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175화 (175/741)
  • 175화

    곽필섭을 몰락하게 만든 사건의 시발점은 자살한 여배우의 유서 한 장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이었다면, 다른 곳도 아닌 흑도에 뿌리를 둔 대기업 관현 그룹의 넷째가 몰락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곽필섭의 몰락에는 몇 가지 이유가 더 있었는데, 치명적인 세 가지 중 첫 번째가 '송 씨'였다.

    송씨 성을 가진 제보자가 관현 그룹으로서도 덮기 힘든 엄청난 정보들을 제공해 줬는데 이 덕분에 관현 게이트가 열릴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여기에 관해선 보도 통제, 제보자 보호 등 여러가지 이유로 속사정이 알려지지 않았기에 도진도 자세히 아는 바가 없었다.

    두 번째는 나성보다.

    권력형 비리를 누구보다 증오하는 나성보가 사건이 커지자 나서서 힘을 보탰고 이내 관현 게이트의 최선봉에 서서 싸우게 됐다.

    그 어떤 외압과 시련에도 굴하지 않았던 나성보의 싸움으로 결국 곽필섭과 관련자들이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곽필섭은 빠져나가는 데 성공했다.

    온갖 사건이 뒤섞인 혼란 속에서 사건을 질질 끌며 꼬리를 던져 주고 대중의 관심마저 멀어졌을 때 곽필섭은 수작을 부려 빠져나간 것이다.

    보통은 거기서 끝날 사건.

    하지만 나성보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건을 파헤쳤고 기어이 곽필섭을 감방에 처박는 데 이르렀으니 그것이 바로.

    "…마약이라구요?"

    "네."

    잔뜩 굳은 얼굴의 나성보를 마주하며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영웅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던 눈앞의 변호사가 신념과 집념을 다해 기어코 도달한 정보.

    그것이 바로 곽필섭이 마약을 유통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관현 그룹이 곽필섭을 손절하면서도 필사적으로 지켜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곽필섭은 안개파의 문주(門主)로 내정된 놈이었으니까.'

    관현 그룹은 그 성격에 따라 셋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가 기업이고 다른 하나가 양지의 무력, 그리고 다른 하나가 바로 음지의 무력인 안개파다.

    여기서 안개파의 주인으로 내정된 것이 바로 곽필섭이었던 것이다.

    관현 그룹의 총수가 양지의 대표라면 안개파의 문주는 음지의 대표라 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무공과 성질이 특히 흑도에 걸맞았던 곽필섭은 자연스레 안개파의 문주로 내정되며 관련 업무를 배우게 되었고 그중 하나가 마약 밀수였다.

    흑도 태생의 관현 그룹이 급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인 '막강한 자금력'은 밀수에서 비롯되었다.

    양지로 나오면서 겉으로는 철저하게 법을 지키는 듯 했지만 당연히 기만이고 모든 것을 음지의 안개파를 통해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안개파의 밀수 품목 중 하나가 마약이었고 곽필섭은 요즘 '새로운 루트'를 통하여 들어오는 마약 거래를 맡고 있었다.

    만약 곽필섭을 조사하다 여기까지 닿게 되면 정말로 대들보가 흔들릴 수도 있으니 관현 그룹이 총력을 다하는 것이다.

    뺑소니범이 곽필섭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 도진은 곽필섭을 잡기 위해 가지고 있는,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떠올린 건 곽필섭에 의해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레드슈였다.

    레드슈를 시작으로 곽필섭을 치기로 했다.

    "당분간 잡아야 할 애가 있어서 조금 바쁠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선배?"

    "응. 괜찮아."

    한유아는 많은 걸 알고 있는 눈동자로, 그러나 호의를 담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선배, 혹시 인턴 자리 하나만 얻을 수 있을까요?"

    "응? 누구 잡으려고?"

    "곽필섭이요."

    "좋지!"

    양아치들을 증오하고 징치하여 폭룡이라는 별호까지 얻은 류대현 또한 흔쾌히 도진에게 도움을 주기로 했다.

    "혹시 조금 도와줄 수 있어?"

    "얼마든지 말만 해."

    나지윤은 이유를 듣지도 않고 멋진 미소를 지은 얼굴로 협력해 주었다.

    그 신뢰는, 단순한 친구 사이를 넘어선 유대감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회귀하여 쌓아 온 것들의 힘으로 도진은 곽필섭을 치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해 나갔다.

    그리고 가장 큰 무기인, 미래에 관한 기억인 '관현 게이트'를 되짚었고 그 과정에서 도진이 본 모든 것을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는 스승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놈이 어릴 때부터 마약 거래를 해왔다는 내용이 있었지.

    스승들을 통해 도진은 대략 고등학생 때부터 곽필섭이 마약 거래를 했다는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이거다.'

    제아무리 곽필섭의 배경이 대단하고 관현 그룹이 발악한다 해도 체크메이트를 선언할 수 있는 치명적인 한 수.

    도진은 그 한 수를 준비하기 위해 변장까지 하고 실크 로드와 부산을 조사했다.

    위지혁과 장호에게 배운 모든 것을 발휘하고 도움까지 받아 이내 원하는 것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것을, 도진은 나성보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거…… 너무 큰 선물을 받아 버렸군요."

    "우리 사이에 이 정도는 드릴 수 있는 것 아닌가요?"

    "하하하! 그것도 그렇군요."

    나성보의 큰 웃음에 도진 또한 웃었다.

    이것은 본래 나성보의 것이다.

    도진이 준 것은 정보가 아니라 그 정보를 조금 더 빨리 얻을 수 있게 해준 것 뿐이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럼 선물을 개봉하러 가 보겠습니다."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으니 저도 함께 갈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그리하여 합동조사대는 부산항의 컨테이너 부두를 급습, 엄중한 경계를 뚫고 귀중한 서류와 증거품들을 압수하는 데 성공했다.

    그 성과에 나성보와 마주 웃으며 기뻐하고 있을 때 생각지 못했던 기사가 떴던 것이다.

    -속보!! 안개파, 일본의 야쿠자와 마약 거래를 하고 있었다!!

    "응?"

    나지윤의 지금 바로 뉴스를 확인해 보라는 메시지에 휴대폰을 켰더니 그런 기사들로 도배가 되어 있었고 커뮤니티는 장작이 아니라 아예 화약을 들이부은 듯 터져 나가고 있었다.

    -혹시 이거 영화 아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살다보니 이런 사건을 실시간으로 보기도 하는 구나...

    -잠깐만. 이거 아직 팩트 검증도 안 된 건데 너무 성급한 거 아님?

    -짜잔! 방금 팩트 검증이 되었습니다! 부산항에서 마약 컨테이너 확보!

    -으어엌ㅋㅋㅋㅋㅋ

    주교은이란 아이돌이 개인 방송에서 한 폭로 동영상이 퍼지는 가운데 대대적인 부산항에서의 수색이 보도되며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게, 도진은 계획했던 대로 체크메이트를 선언할 수 있게 되었다.

    * * * *

    "저, 저희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설광수 일당은 뻗대던 태도를 180도 뒤집고서는 그렇게 외쳤다.

    마지막까지 숨겨야 했던 마약에 대한 부분마저 들통나며 비빌 언덕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관현 그룹, 안개파의 존재 인정.

    -관현 그룹, "안개파를 철저하게 조사하여 뼈를 깎는 태도로 도려내겠다"

    안개파의 존재가 드러나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존재만이 드러났을 뿐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관현 그룹과 얼마나 얽혀 있는지에 관해선 알려진 바가 없었다.

    때문에 관현 그룹은 드러난 살은 미련없이 도려내되 숨길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숨기려 했는데 곽필섭의 마약 거래까지 드러나며 완전히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직계가 안개파의 일로 일본에서 마약을 밀수한 일이 드러났으니 제아무리 대기업인 관현 그룹이라 해도 무사히는 못 넘어갈, 살이나 뼈를 넘어 아예 사지 중 한둘은 잘라야 할 정도로 치명적인 일이었다.

    설광수 일당이 안개파의 하부 조직임이 드러났고 그들에게 마약까지 상납을 받았던 각계의 인사들 또한 줄줄이 구속당했다.

    나성보가 있고 명확한 증거들이 있는 이상 그들이 빠져나갈 구멍 따윈 있을 수 없었다.

    "시키는 대로 한 게 아니에요. 오히려 더 악랄한 사람이었어요."

    "몇 명이나 설 대표에게 당했어요."

    죄가 불어나는 가운데 발악하던 설광수는 그러나 계속되는 증언에 모든 발악이 무의미해졌다.

    안티체리가 증언했고 숨죽이고 있던, 레드슈의 유혜진과 여은영까지 가세했다.

    "너, 너희들!"

    설광수의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유혜진과 여은영은 차갑게 노려보았다.

    한 번은 꺾였지만 두 사람은 박소진과 도진의 모습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녀들 역시 뼈를 깎는 노력을 했고 모든 것을 걸고 꿈에 도전했었다.

    그 꿈을 짓밟으려 했던 설광수 일당을 용서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움직였다.

    -너희들이 소진이를 설득하란 말이야. 땀내나는 애들 손 잡아주는 거나 높으신 분들 시중드는 거나 다를 게 뭐야. 안 그래? 웃음 파는 건 똑같잖아.

    도진에게 받은, 소진이 받은 것과 같은 팔찌로 모은 증거를 제출했다.

    "이익!"

    눈이 뒤집힌 설광수가 덤벼들었지만.

    짜아악!!

    "정신 못 차리시네?"

    레드슈의 멤버들 곁에 도진이 있었기에 따귀를 얻어맞고 꼴사납게 바닥을 굴러야만 했다.

    "애초에 당신, 얘들보다 약하잖아?"

    안개파 소속이라고 해 봐야 재능없는 흑도의 찌꺼기에 불과했던 설광수는 비웃는 도진의 말에 반박조차 하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무인들에게 붙잡혀 끌려가 곧 사라졌고 말이다.

    꼴에 무림인인 설광수는 가중 처벌을 받을 것이다.

    그렇게 설광수 일당이 처리되고 도진은 곽필섭을 만났다.

    특별히 허락된 면회.

    곽필섭은 넋이 나가 있다 도진을 보자마자 짐승처럼 괴성을 질렀다.

    "으아아아아!! 김도진!!"

    도진은 그런 곽필섭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너무나 순수한, 만족만이 담긴 그 웃음에 곽필섭은 멈칫거렸다.

    "왜 그러는 거야.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응?"

    이쯤되니 곽필섭은 정말로 궁금해졌다.

    이놈은, 괴물같은 이놈은 왜 나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혹시 아는 사람 중에 나한테 당한 사람이라도 있는 걸까?

    온갖 의문을 담은 간절한 물음에 도진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

    "개인적인 원한이지. 뭐가 있겠어."

    "누군데. 도대체 누구냐고. 내가 변상할게. 전부 다 변상할 테니까 그만하라고!"

    다시 높아지는 목소리.

    그 절규에 도진은 미소를 더 진하게 하며 말했다.

    "안 해도 돼."

    "……뭐?"

    "안 해도 된다고. 그건 이미 '없어진 일'이니까. 너는 그냥, 죗값을 치르면 돼."

    "……."

    일말의 여지조차 주지 않는, 절망의 구렁텅이로 떠미는 도진의 모습에 곽필섭이 빠득, 부서질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죽여."

    "싫어."

    "죽이라고!!"

    "안 죽일 거야."

    "왜!!"

    입을 쩌억 벌리며 묻는 곽필섭에게 도진이 거리를 좁혔다.

    철창을 사이에 두고 도진의 얼굴이 곽필섭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그리고 그 얼굴이, 마치 괴물처럼 일렁인다.

    "죽이면 그걸로 끝이잖아. 나는 그게 정말 자비로운 거라 생각해. 죄를 지었으면 죽일 게 아니라 살려서, 어떻게든 살려서 지옥을 맛보여 주는 게 맞지 않을까? 나는 너를 그렇게 만들 생각이야."

    싱긋-

    "그러니까 죽으면 안 되지, 필섭아."

    섭음술로 오로지 곽필섭의 주변에만 맴도는 그 목소리에.

    주르륵-

    주저앉은 곽필섭의 바지가 뜨겁게 젖었다.

    * * * *

    '복수'는 그렇게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도진이 원했던 대로, 편히 죽여 주는 것이 아니라 살려둔 채 두고두고 고통으로 죗값을 치를 수 있도록.

    복수를 마무리한 도진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레드슈의 숙소를 찾았다.

    문방구 엔터가 폐업하며 자연스레 이사를 가야할 처지에 놓인 그녀들을 마주하며 도진은 말했다.

    "얘기 좀 할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