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도진과 성지수에게로 집중되어 있던 관심이 막혀 있던 물길이 트인 듯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쏟아졌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에 선 인물을 확인한 학생들이 크게 소리쳤다.
"폭룡!"
"폭룡이다!!"
무림인치고는 적당한 키에 서글서글한 인상. 거기에 안경까지 써 일견 '범생이'로 보이는 학생.
"……."
'아이 씁…….'
겉으로는 멋있게 서 있지만 미미하게 꿈틀거리는 눈썹을 감추지 못한, 스스로의 별호에 자부심을 가지고는 있지만 동시에 너무 오글거려 싫어하는 감정도 가지고 있는 숭무고 2학년생.
바로 '폭룡'이라는 별호를 얻은 후기지수, 숭무고 41기 폭풍의 중심에 있던 류대현이었다.
"류, 류대현!"
피라미들이 주춤거렸다.
류대현은 그 모습에 고개를 삐딱하게 하며 말했다.
"작년에도 그러더니 3학년이 돼서도 그 버릇 못 고쳤나 봐?"
"……."
성지수는 입을 다문 채 손을 떨었다.
류대현은 일진들에게 있어 '발작 버튼'이자 '공포 버튼'이었다.
처음 입학했을 때부터 그랬다.
-이번 신입생 중에 일진들한테 덮어 놓고 싸움 거는 새끼가 있다던데.
-그래? 손 좀 봐줘야 할지도 모르겠네.
숭무회의 친구들과 그런 이야기를 했었고 그것은 곧 실제가 되었다.
-너희 같은 새끼들은 사회에서 사라져야 될 해충이야. 알겠냐 이 해충 새끼들아!
그야말로 '노빠꾸'.
신입생은 일진을 보기만 하면 미친개마냥 싸움을 걸었다.
문제는 그게 엎치락 뒤치락도 아니고 숭무회의 이름에 먹칠을 할 정도로 일진들을 개박살 내 놓았다는 데 있었다.
이래서야 체면이 서지 않으니 '제재'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결국 여럿이서 때려눕히는 지경까지 가고 말았다.
2학년이 직접 손을 쓰는 건 아무리 그래도 뭐하니 1학년 여럿을 데리고 가 소위 말하는 다구리를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1학년 여럿을 데리고 움직였던 게 바로 성지수였다.
어찌되었든 3주 가량 병원 신세를 지게 만들었고 성지수는 그 자리에 있었지만 손을 쓰지 않았으니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퇴원을 하고도 류대현은 방학을 포함하여 반 년 가량 학교에 나오지 않았으니 그 생각이 맞아 들어 골칫거리를 완전히 보내 버렸다고 판단했는데, 아니었다.
-안녕, 해충 새끼야?
류대현은 다시 돌아왔다.
그것도 집중 수련에 폐관 수련까지 거쳐 숫제 괴물 새끼가 되어서.
성지수는 학생들이 보는 가운데 개맞듯 쳐맞았고 2학년이 그러했으니 1학년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 지경이 되니 싸움은 아예 전쟁이 되었고 숭무회는 류대현을 전력을 다해 매장하려 들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류대현은 혼자였고 심지어 가문도 '고만고만한' 수준이었으니까.
나름 명문 무림 세가에 민간 무림 군사 기업을 운영하는 곳이었지만 숭무회는 그런 것이 평균일 만큼의 집안을 배경으로 둔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작정하고 나서서 폭룡이란 별호와 트럭이란 별명을 얻은 류대현을 걸레짝을 만들어 놓기 일보직전까지 갔다.
-와, 재밌겠네.
하지만 거기서 검봉이 개입했고 숭무회 가입을 거절했던 금봉까지 합류함으로써 숭무회는 대패하고 구석진 공원으로 밀려나게 됐다.
그렇게까지 해 놓고도 류대현은 만족하지 않고 숭무회가 무언가를 할라치면 훼방을 놓고 주먹 휘두르길 주저하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숭무회의, 특히 성지수의 발작 버튼이요 공포 버튼이 된 것이다.
성지수는 부들부들 떨리는 얼굴과 손에 힘을 주어 억지로 평온한 모습을 위장했다.
"류대현. 폐관 수련에 들었다더니 나왔나 보구나."
무공을 수련할 때 이상으로 힘들게 나온 말.
그러나 류대현은 그것을 완전히 무시한 채 도진과 친구들에게 다가갔다.
"여, 너희들이 42기 집행부지? 반갑다."
손을 흔들며, 웃으며 말하는 류대현에게 도진 일행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
"안녕하세요."
류대현은 텐션이 조금 과해 보인다.
도진은 그 이유가 류대현의 본성이 내성적이기 때문이라는 걸 장호에게 배운 사람을 보는 법만이 아니라 '동류'로서 바로 읽어낼 수 있었다.
무공을 익히면서 내성적이었던 성격 또한 고치기 위해 노력한 류대현은 사람을 대함에 있어 쾌활해지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가 '조금 과한 텐션'이었던 것이다.
도진은 전생을 포함하여 또래의 배 이상을 살아온 인생 경험 덕분에 여유를 가질 수 있었지만 류대현은 후기지수라 해도 아직 열여덟.
여유를 가지기엔 아직 젊은 나이였다.
"입학할 때부터 보통이 아니란 건 알았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대단한 후배가 될 줄은 몰랐어. 김도진."
그 젊은 선배 후기지수는 유독 도진을 보는 시선에 호감이 스며 있었다.
싹수가 노랗던 신입생 양아치들을 박살내고 심지어 숭무회까지 폐부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일진 양아치들을 혐오하고 징치하는 데 있어 주저함이 없는 도진을 류대현은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호감이, 동류로서의 호감까지 더해 도진 또한 류대현을 웃으며 대하게 만들었다.
"아하하. 감사합니다, 선배."
류대현은 좀 더 날것 그대로의 천마신교에 가까운 사람이다.
조금 강하게 비유하자면 부모의 원수가 있다면 법에 억울함을 호소하기보다 스스로의 손으로 범인을 때려죽이는 타입.
세상은, 하늘은 그것을 잘못되었다 말하겠지만 천마신교는 그것을 '옳다'고 말한다.
그 천마신교의 후계자인 도진은 그렇기에 류대현과는 좋은 관계를 쌓아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대용, 너도 못 본 사이에 엄청 신수가 훤해졌네? 기연이라도 있었던 거야?"
"뭐, 틀린 말은 아니네요. 기연이 있었죠."
"뭐야. 진짜 사람이 바뀐 거 같은데?"
"……."
들썩이는 분위기.
그리고 그 분위기에 어느새 엑스트라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밀려나 버린 성지수와 피라미들이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려댔다.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고 갈팡질팡하는 그들에게, 뒤늦게 도진의 시선이 닿았다.
"아! 미안합니다. 그러고보면 싸우기로 했었죠?"
"아, 그랬지. 그러고보면 내가 후배 싸움을 방해해 버렸네."
"방해라고 할 건 아니었어요."
"그런가?"
시덥잖은 농담따먹기나 하며 앞으로 나서는 도진의 모습에 성지수는 식었던 분노가 다시 차오르는 걸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지금 싸워도 되는가에 대한 고민을, 겁쟁이로서의 본성이 하게 만들었다.
무려 3학년, 그것도 금무에 입사하며 여러가지를 배웠던 자신이 후기지수라고 해봐야 1학년한테 질 리가 있겠느냐는 생각을 하며 이 자리에 왔다.
2학년 때 류대현에게 쳐맞으며 생겼던 흑역사를 지울 기회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무언가 느낌이 싸했다.
본능이 경고를 하는 것도 같았다.
눈앞에 선 1학년은, 잠룡 김도진은 류대현 이상으로 위험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고민은 이미 늦어 있었다.
"자, 그럼 후배인 제가 선공을 잡아도 괜찮으시겠죠?"
"아, 그래."
저도 모르게 쥐꼬리만한 자존심이 척수반사처럼 대답을 해 버렸고, 그것이 실책이었다.
짜아아악!!
'……?'
휙 돌아간 시야가 일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것이 1학년 후배에게 귀싸대기를 쳐맞아서 그렇게 되었다는 걸 한 박자 늦게 찾아온 격통으로 알게 되었다.
"악! 켁! 컥! 깍!"
도진은 일부러 천마기와 고통을 조절하여 꼴사나운 비명을 내지르며 허우적거리도록 만들었다.
반격은 물론 허용하지 않았다.
"쯧쯧. 금무에서도 실수해서 커피나 탄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게 뜬소문이 아니었나 봐."
그것을 지켜보며 류대현은 중얼거리듯, 그러나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성량을 조절하여 말했고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었다.
"꺽! 켁!"
성지수에게 결코 지울 수 없는 흑역사의 한페이지가 추가된 날이었다.
* * * *
"오랜만이네, 폭룡아."
"아이 씨!"
집행부실.
오랜만에 부실로 돌아온 류대현은 한유아의 환영에 옅게 인상을 썼다 풀었다.
후배가 있는 자리에서 폭룡이라 부르지 말라고 열을 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허나 그 짧은 순간만으로도 숭무고에 입학한 천재들은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고 힘의 관계 또한 이해했다.
'류대현 선배는 폭룡이란 별호를 오그라들어 하시는구나.'
'류대현 선배는 한유아 선배한테 안 되는구나.'
친한 친구 사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내성적이었고 대인 관계 스킬이 부족한 류대현은 이런 부분에 있어선 꼬리 아홉 달린 한유아를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한데 반전이 있었다.
"민비서도 잘 지냈어?"
"…지읒과 비읍의 발음을 구분해 주십시오, 폭룡."
"에이, 넌 여전히 차갑구나. 민비서."
"……."
"알잖아. 내가 '지읒'이랑 '비읍' 발음에 약한 거. 네가 이해해 줘."
부들부들.
바늘도 들어갈 것 같지 않았던 민지서를, 류대현이 흔들고 있었다.
그것도 별명 하나로 말이다.
그런데 그 별명이 예상치 못하게 한 사람의 마음을 흔들었으니 다름 아닌 도진이었다.
'미, 민비서라니.'
매력적인 별명이다.
나도 부르고 싶다.
도진은 그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30대 아재였던, 그리고 사실은 아재인 도진은 이런 별명이 취향이었던 것이다.
'…지서 선배랑 좀 친해져 볼까.'
이런 생각까지 할 정도로 말이다.
"지은이는 아직 안 나왔나보네?"
"응. 얼마나 강해져서 나오려는지……."
잡담을 하던 중에 류대현과 한유아가 검봉 유지은에 대해 이야기했다.
풍기는 뉘앙스가 한유아는 물론 류대현조차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이라는 걸 은연중 느끼게 만들어 도진은 호기심이 생겼다.
'검봉.'
전생에서도 대단한 고수였다.
여중제일인(女中第一人).
그 칭호만으로도 더 설명이 필요없을 만큼.
남녀 통틀어서는 붙어봐야 알겠지만 세계의 여성 무림인 중에선 붙어볼 것도 없이 최고라는 인정을 받았다.
이러하니 호기심이 더 강해지는 도진이었다.
'뭐, 곧 만날 수 있겠지.'
전생에서 검봉은 무탈하게 숭무고를 졸업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조만간 실물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저 아이들조차 저리 말할 정도이니 꽤 기대가 되는구나.
-그렇네요.
* * * *
개학을 일주일 앞둔 날.
도진은 '기다리고 있던 기사'를 보게 되었다.
-걸그룹 레드슈, 컴백 미룬다.
- - - -
기대를 모으고 있던 신예 걸그룹 레드슈의 컴백이 미뤄졌다.
관계자는 이번 앨범에 공을 들이고 있는 레드슈가 조금 더 완성도 높은 앨범을 만들고 싶다는 의견을 냈고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 - - -
걸그룹 레드슈가 컴백을 미룬다는 기사.
정확한 날짜는 몰랐지만 이 기사가 이즈음 나올 거라는 걸 도진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후 일어날 일까지도.
* * * *
스윽-
모자를 푹 눌러쓰고 흥청망청 시끄러운 유흥가를 걷는 남자가 있었다.
얇은 외투의 깃을 세우고 마스크까지 써 얼굴을 알아보기 힘든, 40대 가량으로 보이는 남자는 목적지가 없는 것처럼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툭-
훤칠한 키의, 그러나 가녀린 젊은 여자와 부딪쳤다.
남자와 비슷하게 여름임에도 깃을 세운 바람막이를 걸치고 모자에 마스크까지 써 얼굴을 꽁꽁 감춘, 그러나 늘씬한 몸매가 시선을 잡아끄는 여자다.
여자는 부딪친 순간 당황하며 고개를 숙이려다 눈을 크게 떴다.
"죄, 죄송합니다……!"
그리고 허겁지겁 사과하고선 자리를 떠나 버렸다.
남자 역시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 모습을 감췄다.
그 일이 있고서 다음날.
집행부의 상담실에서 도진은 고양이상의 돋보이는 외모를 가진 여학생과 마주앉아 있었다.
"나를 도와줄 수 있다는 게, 무슨 뜻이야……?"
도진에게 묻는 그녀는 바로 걸그룹 레드슈의 리더, 박소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