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현금 부자' 관현 그룹. 그 돈줄은 '흑도'였다.
-관현 게이트, 관현 그룹 몰락의 시작인가.
관현 게이트의 여파는 세계 토픽이 될 만큼 엄청난 사건이 되었다.
그 내용이 상상도 못할 만큼 충격적이었는데 사건의 진행은 마치 영웅 소설처럼 거침없이 악을 처단하는 가슴 시원한 내용이었기에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관현의 직계 곽필섭'이 '안개파'를 통해 '일본의 야쿠자'에게서 마약을 밀수했다는 게 드러나며 관현 그룹은 이번에야말로 대들보가 흔들릴 만큼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다.
직원이나 임원도 아니고 무려 직계가 안개파를 이용하여 마약을 밀수했으니 관현 그룹과 안개파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이며 직계가 부릴 정도로 깊은 연관이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흑도가 다른 것도 아니고 외국에서 마약을 들여오는 짓거릴 벌였으니 전국민적인 관심 속에 아예 정부가 나서서 전담 수사본부 설치를 발표할 정도로 일이 커졌다.
이것을 막아주거나 억눌러야 할 정계의 인맥들은 혹여 불똥이 튈까 관현과 손절하기 급급했다.
물론, 그 손절은 나성보가 수사본부를 진두지휘하는 상황에선 어림도 없는 수작이었다.
관련 있는 자들은 누구 하나 벗어나지 못했다. 성역없는 수사가 천명되었고 나성보는 그것을 정말로 실행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는 가운데 정계의 인맥조차 활용하지 못하고 나성보를 필두로 한 수사본부의 활동에 관현 그룹은 치명적인 타격을 피하지 못했다.
드러난, 그리고 앞으로 드러날 위험이 있는 안개파를 모두 잘라내야 했고 그와 관련 있는 모든 것들 또한 잘라내야만 했다.
그것은 관현 그룹의 숨겨진 힘이요 돈줄이었고 저력이었다.
빙산의 일각이란 말은 세상의 진짜 힘 있는 자들에게 모두 적용되는 말.
겉으로 드러난 것의 몇 배나 되는 진짜 몸통을 도려내는 것이었기에 관현 그룹은 허우대만 멀쩡한 약골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럼에도 관현 그룹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었다.
"보고해 봐."
"빠르게 움직여 절반을 내 주는 선에서 봉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
고개를 끄덕이는 건 호리호리한, 그러나 그것이 약하다기보다는 '한없이 날카롭다'는 인상을 주는 노인이다.
이 노인이 바로 흑도의 전설이자 관현 그룹의 회장인 곽호건이었다.
뒷골목 흑도의 작은 문주로 시작하여 양지의 관현 그룹이란 제국을 일구어낸 남자.
그래서 사람들은 곽호건을 욕할지언정 '효군(梟君)'이라 부르며 인정하는 것이다.
그 효군이 아직 관현 그룹을 지배하고 있기에, 이만한 위기를 겪게 되었음에도 관현 그룹은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무려 그룹의 절반.
도려내야 할 부분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과감하게 잘라냄으로써 불안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고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한 결단을 빠르게 내린다.
그것을 망설임없이 해낼 수 있는 효군의 지휘 아래 그룹은 안정을 되찾아 나가고 있었다.
감당할 수 없게 된 덩치를 줄여 내실을 다지고, 잠시 약해지겠지만 곧 예전의 위세를 되찾을 거라고 효군의 오른팔은 확신했다.
"그래, 이번 일에 깊이 관여한 게 그 잠룡이라고?"
"…예. 신뢰하긴 힘든 이야기지만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한 게 잠룡 김도진이라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정보망이 무너졌으니 신뢰할 수 있을 만한 정보를 얻기는 힘들겠지. 다만, 그놈이 우리에게 이빨을 들이민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주시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받았다면 돌려주는 게 이치. 언제가 되었든 돌려줘야 하지 않겠나."
"옳으신 말씀입니다."
효군의 베어 버릴 듯 날카로워진 눈이 TV 속의 도진을 응시했다.
* * * *
"아무리 못해도 30년 정도는 나올 것 같습니다."
나성보의 말에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관현 게이트의 중심에 있던 곽필섭은 무림인에게 있어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단전 파괴'까진 가지 않더라도 최소 30년 이상의 징역을 선고받게 될 거라는 이야기였다.
마약 밀수를 지휘한 무림인이자 여러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린 흉악범이었으니 최소가 30년이고 어쩌면 50년 이상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관현 그룹이 사태의 수습에 필사적이라 여유가 없고 방패막이가 되어줄 정계의 인사들도 없었으니 더 나오면 더 나오지 덜 나올 일은 결코 없었다.
복역 중에는 아주 엄격한 기준이 적용될 것이며 그 기준에서 어긋나면 형량이 늘거나 단전이 파괴될 수도 있다.
완전히 삶의 의욕을 잃고 '모범수'가 되어도 좋고 참지 못하고 난동을 부려도 좋다.
죽이는 게 아니라 살려서 오래도록 죗값을 치르게 한다.
도진이 목표했던 바에 충분히 부합하는 결과였다.
끓어오르는 분노는 곽필섭을 가둬놓고 매일매일 죽지 않을 만큼, 하지만 죽는 것보다 더 괴로운 고문을 가하는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건 '옳지 않은 방법'이었다.
방법 자체가 옳지 않다는 게 아니라 도진이 추구하는 삶과 맞지 않다는 것이다.
도진이 회귀하여 목표로 한 삶은 항거할 수 없는 불행에 짓눌리고 마모 되어야만 했던 부모님을 호강시켜 드리고, 스스로 가능성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동생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는 커다란 사람이 되는 것.
현실의 벽이 얼마나 높든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이뤄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모든 것을 버리고 복수에만 미쳐 사는 게 아니었기에 도진은 이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하고 만족했다.
뺑소니범이 절절한 사정이 있던 사람도 아니었고 그 범인을 무너뜨리기 위해 쳐야만 했던 곳 또한 썩어 빠진 곳이었기에 온전히 개운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 개운한 미소를 지으며 도진이 찾은 곳은 다름 아닌 레드슈의 숙소였다.
문방구 엔터가 폐업하면서 자연스레 방을 빼야 할 상황이 된 숙소 안은 꽤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안녕?"
"응, 안녕."
침울한 얼굴이었던 그녀들은 도진의 등장에 그나마 미소를 띠며 일어났다.
"커피 끓여 줄까?"
도진의 물음에 레드슈의 세 사람이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주객이 전도된 듯한 풍경이지만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게 쌓은 인연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도진은 물론이요 레드슈 또한 단 것이 취향이었기에 설탕을 듬뿍 넣은 커피 네 잔을 각자 앞에 두고 앉았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정한 거 있어?"
"…아니."
도진의 물음에 박소진이 티스푼으로 커피를 저으며 답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렇게 말하는 박소진의 얼굴은 길을 잃은 아이 같았으며 유혜진과 여은영 또한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문방구 엔터는 폐업했다.
그리고 지금껏 문방구 엔터의 방침에 따라 움직였던 세 사람을 케어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그녀들을 데려가겠다 말하는 다른 소속사도 없었다.
사건에 관한 관심만이 집중되어 있는 지금 그녀들을 데려가기엔 너무 부담스러웠으니까.
이런 일까지 겪었는데 부모님은 너희가 뭐가 아쉽냐 아이돌 따윈 그만두는 게 어떻냐는 이야길 한다.
하지만 세 사람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고 그 꿈을 위해 어린 시절부터 쉼없이 달려와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그리 쉽게 포기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허나 그런 마음과 달리, 이 현실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지에 관해 어린 그녀들은 아는 바가 없었다.
평생을 아이돌로서 성공하기 위해 살아왔기에 그 외의 부분에 대해선 배우지 못했다.
지혜를 가지기에도 아직은 어린 나이.
때문에 어린 소녀들은 길을 잃어 버리고 어찌할 바를 몰라, 곧 나가야 할 숙소의 짐을 그저 헤쳐둔 채 멍하니 앉아만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들을 보며 도진은 언제나처럼 웃었다.
웃는 얼굴로 물었다.
"아이돌, 계속 하고 싶은 거지?"
"응."
"하고 싶어."
"좋아. 그러면 내가 소개해 줄 수 있는 소속사가 있는데, 한 번 대표를 만나 볼래?"
"어……?"
"소속사?"
"응."
도진은 이미 처음부터 말을 했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일 순 없겠지만 소진이 걱정하는 것들은 모두 해결해 주겠다고.
도진에게 있어 '도와준다'는 건 그런 것이었으니까.
그저 한순간의 적선만이 아니라 구원해주는 것.
그렇기에 쉽사리 손을 내밀지 않지만, 한 번 내밀었다면 그것이 얼마나 깊은 수렁이든 끄집어내 주고 만다.
지금까지 했던 것은 오롯이 도진의 복수였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레드슈를 도와줄 차례였다.
미소지은 얼굴로 도진은 길을 잃은 그녀들에게 하나의 길을 제시했다.
"아마 조건은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해. 한 번 만나보고 너희들이 마음에 든다면 계약하도록 해. 아! 유능한 변호사 한 분도 같이 가실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너도 같이 가는 거야?"
보호자를 바라는 소진의 물음에 도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 * * *
며칠 뒤.
레드슈의 세 사람은 도진의 슈킨팍시를 타고 자신들을 영입하겠다는 소속사의 대표를 만나러 가게 되었다.
슈킨팍시의 내부를 잠시 신기하게 둘러보던 그녀들은 곧 소속사에 대해 조심스레 물었다.
"소속사 이름이 어떻게 돼?"
"바른 엔터테인먼트."
"……바른?"
"응. 원래는 다른 이름이었는데 이번에 싹 리뉴얼하면서 이름도 바꿨어."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애초에 그게 이름만 있었지 제대로 운영도 되지 않던 곳이었거든."
"그렇구나……."
사람인 이상 어쩌면 정말 좋은 소속사로 가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기대를 했던 그녀들은 고개를 주억였다.
"소속 연예인이 한 명도 없었는데 이번에 정말 제대로 마음 먹고 운영해 보려는 곳이지."
말만 들으면 절대 가서는 안 될 곳 같다.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을 수 있는 도진이 소개해 준다는데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 왔어."
"어, 여기야?"
"응. 괜찮지?"
가슴 한 켠에 무거운 돌 같은 걱정을 키웠던 레드슈의 멤버들은 그러나 시내를 조금 벗어난 곳에 우뚝 솟은 신축 꼬마 빌딩을 보고선 눈을 크게 떴다.
척 봐도 보통이 아닌 빌딩이었다.
대충 지은 게 아니라 큰 돈을 들여 세심하게 깎아낸 조각품 같은 건물에 '바른 엔터테인먼트'란 글자가 입체적으로 새겨져 있다.
그 건물이 메이저 기획사 못지 않은 첫인상을 그녀들에게 주었다.
"연습실, 녹음실, 작업실 등등 필요한 모든 시설을 갖추고 있는 곳이래. 그리고 너희가 계약하면 회사가 총력을 다해 밀어줄 거야. 너희는 아무 걱정 없이 열심히만 하면 되도록 말야."
"…혹시 도진이 네가 세운 회사야?"
조심스레 물은 건 아이돌이면서도 특히 낯을 가리는 성격인 여은영이다.
굵은 웨이브를 넣은 머리카락을 옆으로 내려 묶은 헤어스타일이 청순함을 더하고 있다.
상상력이 풍부한 그녀의 물음에 도진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니고, 내 친구가 대표로 있는 회사야."
"…네 친구?"
"응. 마침 저기 오네."
도진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으로 레드슈의 시선이 향한다.
반짝이는 로비를 걸어 다가오는 건 일남일녀다.
그녀들 또래의, 더 정확히는 동갑내기 일남일녀.
두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레드슈의 눈이 커졌다.
둘 다 훤칠한 키라 나란히 걷는 모습이 잘 어울리는 남녀.
두 사람은 다름 아닌 오대용과 주정아였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