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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171화 (171/741)
  • 171화

    레드슈는 논란이 터진 뒤 숙소에서 칩거 생활을 하게 됐다.

    앨범 작업은 중지되었고 설광수에 의해 '출근'도 하지 말라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법이 바뀌며 주거지에 기자들이 진을 치는 건 불가능하게 되어 그로 인한 소란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거리를 두고 주시하는 기자들은 얼마든지 있었기에 외출하기도 여의치 않았다.

    이렇게 고립되어 휴대폰만 만지는 신세가 되면 자신에 대한 악플을 안 보는 게 낫다는 걸 알면서도 찾아보게 된다.

    그로 인해 처참하게 무너지고 말 것이다.

    설광수와 곽필섭은 그렇게 생각했고 실제로 대부분은 그렇게 될 일이었다.

    …레드슈의 숙소에 도진이 함께 머물지 않았다면 말이다.

    잠까지 같이 잘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아침만 되면 도진은 레드슈의 숙소를 찾았다.

    똑똑-

    "안녕?"

    "응, 안녕."

    수렁에 빠지려는 정신을 일깨우듯 청량한 노크 소리와 함께 웃으며 인사하는 도진이 레드슈의 멤버들이 고개를 들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알지? 이건 그러니까 사이다를 마시기 위한 '고구마'란 말야. 너희를 욕하는 모든 건 어디까지나 무대를 위한 소품. 그러니까 고개 숙이지 마."

    "……응."

    도진이 시선을 한 명 한 명 맞추며 말했고 소진은 입술을 꼬옥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면서도 꺾일 것만 같은 시간.

    그 시간을 도진이 버틸 수 있도록 지탱해 주고 있었다.

    "오케이. 그러면 너희, 아침 안 먹었지?"

    "……응."

    소진이 도진의 물음에 시선을 슬쩍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에서 입맛이 있을 리 없었고 직접 차려 먹을 기운이 있을 리 만무했다.

    "하여간 말들을 안 들어요. 당장 일어낫!"

    도진의 호통에 레드슈의 멤버들, 소진과 유혜진, 여은영이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방을 치운다. 실시."

    옷도 아니고 무려 파자마 차림으로 있던 세 사람이 나무늘보마냥 움직이며 숙소를 치우기 시작했다.

    처음엔 느렸지만 일단 시작하니 허투루하지 않는다.

    무기력하게, 무얼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있던 그녀들에게 있어선 도진의 말 자체가 움직이기 위한 동력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자, 봐."

    도진까지 합류하여 청소 노하우를 전수한 결과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방이 깨끗해졌다.

    그리고.

    꼬르륵-

    "아."

    누군가의 배에서 났는지 모를 소리에 도진이 씨익 웃었다.

    "좋아. 그럼 뭐 먹고 싶은지 말해 봐."

    "나는 밥 먹고 싶어."

    "나도."

    의견은 만장일치로 밥이었다.

    "오케이. 그러면 장 봐 와야겠네. 박소진. 준비해."

    "응."

    도진의 말에 소진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유혜진과 여은영이 걱정스런 얼굴이 되었다.

    "…괜찮은 거야?"

    지금 상황이 상황이다.

    무려 잠룡 김도진과 이슈의 중심에 있는 박소진이 바깥으로 나가면 평범하게는 못 넘어갈 것이었다.

    두 사람의 걱정에 도진은 피식 웃었다.

    "그럼 괜찮지. 자, 그럼 일단 옷부터 입어 볼까?"

    "……?"

    의아해하는 레드슈의 멤버들을 데리고 도진은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그리고 옷들을 몇 벌 소진에게 대 보고서 말했다.

    "이거랑 이거. 그리고 이거. 입고 나와."

    소진은 질문하는 대신 도진의 말에 따라 옷들을 입었다.

    하의는 사이즈는 물론 통까지 큰데 상의는 딱 맞다.

    여기에 오버핏의 기장이 긴 바람막이까지 입으니 기괴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다음은 화장을 해야겠네."

    "화, 화장?"

    "응. 내가 해줄게."

    그러면서 도진은 소진을 앉히더니 직접 화장을 해주기 시작했다.

    상상도 못했던 상황을 유혜진과 여은영은 그저 지켜보았고 소진 또한 정신이 없었다.

    도진과 가까이서 시선을 마주하는, 그리고 생각 이상으로 부드럽고 섬세한 손길을 느끼고 있으니 정신을 붙잡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멍하니, 어어하는 사이 화장까지 끝나고 모자를 쓴 소진을 본 여은영과 유혜진이 깜짝 놀랐다.

    "어어?"

    "와……."

    거기엔 박소진이 아니라 웬 패션테러리스트가 한 명 서 있었다.

    알고 봐도 박소진이라고 믿기 힘들었으며 모르고 보면 절대로 박소진이 아니었다.

    그 기괴한 옷차림이 박소진의 체형을 완전히 다르게 보이도록 만들었고 화장은 얼굴을 다르게 만들었다.

    "뭐, 가벼운 변장술이지."

    도진은 만족스러운 결과에 씨익 웃으며 말했다.

    도진이 실크 로드에서 박소진에게 은밀하게 섭음술을 넣었을 때도 그러했듯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변장술을 쓴 것이었다.

    이 기술은 두말할 것도 없이 장호에게 배웠다.

    그렇게 박소진을 변장시키고 자신 또한 변장을 마친 도진은 소진을 데리고 시선들을 피해 동네를 벗어났다.

    "따로 아는 곳 있어?"

    "아니……."

    레드슈는 밥을 차릴 줄 몰랐다.

    보통 자취를 겸하는 여타 아이돌 연습생들과 달리 무공 수련에 매진해야 했기 때문이다.

    끼니 같은 건 회사에서 챙겨주거나 배달, 혹은 편의점 도시락으로 때우곤 했다.

    그랬기에 무얼 먹고 싶냐고 말했을 때 바로 집밥이란 대답이 나온 것이다.

    "오케이. 그럼 따라와."

    아무것도 모르는 소진을 데리고 도진의 주도 하에 장을 보게 되었다.

    소진은 외부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도진과 함께 장을 보는 색다른, 그리고 마음 편한 시간에 웃음을 되찾을 수 있었다.

    스으-

    허나 그 웃음은 갑자기 느껴지는 시선에 싸늘하게 얼어붙고 말았다.

    "……."

    "왜 그래?"

    도진이 물었다.

    소진은 작게 '스토커'라고 말했다.

    "…스토커가 있어?"

    "응. 근처에."

    도진은 고개를 두리번거렸으나 스토커를 찾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근처 건물 옥상 위에서 내려다보며 '스토커'는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잠룡이니 뭐니 해도 애새끼가 날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스토커는 전문적으로 은신과 잠행, 그리고 미행을 익힌 무인이었다.

    특정 인물, 혹은 정보를 캐는 데 특화된 이들은 따로 '고스트(Ghost)'라 불리곤 했다.

    특히 그는 이쪽 분야에 특화된 재능을 타고 나 조직에서 엘리트로 대우받았으며 무려 잠룡이 경호로 붙은 상황에서 박소진을 스토킹하기 위해 파견된 것이었다.

    엘리트답게 '어설픈 변장' 또한 바로 간파했다.

    '그래, 그런 얼굴을 해야지.'

    곽필섭 못지 않게 가학적인 성향의 그는 행복하게 웃다 공포로 물든 박소진의 모습에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카메라를 꺼냈다.

    클라이언트의 의뢰에 따라 잔뜩 굳어 버린 박소진의 모습을 찍기 위해서였다.

    특수 제작된 카메라는 거리가 좀 떨어져 있었음에도 아주 깔끔하게 '박소진의 모습'을 잡았고, 그 순간 스토커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어……?'

    아주 잠깐, 아주 잠깐 카메라에 시선을 주었는데 그 사이 있어야 할 인물이 사라졌다.

    본능의 경고에 따라 자리를 이탈하려던 그는 그러나 목덜미에 닿는 시리디시린 감촉에 몸을 굳혀야만 했다.

    "안녕?"

    "……."

    '이, 이런 미친!'

    몸이 굳은 건 시린 칼날 때문만이 아니었다.

    찰나의 틈에 모습을 감췄다 이 자리에 나타난 도진이 경악스러웠던 게 오히려 더 컸다.

    동시에 깨달았다.

    '…속았다!'

    믿을 수 없지만, 김도진은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찰나의 순간에 자신의 뒤를 잡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일부러 모르는 척을 했던 것이고 그 연기가 베테랑인 자신을 속일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아니, 애초에 박소진과 함께 외출한 것부터가 함정이었다.

    '도대체 무슨 괴물 새끼가…….'

    미행, 은신, 잠행 등은 순수하게 무공 실력과 비례하지 않는다.

    이쪽 분야에 대해 모른다면 경지가 높다 해도 전문으로 익힌 자를 찾지 못할 수 있다.

    때문에 무공에 의한 암살이 두려운 것이고 '고스트'라는 이 분야의 스페셜리스트를 칭하는 용어가 있는 것이며 전문으로 익히고 대응하는 무인들을 양성하는 것이다.

    한데 누가 보아도 '양지의 무인'인 잠룡이, 음지에서 잔뼈가 굵은 자신의 존재를 알아채고 심지어 대번에 뒤를 잡았으니 그로서는 천지가 뒤바뀌는 것만큼이나 믿기 힘든, 믿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다.

    "눈깔 굴러가는 소리가 요란하네?"

    도진의 조롱에 그는 최대한 마음을 다스리며 눈을 굴렸다.

    잡힐 순 없다.

    잡히면 끝이다.

    그러니까 기필코 도망가야 했고 판단을 내린 순간 망설이지 않았다.

    도진의 말이 끝나는 그 순간.

    호흡의 틈을 노려 온힘을 다해 몸을 날렸다.

    무인의 구명절초와 마찬가지로 고스트에게도 위기의 순간 빠져나가기 위한 비장의 한 수가 있었고 그는 그 비장의 한 수를 발휘한 것이었지만.

    스슷-

    '허어억!'

    고스트보다 더욱 고스트 같이, 눈앞에 나타나 백설을 내리치는 도진에 의해 그 한 수는 무산되었다.

    빠아아악!

    "켁!"

    정수리에 백설을 얻어맞고 개구리처럼 쭉 뻗어 버린 스토커를 내려다보며 도진은 작게 코웃음쳤다.

    -이렇게 보니 정말 허접하네요.

    -……기본이 안 되어 있군.

    도진의 말에 대답하는 건 사신(邪神)이라고까지 불리며 암살자의 정점에 올랐던 장호다.

    그 장호에게 사신의 무공의 기초인 무흔잠영을 사사받은 도진에게 있어 스토커의 수준은, 그야말로 코웃음이 나올 만큼 허접했던 것이다.

    …사실 이 시대를 기준으로 스토커의 수준은 낮지 않았고 오히려 높은 편이었지만 상대가 너무 좋지 않았다.

    도진은 그렇게 항거할 수 없는 재앙을 만나 뻗어 버린 스토커를 포박하고 점혈까지 한 뒤 한 손으로 대롱대롱 흔들며 인증샷을 찍어 SNS에 올렸다.

    -스토커를 잡음.

    사이다를 마실 시간이었다.

    * * * *

    빠각!

    내던진 장식은 고개 숙인 남자의 이마를 무서운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가격하고선 박살났다.

    뚜둑. 뚝. 뚝.

    나름의 무공을 익힌 남자는 보통 사람이라면 뼈에 금이 갔을 충격을 미동도 없이, 피를 뚝뚝 흘리며 묵묵히 감내했다.

    양복을 차려입은 건장한 남자는 흑도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남아 결국 양지에서의 출세까지 거머쥔 관현 그룹의 실력자였다.

    번듯한 직함까지 가지고 있으나 흑도의 법칙 속에서 살아온 그에게 있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보고해 봐."

    그런 남자의 태도에 화를 누그러뜨린 곽필섭이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말했다.

    "외부와 연관된 자료는 모두 폐기했습니다. 관리를 위한 내부 자료는 폐기할 수 없으나 본인이 발설하지 않는 한 결코 찾을 수 없도록 엄중 보관되고 있습니다."

    "현 관리 시스템상 스스로 자백하는 일은 없을 테니 저희와 연관되는 일 또한 없을 것입니다."

    남자의 보고에 곽필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체의 변명없이 해야 할 일을 분명히 하고 그것을 확실하게 처리했다는 보고를 그는 가장 선호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잘 수행하던 것이 눈앞의 남자였기에 그의 측근으로 두고 요긴하게 부리는 것이다.

    "수습 똑바로 해."

    "알겠습니다."

    남자는 깊숙이 허리를 숙여보인 뒤 물러났다.

    아니, 물러나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투벅. 투벅. 투벅.

    "……뭐야?"

    낯선 인기척들이 무공을 익힌 곽필섭과 남자의 감각에 걸렸다.

    본능이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려 주었지만 대처할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벌컥!

    거칠게 문이 열리고 일련의 무리가 곽필섭의 사무실을 흙발로 침범했다.

    그 무리 중 한 명이 대표로 나서며 말했다.

    "곽필섭 씨,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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