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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177화 (177/741)

177화

레드슈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필요한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곽필섭 일당을 단죄하는 것.

이것은 도진의 목적이기도 했으며 이를 위해 도진이 레드슈에게 접촉한 것이었다.

곽필섭이 구속되고 문방구 엔터가 폐업한 지금 도진은 자신의 목적을 완수했으며 동시에 레드슈 또한 해방되었다.

허나 이것만으론 레드슈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할 수 없었다.

레드슈의 문제는 '악의로 인해 걸그룹의 꿈을 실현할 수 없게 되는 것'이었으니까.

도진의 목적은 완수되었지만 레드슈의 문제는 아직 현재진행형이었다.

곽필섭 일당의 악의는 사라졌지만 레드슈는 더 이상 걸그룹의 꿈을 계속해 나가기 힘든 처지에 놓이게 됐다.

당시의 도진에게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지만 아마 그렇게 될 거라고 추측할 수 있었고 도와주기로 한 이상 이에 대한 대비 또한 해야만 했다.

이것을 해결해 주어야만 도진의 기준에서 '레드슈를 도와주었다'고 할 수 있었으니까.

방법을 찾기 위해 도진은 고민하고 있었다.

바로 그런 때에 도진의 계획을 어느 정도 알게 된 나지윤이 정보를 주었던 것이었다.

"대용이에게 한 번 말해 보는 건 어때?"

"대용이?"

"응. 대용이 명의로 된 엔터 회사가 하나 있거든."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의외의 정보였다.

도진의 표정에 나타난 그 생각에 나지윤이 멋있게 웃으며 말했다.

"대용이가 원래 아이돌을 좀 좋아했거든."

이 또한 의외의 이야기였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람은 자신에게 없는 것에 끌리곤 한다.

그리고 과거 오대용에게 없었던 것은 다름 아닌 '관심'.

그러니까 대중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아이돌에게 끌리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도 어쨌든 오성의 직계였잖아? 그러니까 무언가 받긴 받았는데 그중 하나가 영선 엔터였어."

말은 엔터 회사인데 소속 연예인이 단 하나도 없는 회사라고 했다.

다만 페이퍼 컴퍼니는 아니고 그쪽 업계의 인력 파견 회사 같은 느낌으로 운영하여 수익을 내는 회사였다.

연예인이 아니라 엔터 업계의 인력을 말이다.

"그러니까 그 회사가 은근히 업계의 마당발이란 말이지. 업무 노하우도 많고. 대용이를 통해서 알아보면 무언가 성과가 있을지도 몰라."

"그렇겠네. 항상 고맙다."

"무얼."

잘난 친구의 잘난 미소를 뒤로 하고 도진은 오대용을 찾아갔다.

레드슈가 아마 소속사를 잃게 될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영입해 줄 만한 곳이 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이 재벌 3세 친구가 대뜸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내가 한 번 영입해 볼까?"

"응?"

"안 그래도 할아버지께 그런 이야기를 들었거든. 너도 제대로 경험을 좀 쌓아야 할 때라고."

오대용은 더 이상 '버림받은 왕자'가 아니었다.

정식으로 오군성에게 무공을 사사받게 되었고 그것은 곧 오성 그룹의 후계자 자격을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와서 회장 자리를 두고 다툴 생각은 없다.

다만 그렇다 해도 오성의 직계인 이상 야인으로 지낼 순 없으니 제대로 경영에 관해 배우고 경험을 쌓아야만 했다.

오대용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엔터 업계에 관해선 쥐꼬리만큼이라도 아는 게 있거든. 그래서 여기부터 시작해볼까 했는데 마치 이러라고 등 떠미는 것처럼 인연이 닿은 것 같은 느낌이야."

그리하여 영선 엔터는 '바른 엔터테인먼트'로 새단장을 하고 혹시 모를 영입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고 이렇게 레드슈와 정말 인연이 닿게 된 것이었다.

"안녕."

"아, 안녕."

생각지도 못했던 대표의 정체에 레드슈는 당황했다.

"정식으로 인사할게. 바른 엔터테인먼트 대표 오대용이야. 그리고 이쪽은…… 경영 2팀 팀장."

"안녕. 바른 엔터테인먼트 경영 2팀 팀장을 맡게 된 주정아야. 일손이 부족하다고 해서 돕게 됐어."

일손이 부족한 건 사실이지만 진짜 이유는 소꿉친구인 오대용을 돕기 위해서. 그리고 곁에 있기 위해서.

허나 도진은 어른답게 그 부분을 알면서도 굳이 말하지 않고 '염화시중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싱긋-

"……."

그 미소에 주정아는 허튼소리하면 지옥을 보여주겠다는 미소로 답했고 말이다.

"들어가자."

여섯 명은 번듯한 회의실에 마주앉았다.

차는 일곱 개가 나왔는데 다름 아닌 딱 맞춰 도착한 변호사, 나성보의 것까지였다.

"이런. 제가 조금 늦었군요."

"오히려 짜기라도 한 것처럼 딱 맞춰 도착하셨는데요?"

"하하하. 그렇습니까."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십니까."

레드슈와도 초면이 아니었기에 분위기는 부드러웠다.

"일단 우리 회사는 한 번도 소속 연예인을 가져본 적은 없지만 업계 인맥이나 노하우만큼은 최상급이라 자부해."

그 말대로였다.

이 회사엔 각계의 전문가들이 직원으로서 고용되어 있으며 이들은 용병처럼 일손이 부족한 곳에 파견되어 온갖 현장에서의 경험을 쌓았다.

업계 특성상 실력 있는 일손은 언제나 부족했기에 이들은 마치 회사원처럼 장소가 바뀔 뿐 고정적으로 일할 수 있었다.

"물론 대표가 나라는 것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겠지만 그 부분도 괜찮아. 내가 완전히 회사를 파악하고 익힐 때까지는 계속 전문 경영인이 운영을 할 테니까."

오늘 계약은 온전히 오대용이 맡게 되었지만 계약을 한다면 추후 세부적인 부분은 전문 경영인의 지휘 아래 조율하게 될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게 계약서야. 한 번 천천히 읽어 봐."

오대용이 내민 계약서를 받아든 레드슈의 시선이 도진에게로 향했다.

도움을 바라는 병아리 같은 시선에 도진은 슬쩍 웃고선 나성보에게로 그 시선을 이었다.

"부탁드릴게요, 나 변호사님."

"예. 지인 찬스 없이 꼼꼼하게 살피겠습니다."

오대용의 앞에서 나성보는 거침없이 레드슈와 함께 계약서를 검토해 나갔다.

어물쩡 넘기는 게 아니라 의문나는 부분이 없도록 천천히.

나성보는 이쪽 전문 변호사는 아니었으나 변호사 업계에서만큼은 절대고수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천재였기에 관련 지식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검토를 마친 계약서는 '업계 최고 대우'라고 할 만한 것임이 증명되었다.

"우리가 연예인이 없지 자금이 없는 건 아니거든. 이래봬도 오성 계열사라고?"

자신만만하게, 약간은 장난기를 담아 말하는데 그 내용은 틀림없는 진실이었다.

"너희가 와도 겨우 둘뿐인 소속 연예인을 밀어줄 능력은 충분히 있어."

'어?'

순간 박소진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둘?'

'둘'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같은 의문을 느낀 유혜진이 슬쩍 손을 들었다.

여은영만큼은 아니어도 낯을 가리는 그녀는, 그러나 궁금한 건 참지 않는 편이었다.

슥-

"저기."

"응. 왜?"

손을 들고 묻는 유혜진에게 오대용의 시선이 향한다.

유혜진이 귀밑머리를 만지며 물었다.

"둘이라고 했는데, 우리 말고 먼저 계약한 팀이 있는 거야?"

유혜진의 물음에 오대용은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먼저 계약한 그룹이 있었어. 너희도 잘 아는 그룹이야."

"우리가?"

"응. 마침 오네."

오대용의 시선이 문 밖으로 향했다.

비록 성적은 하위권이라 해도 숭무고 재학생인 레드슈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기척을 느꼈고 그 기척의 익숙함에 두 눈이 동그래졌다.

"어머, 벌써 다 모여 있네."

"늦어서 죄송합니다아."

여유가 물씬 묻어나는 목소리와 함께 등장한 그녀들은, 바로 레드슈와 한솥밥을 먹던 안티체리의 멤버들이었다.

* * * *

레드슈의 멤버들이 나름의 정리와 다짐을 위해 며칠의 텀을 두었던 시기에 도진은 또 다른 걸그룹 멤버들을 만났다.

그 걸그룹은 다름 아닌 안티체리였는데, 외부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따로 잡은 룸에 앉아 있는 그녀들의 모습을 보고 도진은 조금 의외라는 표정이 되었다.

"생각보다 더 풋풋하시네요."

"……."

그 말은 산전수전은 물론이요 공중전에 우주전까지 겪었다고 자부해도 될 만큼 다사다난했던 아이돌 생활을 해 온 안티체리의 멤버들마저 당황하게 만들 만큼 의외의 말이었다.

'풋풋?'

그녀들은 모두 20대 후반의 나이로 아이돌 생활만 무려 9년을 해 온, '원로급'의 짬을 자랑한다.

거듭된 사건 사고에도 철판 깔고 버티며 섹시 컨셉의 쎈 언니로 이미지가 바뀌기도 한 그녀들에게 있어 '풋풋'이라는 단어는 안드로메다 은하의 이름없는 별만큼이나 멀고도 낯선 단어였다.

심지어 그 말을 한 게 과장 보태 말하면 조카뻘의 고등학생이다.

한데 그보다 더더욱 당황스러운 건, 조카뻘의 고등학생에게 그런 말을 들었는데 기분이 나빠지기는커녕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는 거다.

'뭐야 이거.'

마치 꽤 나이 차가 나는 오빠가 웃으며 말해준다면 이런 기분일까 싶은 느낌.

그래서 그녀들은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이며 무어라 반응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런 모습이, 도진의 미소를 더욱 짙게 만들었다.

도진은 빈말을 하지 않았다.

소속사가 폐업하고 더 이상 아이돌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생각한 그녀들의 '아이돌의 옷'을 벗은 모습은 흔히 말해지던 안티체리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달랐다.

염색했던 머리의 색을 빼고 요란했던 옷 대신 일상복을 입고, 마치 가면처럼 짙고 화려했던 화장까지 지운 그녀들에게는 아직 순수한 소녀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마치 가면을 쓰고 가시를 잔뜩 세우느라 세상의 때마저 묻지 못한 것처럼.

인사를 하고 마주 앉은 가운데 9년 간 리더를 맡아왔던 주교은이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우리 전부에게 연락한 거야?"

주교은을 포함하여 안티체리의 다섯 멤버 모두가 도진의 연락을 받고 이 자리에 나왔다.

외부의 시선마저 피할 수 있는 고급 식당의 룸까지 잡았으니 어떤 중요한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들의 몸을 굳게 만들었다.

그렇게 긴장한 그녀들을 보며 도진은 말했다.

"체할 수도 있으니까 일단 배부르게 먹기부터 해요. 이야기는 그 다음에 하죠. 아, 참고로 제가 쏘는 겁니다. 제가 부탁을 할 거라서요."

도진의 체근에 그녀들은 주문부터 했고 곧 넓은 테이블이 먹음직스런 음식들로 가득 채워졌다.

우물쭈물하지 않고 야무지게 주문을 하는 모습은 과연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였던 안티체리다운 모습이었다.

진수성찬을 즐기다보니 조금씩 긴장도 풀렸고 '에이, 우리가 이제 쫄 일이 뭐 있나' 싶은 분위기도 흐르며 그녀들은 곧 자연스러운 태도를 보여 주었다.

조금씩 농담도 하면서 식사가 끝나고 각자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앞에 두게 되자 그제서야 도진이 본론을 꺼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연락을 드린 건,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어서예요."

"제안?"

"네."

도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눈으로 안티체리의 멤버들을 마주했다.

덩달아 몸을 굳힌 그녀들을 마주하며 도진이 물었다.

"여러분들은, 그래도 아이돌을 계속하고 싶다는 마음이 남아 있으신가요?"

"……아?"

도진을 마주한 주교은의 입술에서 온갖 감정을 담은 목소리가 한마디 의문이 되어 흘러 나왔다.

그런 그녀를 마주하며 도진은 다시 물었다.

"여러분들은, 아직도 아이돌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남아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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