상황에서 관현 게이트의 당사자들이기까지 하니 뭘 어떻게 해야 아이돌로서 활동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누구 하나 섣불리 의견을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도진이 의견을 낸 것이었다.

    "웹 예능 한 번 찍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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