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168화 (168/741)

168화

살면서 마주하게 되는 대부분의 문제는, 놀랍게도 해결법이 이미 나와 있는 문제들이었다.

허나 그렇게 답이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문제를 풀 수 없는 건, 존재하는 그 해결법을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박소진의 경우 역시 그 대부분에 속해 있었다.

소속사의 접대 강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신고하거나 소속사를 나와 버리면 된다.

허나 그렇게 속 편하게, 간단히 끝날 일이었다면 연예계의 결코 사라지지 않을 어두운 그늘로 남지도 않았을 것이다.

레드슈 멤버들의 집안은 적나라하게 말하면 숭무고에 어울리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주 약간, 어느 정도 포기할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함으로써 아이들의 무림학교 뒷바라지를 해줄 수 있을 정도.

여기에 그녀들의 소속사가 '투자'를 함으로써 숭무고에도 합격할 수 있었고 걸그룹으로 활동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랬던 그녀들이었기에 계약, 그리고 갚아야 할 투자금에 묶여 있었다.

여기에 그동안 그녀들이 해 온 노력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 매일 같이, 다른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고 아이돌이 되기 위해 매진해 왔다.

그것을 쉽게 포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때문에 그녀들은 답을 알면서도 빠져나오지 못했다.

서서히 끓는 물의 온도를 버티다 죽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설령 신고를 한다고 해도 일이 해결될 것 같지도 않았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였으니까.

문방구 엔터의 사장은 이래저래 인맥이 있었고 '접대 강요' 또한 그녀들의 진술 말고는 증거가 없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신고를 하면?

그들이 처벌 받을 확률은 없다시피하고 반대로 그녀들의 꿈은, 가능성은 완전히 닫히고 만다.

그동안의 노력과 시간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 버린단 말이다.

스토킹 신고 또한 마찬가지였다.

소진의 짐작대로 그것이 곽필섭의 사주로 인한 것이라면 '일개 아이돌 연습생'의 신고만으론 결코 해결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오히려 '현역 숭무고 아이돌'이란 홍보 전략을 다시는 쓸 수 없게 만드는 악수(惡手)라며 사장에게 제지당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하물며 강단이 있고 숭무고에 합격할 정도의 실력이 있다지만 그녀들은 아직 열일곱 소녀였다.

보호자가 필요했으며 그 보호 아래 세상을 배워나가야만 하는 '아이'들이란 말이다.

그래서 물이 끓게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갇혀 있었다.

누군가가 구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즐겨 보던 소설 속의 기사님처럼.

허황된 생각이었고 도피였다.

한데, 그 간절한 바람이 지금 현실로 다가왔다.

주르륵-

"정말로, 정말로 나를, 우리를 구해줄 수 있어?"

하늘에서 내려온 동앗줄을 쉽사리 붙잡지 못하는 것만 같은 모습의 소진을 도진은 굳이 위로하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한 얼굴로, 그래서 더욱 신뢰를 주는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이 제자리일 순 없을 거야. 하지만 네가 걱정하는 것들은 모두 해결해 줄 거야."

"아……."

결코 쉽사리 할 수 없는 말, 그리고 약속이었으나 도진에게는 그것을 믿게 만드는 기세가 어려 있었다.

그것은 하기로 했다면, 그리고 말했다면 '해낸다'가 아니라 '한다'라는 선택지밖에 두지 않는 도진이기에 줄 수 있는 믿음이었다.

처음 레드슈를 보았을 때부터 도진은 그녀들의 미래를 알고 있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드슈를 도와주지 않은 건 누군가를 '도와준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저 길을 가다 동전을 하나 적선하는 것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일이다.

학교 폭력 피해자를 구원해주기 위해 해야 할 일이 그리도 많고 어려웠듯, 레드슈를 돕기 위해선 박소진이 짓눌리고 있는 감히 감당하겠다 하기 어려운 일들을 모두 해결해 주어야만 했기에.

도진은 도기이되 협객이 아니었으며 '구원'해 줄 수 없다면 나서지 않는 성격이었기에 레드슈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었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기이이이이잉!!

독특한 엔진음을 내며 어두운 도로를 질주하던 스포츠카.

그 스포츠카를 몰던 비뚤어지고 역겨운 미소를 짓고 있던 운전자를 도진은 분명히 보았다.

이미 알고 있던, 숭무고 42기 동기이자 눈이 사나운 남학생.

도진에게 완패하고 숨죽여 지내던 에스포 중 한 명이었던 곽필섭.

바로 곽필섭이 전생에서 도진네 가족을 나락으로 밀어 버렸던 뺑소니 운전자였던 것이다.

완패한 이후 눈에 띄지 않던 곽필섭을 도진은 굳이 밟아 놓으려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전생의 뺑소니 운전자라는 걸 알게 된 지금, 곽필섭은 '굳이 밟아야만 하는 쓰레기'가 되었다.

때문에 장호에게 배운 변장술과 전생의 기억을 최대한 활용하여 곽필섭의 주무대인 고급 유흥가를 배회하며 여러가지를 찾았던 것이고 그 시작이 될 박소진과 일부러 부딪치며 섭음술로 말을 전했던 것이다.

도진은 곽필섭을 치기 위한 명분이자 수단으로 레드슈를 택했다.

허나 그것은 일방적으로 레드슈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레드슈를 틀림없이 '구원'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곽필섭을 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도진에겐 그럴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도진은 비에 넘쳐 버린 호숫물이 흐르는 것 같은 눈동자의 소진의 어깨를 붙잡은 채 눈을 맞추고서 말했다.

"바로 지금부터 시작할 거야. 따라올 수 있지?"

"……응."

* * * *

다음날 저녁.

레드슈의 멤버들은 풀메이크업을 하고 무대용 의상까지 갖춰입고서 밴에 올랐다.

밴은 조용히 달려 이름난 고급 유흥가로 향했다.

'실크 로드'라 이름 붙은 이곳은 일반적으로 유흥가하면 떠오르는, 취객이 비틀거리면서 다니고 으슥한 골목에 토를 하는 그런 싸구려가 아니라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이 찾는 곳이었다.

어설픈 파파라치나 기자들이 감히 발도 붙이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관리하는 이곳은 그렇기에 재벌 3세들이나 유명한 연예인들이 주로 찾는 곳으로도 유명했다.

레드슈의 멤버들이 이곳을 찾은 건 흔히 말하는 '밤무대' 공연 때문이 아니었다.

차라리 그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을 멤버들이 하게 만드는 이유.

"오, 어서와. 역시 화사한 애들이 있어야 술자리가 사는 법이지."

끊임없이 계속되는 '접대'였다.

"안녕하십니까, 석 국장님. 홍 피디님도 잘 계셨지요?"

레드슈와 함께 온 문방구 엔터의 대표인 설광수가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며 자리에 앉았고 박소진을 포함한 셋은 마치 끌려가듯 찢어져 이미 얼굴이 불콰해진 사람들 사이에 앉게 되었다.

"자자, 늦었으니 벌칙으로 한 잔씩 따라 봐!"

"……."

내밀어지는 잔에 박소진을 포함한 멤버들은 아무 말 없이 양주병을 들었다.

처음엔 죽도록 싫어서 벌벌 떨리던 것이, 이제는 마비가 되어 버린 듯 손조차 떨리지 않았다.

"오케이. 그럼 우리의 아이돌도 왔겠다 노래 한 곡 들어볼까요?"

"좋다!"

"가자!"

그리고 들이밀어진 마이크.

몸에 손만 대지 않을 뿐 마치 도우미 취급이다.

그나마도 그것만큼은 격렬히 거부해서 그렇지 만약 꺾여 버렸다면, 정말로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레드슈를 서서히 말려 죽이려는 듯 행동했다.

조금씩 조금씩, 그래 정말로 서서히 물이 끓는 냄비에 갇힌 개구리 같았다.

서서히 자극을 강하게 했다.

처음부터 노래해 보라고 강권했다면 뛰쳐나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처음엔 술을 따르는 것부터.

그리고 조금씩 이 자리에 익숙하게 만들더니 마이크를 쥐게 만들었다.

첫날엔 결국 노래를 부르지 못했지만 나무라지 않았다.

하지만 매일같이 마이크를 쥐게 만드니 스스로가 압박에 못 이겨서 입을 열게 되었다.

그런 식으로 이들은 레드슈를 버틸 수 없을 때까지 짓눌렀고 얼마 못 가 꺾일 정도에 이르렀다.

"대표님."

"어, 소진아."

조용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문방구 엔터의 대표, 설광수가 술잔을 든 채 답했다.

소진은 고개를 숙여 늘어뜨린 앞머리로 절반쯤 눈동자를 가린 채 말했다.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짙은 감정이 담긴 목소리에 술을 마시던 설광수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그거, 석 국장님이나 홍 피디님이랑 같이 들어도 되는 건가?"

넌지시 묻는다.

그 물음에, 소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설광수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 * * *

친목도모를 위한 '회식'이 끝나고 따로 마련된 룸에서 설광수는 박소진과 함께 석 국장과 홍 피디를 마주했다.

"그래, 따로 할 이야기가 있다고?"

머리가 벗겨진 석 국장은 다 알고 있으면서도 의뭉을 떠는 얼굴로 말했다.

박소진은 약간 고개를 숙여 그 시선을 마주하지 않은 채 물었다.

"제가 석 국장님이랑, 홍 피디님이랑 자면 뭘 해 주실 수 있나요?"

"응? 무슨 소리야?"

"…우리밖에 없는데 굳이 말 돌리실 필요 없잖아요. 이 말을 듣고 싶으셔서 그동안 괴롭히신 거 아닌가요? 제가 두 분이랑 자면 뭘 해 주실 수 있냐구요."

석 국장이 두터운 입술을 실룩였다.

당돌한 태도다.

허나 그래서 더욱 약한 동물이 허세로 털을 세우는 듯해 석 국장은 기꺼웠다.

'그래, 날고 기어봐야 애새끼지.'

박소진은 그동안 계속된 압박에도 최대한 표정을 감추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저항해 왔다.

그랬던 박소진이 이렇게 자리를 만들고 감정을 드러낸다는 건 더 이상 버티지 못할 단계까지 왔다는 증거라 할 수 있었다.

석 국장과 홍 피디, 그리고 설 대표 사이에 시선이 오갔다.

"그건 너희가 하기 나름이지."

나선 것은 홍 피디였다.

예능국 국장을 맡고 있는 석 국장 대신 그 아랫급인 홍 피디가 나선 것이다.

"알다시피 나는 음악 방송을 맡고 있으니 레드슈를 출연시켜 줄 수도 있을 거고 석 국장님은 너희들을 꽂아 주시겠지. 너희가 봉사하는 수준에 맞춰서 말이야."

음악 방송 출연도 무한 경쟁 시대에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야말로 '간택' 받아야만 가능한 수준.

홍 피디는 그것이 가능한 인물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몇 번이나 상납을 받은 경험이 있었다.

'뭐, 이번엔 좀 늦어지겠지만 말이지.'

나름 잘 버텼지만 결국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무너져 버린 아이돌을 보며, 홍 피디가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자 그럼, 날을 잡아 볼까?"

* * * *

늦은 밤.

곽필섭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관현건설 미래성장전략실 3팀 팀장을 맡고 있는 그에겐 개인 사무실이 주어졌다.

오너 일가의 특혜였지만 아무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고 곽필섭 또한 당연하게 생각했다.

지금 그 사무실에서 늦은 밤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만약 업무 때문이었다면, 개인 사무실은 특혜가 아닐 수 있었겠지만 당연히 보고 있는 것은 업무 자료가 아니었다.

딸깍.

모니터에 비치는 것은 누가 보아도 몰래 미행하며 찍은 사진이다.

그리고 그렇게 찍힌 대상은 다름 아닌 박소진이었다.

딸깍.

학교, 숙소 근처, 길거리를 가리지 않고 찍어댄 사진들이 모니터에 연속해서 띄워지고 곽필섭은 그것을 만족스런 얼굴로 감상했다.

똑똑-

"응, 들어와."

대부분이 퇴근한 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도 곽필섭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달칵.

문이 열리고 들어온 양복 차림의 남자는 곽필섭의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요리가 끝났다고 합니다."

언뜻 이해할 수 없는 말.

그 말을 들은 곽필섭의 입이 찢어지듯 만족스런 웃음을 띠었다.

"좋아. 그럼 한 번 백마를 타고 가 보실까?"

그리고 다음날.

문방구 엔터를 방문한 곽필섭은 상상도 못한 인물을 마주해야 했다.

"레드슈와 경호 계약을 체결한 김도진입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