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걸그룹 레드슈의 숙소는 교외의 연식이 꽤 된 오피스텔에 있었다.
네 명이 살기엔 많이 좁던, 세 명이 사는 지금도 방이 두 개뿐인데 하나는 드레스룸으로 쓰고 있어 한 명은 거실에서 자야 하는 숙소다.
숭무고에 입학할 만큼의 재능을 가지고, 걸그룹을 지망할 만큼의 미모까지 타고 났다.
여기에 다른 숭무고 학생들에는 댈 수 없지만 그래도 부족하지는 않았던 가정 형편 아래 자랐던 레드슈의 멤버들은 이런 환경에서도 불평불만없이 꿈을 위해 노력해 왔다.
동고동락하던 동료 한 명을 잃었지만 그 아픔까지 딛고 노력한 결과 드디어 빛을 볼 수 있었고 이제 다음 곡으로 꿈에도 염원하던 음악방송 1위를 노려볼 만큼의 인지도를 얻었다.
하지만, 그런 레드슈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
아침임에도 어두컴컴하고 눅진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가 말없이, 묵묵히 외출 준비를 한다.
방송 스케쥴이 없었기에 최소한의, 사진을 찍혀도 흠이 잡히지 않을 만큼만 화장을 하고 자연스러운 복장을 갖췄다.
그리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니 그녀들의 매니저가 낡은 밴에 시동을 건 채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학교로 간다."
"네."
양복을 차려입은 커다란 덩치의 매니저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고 박소진이 대표로 짧게 대답했다.
과거 흑도에 몸담았다는 이야기가 있는 사람으로, 그녀들이 숭무고에 합격할 만큼의 무인이 아니었다면 함께 차를 타는 것만으로도 무서웠을 것 같은 외모와 성격이었다.
방학 내내 소속사 작업실과 숙소만을 왕복하던 밴이 오랜만에 그녀들이 다니는 학교, 숭무고로 향했다.
검문을 통과해 주차장에 차가 서자 박소진이 서류를 챙겼다.
"끝나면 바로 작업실로 와야 하는 거, 알지?"
마치 단속하듯 확인하는 매니저의 말에 박소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녀올게요. 갔다 올게."
"잘 다녀와."
"조심해."
"응."
걱정이 묻어나는 동갑내기 멤버들에게 옅게 웃어준 뒤 소진은 밴에서 내렸다.
목적지는 집행부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고 다른 곳도 아닌 숭무고 내였음에도 소진은 불안한 기색을 다 숨기지 못하며 걸었다.
"와, 박소진이네."
"어? 그러네."
지나가던 학생들 몇몇이 박소진을 알아보며 소곤거렸다.
그 미모 때문이 아닌, '걸그룹 레드슈의 박소진'을 알아보는 것이 고맙고도 뿌듯해야 하는데 요즘의 박소진은 그것을 느끼기 힘들 정도로 몰려 있었다.
억지로 힘을 내어 평범함을 가장하며 걸어 멀게만 느껴지던 집행부실에 도착했다.
똑똑-
"응. 들어와."
노크를 하자 들려오는 건 숭무고에서도 특별한 사람 중 한 명, 2학년 후기지수 중 한 명이자 금화의 영애인 금봉 한유아다.
특유의 귀를 사로잡는 매력적인 목소리에 문을 열고 들어가니 쏟아지는 햇살을 마치 장신구처럼 두르고 있는 한유아를 마주할 수 있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연예인보다 빛나는 그 선배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소진이 말했다.
"안녕하세요. 취업계를 내러 왔습니다."
취업계(就業屆).
일반적으로는 졸업하기 전에 취업을 해서 학교를 다니기 어려울 때 내는 문서다.
숭무고에서는 3학년이 되자마자 사회, 본격적인 무림에 뛰어들며 취업계를 내고 학교보다는 무림의 활동에 집중하는 게 보통이었다.
한데 숭무고의 취업계는 그 범위가 좀 더 넓어 1학년이나 2학년도 사용할 수 있었는데, 이는 역시 숭무고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숭무고는 물론 숭무영재고의 학생들까지도 집안이 보통 이상이면 성인으로 인정받는 1학년부터 사회 활동을 시작하곤 했다.
무공은 물론 중요하지만 가업을 잇거나 돕는 것 또한 소홀할 수 없는 위치의 학생들인 것이다.
이들을 위해 숭무고의 취업계는 범위를 넓혀 타당한 사유가 있다면 얼마든지 취업계를 제출하고 학교를 쉬는 게 가능했다.
물론 그렇게 쉬는 동안에도 진도는 멈추지 않으니 낙제를 피하기 위해선 수업을 빠지는 것을 벌충할 만큼의 수련을 해야 했으니 흔히 말하는 '농땡이'를 치는 게 아니라 더 밀도 높은 삶을 살기 위해 행사할 수 있는 권리라 할 수 있었다.
그 취업계를 레드슈의 소속사가 연예계 활동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기 위해 서류를 작성했다.
지금도 간당간당한 성적에 수업까지 빠지면 낙제의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레드슈였지만 어차피 아등바등 노력해봐야 중하위권을 맴도는 것이 한계였다.
애초에 이름을 알리기 위해 선택한 것이 숭무고였고 목적을 달성한 이상, 그 목적을 수단으로 했던 걸그룹으로서의 성공을 위해 매진하려는 것이다.
…본래는 그런 목적이었다.
얼핏 그늘이 비치는 소진의 모습을 읽었으면서도 한유아는 그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화려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상담실을 가리켰다.
마치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문이 열리고 도진이 걸어 나왔다.
"안 그래도 후배가 기다리고 있었어."
"안녕. 이쪽으로 와."
"응, 안녕."
한유아가 손을 흔들었고 소진은 도진과 함께 상담실에 마주앉았다.
1학기와 방학동안 집행부의 일을 배웠던 도진은 어느새 행정 업무까지 척척 해낼 정도로 제몫을 다하는 부원이 되어 있었다.
소진이 건넨 서류들을 꼼꼼히 확인하고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도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도장을 찍어 주었다.
이제 이 서류를 운영 위원회에 올리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도장이 찍힌 서류를 정리하는 중에, 소진은 꾹 담고 있던 말을 꺼냈다.
"나를 도와줄 수 있다는 게, 무슨 뜻이야……?"
혹여 바깥에 들릴까 섭음술까지 쓰며 조심스레 묻는 소진의 태도에 도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똑같이 섭음술로 말했다.
"말 그대로야. 내 개인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너를 돕는 게 큰 도움이 되거든. 한 번 이야기를 나눠 볼 생각, 있어?"
"……."
박소진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개인적인 목적이라니. 주저될 수밖에 없는 단어 선택이다.
다만 그것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잠룡 김도진'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과,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벼랑 끝까지 몰려 있는 상황이 그녀가 김도진이 내민 손을 뿌리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애초에 팩스로 보내도 될 서류를 굳이 성실함을 어필하기 좋을 거라는 이유를 대며 소진이 가져온 것도 다 도진의 '도와줄 수 있다'는 섭음술 때문이었으니.
끄덕-
어차피 이대로 가다간 뭍에 내던져진 물고기마냥 괴롭게 말라죽을 수밖에 없다.
소진은 고민 끝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도진이 고개를 끄덕인 소진에게 싱긋 웃어보인 뒤 말했다.
"매니저한테 전화를 걸어서 바꿔줄래?"
"……응."
소진이 도진의 말에 따라 매니저에게 전화를 건 뒤 바꿔 주었다.
-끝났어?
바로 용건부터 묻는 뭉툭한 목소리에 도진이 답했다.
"안녕하세요. 집행부의 김도진입니다."
-…아, 예. 안녕하십니까.
당황하여 반박자 늦게 나온 대답이 끝나자마자 이번엔 도진이 바로 용건을 꺼냈다.
"다른 게 아니라 소진 학생을 포함한 레드슈의 취업계와 관련해서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눠야 할 부분이 있어서요. 아, 서류가 미비한 건 아니구요. 아시다시피 취업계라는 게 본래 연예계 활동은 고려하지 않고 만들어진 거잖아요. 그래서 거기에 관해서만 조금 이야기를 나눠보려구요. 네. 너무 오래 걸리진 않을 건데 만약 스케쥴이 있으시다면 나중에 따로 일정을 잡아주시면 됩니다. 아, 괜찮으시다구요? 알겠습니다. 그럼 끝나면 따로 연락드리라고 말씀 전해두겠습니다. 네. 수고하세요."
능숙하게 '거짓말'을 끝낸 도진이 웃으며 휴대폰을 다시 소진에게 건네주었다.
소진이 휴대폰을 꼬옥 쥐고서 물었다.
"자, 그럼 이제 말해 줘. 나를 도와줄 수 있다는 게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야. 지금 네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내가 해결해 주려고 해."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을 알고 있는 거야?"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소진의 눈동자를 도진이 마주했다.
웅덩이에 일렁이는 밤하늘 같은 그 눈동자를 마주하며 도진이 말했다.
"스토킹, 당하고 있지?"
"……!!"
돌덩이를 던진 것처럼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도진은 그 흔들리는 눈동자를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는 한 사람을 의심하고 있을 거야. 그 사람은 아마."
"……곽필섭."
소담이 섭음술로 어렵게 꺼낸 그 이름에, 도진의 입꼬리가 차갑게 올라갔다.
* * * *
-같은 학교 동문이 됐는데 잘 지내보자.
곽필섭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었었다.
소진은 입이나 말과 달리 웃고 있지 않는 눈동자가 꺼림칙했지만 '대주주'의 기분을 거스를 수 없었기에 영업용 미소를 띠며 그 손을 마주잡았다.
학기초.
숭무고 42기 일진들의 대장 노릇을 하던 '에스포' 중 한 명인 곽필섭은 확실히 가까이 하기 부담스럽고 무서운 동기였다.
태생이 흑도였다는 관현 그룹은 뒷세계의 커다란 흑도를 거느리고 있다는 소문이 도는데 그것이 결코 거짓말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분위기를 곽필섭은 풍기곤 했다.
-힘들 텐데 먹고 해.
하지만 그렇게 느낀 분위기가 착각이었던 것처럼 곽필섭은 레드슈에게 잘해 주었다.
레드슈의 소속사인 '문방구 엔터테인먼트'는 중소 기획사로 그럭저럭 수익이 나는 중견 그룹 두 팀으로 버티다 이번에 큰 투자를 받아 새로운 그룹을 런칭했으니 그것이 바로 박소진이 리더로 있는 레드슈였다.
여기서 그 '큰 투자'를 한 것이 관현 그룹의 계열사 중 한 곳이고 그 계열사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곽필섭이었으니 문방구 엔터는 물론이요 레드슈에게도 곽필섭은 갑 중 갑이었다.
한데 그 곽필섭은 방문할 때마다 연습에 지친 레드슈에게 간식을 건넸고 처우에 관해서도 개선 의견을 내 주는 등 호감이 갈 수밖에 없는 행동들을 했다.
…그래서 멤버였던 유혜진과 여은영은 금세 넘어가 버렸고 박소진 또한 어느 정도 경계를 풀게 되었다.
학교에서는 여전히 껄끄러웠지만 소속사 건물에서 볼 때면 웃으며 이야기를 주고받을 정도로는 관계가 부드러워졌던 것이다.
그러다 돌연, 곽필섭이 관계에 크나큰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말을 해 버렸다.
-야, 박소진.
-응?
-나랑 사귀자.
-…….
갑작스럽고도 또 갑작스러운,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말.
박소진은 머릿속에서 문장을 만들어내지 못할 정도로 당혹스러웠으며 그 당혹스러움은 한 마디 말도 없이 10여 분을 보낼 정도로 오래 지속되었다.
-…미안. 난 아직 누군가랑 사귈 정도의 여유가 없어.
버티지 못하고 억지로 짜낸 말이 그것이었다.
곽필섭은 입꼬리를 슬쩍 올리고선 코로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미련없이 돌아가 버렸다.
그 이후로, 곽필섭은 소속사에 찾아오지 않게 되었다.
"찜찜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아니었다.
-예? 더 투자가 힘들다구요? 어, 어째서?
투자를 해 주던 회사에서 더 이상의 투자가 힘들다는 통보가 왔다.
처음 계약했던 것 이상의 투자를 해 주었는데 레드슈가 잘 돼 거기서 또 추가 투자를 논의하던 중 그게 엎어진 것이었다.
곽필섭의 고백을 거절해서, 라고 확언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큰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누구나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고부터 소속사에서 우리에게 '접대'를 강요했어."
-너희들, 오늘은 홍 피디님을 만날 거야. 준비해.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어디까지나 친목을 다지는 자리니까.
-너희들도 그렇잖아? 같은 조건이면 당연히 친분이 있는 쪽을 선택하는 법이고 기회를 한 번 더 주는 법이니. 관계자들이랑 친목을 다지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적극적으로 눈도장 찍도록 해.
스케쥴이 있는 것도 아닌데 '풀메이크업'을 하고 방송 관계자들을 만나 술을 마셔야 했다.
안 그런 척하면서 은근히 접대를 강요하는 말들이 오고갔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버티고는 있지만 그 자체로 심장이 두근거려 잠들기 힘들 정도의 스트레스를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의 정점이 바로 어느 날부터 박소진에게 붙기 시작한 스토커였다.
무려 숭무고의 학생을 쫓아다니는 스토커.
그런 산적한 문제들로 인해 어깨를 부여잡고 떠는 박소진이 일렁이는 눈동자로 도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로, 나를 도와줄 수 있어?"
간절한 그 물음에 도진은 진한 미소를 지었다.
"할 수 없었다면, 말도 꺼내지 않았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