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뺑소니를 당하고 기어오를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시커먼 구렁텅이와 같은 방에 처박혀 있던 시절, 바깥에서 들려오던 시끄러운 시위 소리를 도진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 소리는 간간이 집 안까지 침범하곤 했는데, 늦은 밤 '동의를 해 줘야 재개발이 된단 말입니다!'라는 거친 강요와 함께 어머니에게 서류를 들이밀던 놈의 얼굴이 세월의 오차가 보정되며 위원장의 얼굴에 겹쳐졌다.
-곧 문월동이 재개발 된다고 한다.
그런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서 발품을 팔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 과정에서 '문월동 재개발 추진 위원회'라는 단체가 만들어졌으며 그 중심에 있던 것이 위원장을 맡은 구장성이었다.
문월동 출신으로 이렇다 할 직업없이 실비집에서 술이나 마시던 하루살이 인간으로, 그렇게 실비집에서 죽치며 생긴 인맥이 남아도는 시간과 함께 아이러니하게도 위원장이란 직함을 달아준 것이었다.
그 위원장이란 직함을 달며 남아도는 시간으로 나 이런 일 하는데, 으스대듯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다 여러 인맥을 쌓고 그 과정에서 비례대표를 노려볼 만한 수준까지 올라가 버렸다.
뭘 어떻게 하면 그렇지 되는지, 옷은 허름하게 입고 다니는데 돈을 펑펑 쓰고 다녔으며 그 아들도 다르지 않았다.
아들, 구다훈은 문월고의 일진이었다.
중학생 땐 별다를 게 없었는데 고등학생이 되며 일진들에게 알랑방귀를 뀌어 어울려 놀다 일진이 되었다.
돈을 잘 쓰기도 했지만 본래는 가기 힘든 불법 유흥 업소에 일진 학생들을 데려가 하던 소리들이 주요했다.
"우리 아버지가 곧 국회의원 되실 거거든. 그러면 힘 좀 쓰는 사람들이 필요해지잖아? 그걸 너희들이 해주면 좋을 거 같다고 생각해, 나는."
그리하여 구다훈은 일짱에 버금가는 특별대우를 받곤 했다.
도진은 그들 부자가 꽤 진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구다훈은 문월고 일진 패거리의 악독한 놈으로.
고급 차를 타고 다니며 돈을 자랑하고, 모범생인 척하지만 대놓고 선생들을 무시하며 으스댔다.
그때 이미 도진은 하늘이란 건 역겹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구다훈의 아비인 구장성은 더했다.
달동네의 술꾼에 불과했던 인간이 감투를 쓰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더니 힘이 생기자 아예 패악질을 부리는 수준이 되었다.
-아, 내가 동네 재개발을 시켜주려고 이렇게 노력하는데 말이야!!
동네 사람들 시끄러운 건 생각지도 않고 밤낮 구분없이 언성을 높였다.
그 소리에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들까지도 고된 잠을 설쳐야 했고 그 광경이 속에 쌓이는 시커먼 화가 되었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으면 다짜고짜 멱살을 잡기까지 했는데 힘없고 돈도 없는 동네 사람들은 설령 얻어맞더라도 구장성에게 목소리조차 내기 힘들었다.
…그랬던 인간이, 지금은 벌레처럼 벌벌 떨고 있었다.
오성 법무팀의 나성보.
그 이름을 문월동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사회에 관심을 두기 힘들고 식견이 부족하다 해도 바로 얼마 전 문월동에서 크게 화제가 되었던 이름이었으니 말이다.
당시의 일에 연관되었던 자는 흑도 문파는 물론이요 심지어 경찰서장까지도 무사하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이끌어 냈던 것이 바로 오성 법무팀의 나성보였으며 그 나성보를 불러온 것이.
스윽-
"어서오세요, 나 변호사님."
바로 모자와 마스크를 벗고 있는 김도진, 잠룡이었다.
싸아아-
구장성을 포함한 '켕기는 게 있는' 자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며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동안의 행보로 도진과 나성보는 이미 보여 주었으니까.
무관용(無寬容).
이제 그들은 철저하게 죗값을 치러야만 했다.
* * * *
바로 얼마 전 있었던 '정의구현'이 재현되었다.
나성보는 거침없이 칼을 빼들었고 그 칼날을 죄지은 자는 누구 하나 빠져나갈 수 없었다.
구다훈을 포함한 일진 무리는 퇴학 처분과 함께 소위 말하는 '수용소'로 가게 되었다.
수용소란 무림학교 문제아들을 모아두는 학교의 은어다.
그 이름과 달리 문제아들의 교정과 교화를 위해 설립된 학교였으며 여기서 모범 학생으로 인정받으면 다시 일반 학교로 돌아갈 수 있다.
아주 엄격한 규칙 하에 운영되는 곳으로 이곳에서마저 문제를 일으키면 단전 파괴라는 벌을 받을 수도 있어 아무리 싹수가 노란 학생이라도 함부로 날뛰지 못한다.
구장성은 어울리던 인맥들에게 '손절'을 당하며 위원장의 자리도 내놓게 되어 하루살이 술꾼으로 돌아가게 됐다.
애초에 자그마한 표라도 얻어볼까 싶어서, 목소리가 커서 이용해 볼 생각으로 구장성을 끌어들였던 자들이었으니 문제가 생기자 망설임없이 내친 것이다.
물론 나성보는 그들도 그냥 보내주지 않았다.
구장성의 입을 통해 작은 것이라도 죄가 밝혀지면 끝까지 파고들어 붙잡을 태세였다.
본래는 이렇게까지 되지 않을 일이었다.
법은 존재하지만 그런 수준으로 적용할 수 있는 자리의 인물들은 '이런 낮은 곳'에 눈길을 주는 경우가 거의 없었으니까.
하지만 나성보는 그런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았다.
그렇게 열성인 나성보와 도진은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저번 일도 아직 진행 중이신데 또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하네요."
법적인 일이란 시간을 많이 들여야 하는 일이었다.
때문에 저번 극한파와 북양 식품 관련 사건도 아직 다 끝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다시 나성보에게 일을 더하게 돼 도진은 사과하는 것이었다.
나성보는 그런 도진의 사과에 하하하, 웃었다.
"그건 조금 이상한 일이군요."
"네?"
"제가 가장 좋아하는 파티에 초대를 해 주셔 놓고 사과를 하시니 그렇지 않습니까?"
나성보는 권력형 비리를 증오하며 그들을 심판하기 위해 살아왔다.
그런 나성보에게 있어 이런 자리는 언제든 환영이었다.
나성보에게 도진은 증오하는 자들을 심판할 집행자였다.
그래서 만약 도진에게 법의 힘이 필요하다면 지체없이 달려갈 수 있도록 연락 체계를 구성해 두었다.
도진이 경찰서 등에 갈 경우 자동으로 나성보에게 연락이 가도록 해 둔 것이다.
그 심판의 과정에서 걸리적거리는 게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법(法)'이라면 언제라도 달려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이번에 지체없이 실행했다.
도진은 그런 나성보의 모습에 미소지었다.
"그렇네요. 그럼 말을 바꿔야겠네요.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 변호사님."
"하하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녁 식사는 참으로 즐거웠다.
* * * *
오늘 도진이 일찍 나온 건 문월동의, 지워지지 않을 기억 속의 고등학교 시절을 지금의 입장에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붙었는지 모를 무림 고등학교.
그 무림 고등학교의 기억은 처참하고 또 처참하기만 했다.
부모님의 피와 땀이 어린 돈을 상납으로 뜯기고, 어떻게든 현금으로 숨긴 돈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랬던 시절의 일진이란 것들을 다시 보았다.
당시엔 손을 뻗는 것이 용기가 아니라 만용일 만큼 격차가 있던 놈들이, 다시 만났을 땐 오물에 불과했다.
돈을 빼앗기고 얻어맞는 피해자에서 그 오물들이 감히 닿지도 못할 영역에 도진은 있었던 것이다.
그 양아치들을 때려눕히고 법의 처벌을 받게 만들었다.
기억 속 행패를 부리면서도 호사를 누리던 쓰레기 또한 제자리로, 술꾼보다 낮은 자리로 보내 주었다.
그 결과에, 과거의 끝맺음에 도진은 만족했다.
누군가는 말한다.
복수라는 건 허무만이 남는 것이라고.
아프니까 청춘이란 말 이상으로 개소리였다.
허무가 남는 건 복수가 아니라 복수를 성공한 후 해야할 것이 없어진 인간이 느끼는 감정이다.
복수란 피해자의 응당 행사할 수 있는 권리였고 만족감 이외의 감정을 느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해야 할 것이 앞으로도 너무나 많은, 패도를 걷는 도진은 그런 만족감과 함께 천마심공의 수련을 하며 자정이 넘을 때까지 시간을 보냈다.
인적이 드물고 지나가는 차도 드문, 그래서 CCTV도 없고 신호등조차 없는 외진 도로.
…도진이 아버지와 함께 뺑소니를 당했던 도로.
그 도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옥상 위에서 도진은 과거를 떠올렸다.
사업에 실패하고 달동네로 쫓기듯 이사왔지만 도진의 가족에겐 아직 희망이 있었다.
몸이 부서져라 일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노력에 빚은 조금씩이지만 꾸준히 줄어들고 있었다.
이자와 함께 원금을 갚아 나가며, 부족하지만 어떻게든 먹고 살며 공부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그런 환경에서 도진은 더 이상 학교 생활을 버티지 못하겠다고, 늦은 밤 아버지에게 고백했다.
오랜만에 집에 들어오신 아버지에게, 맨정신으론 하기 힘든 말이라 처음으로 마주 앉은 술자리에서 고백한 것이었다.
-아버지, 저 고등학교, 무공을 그만두고 싶어요.
없던 자존심 때문에 이유를 말하진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평소 눈조차 거의 마주치지 않았던 아버지는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유조차 묻지 않고 도진을 이해해 주셨다.
부끄럽게도 눈물이 흘렀었다.
그걸 감추며 괜히 쓰디쓴 소주를 고개를 돌리고 마셨었다.
-안 그래도 우리 회사에는 손이 부족하거든. 입사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구나.
아버지의 제안에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에 와서 뼈저리게 느낀 부족한 재능으로 이미 흥미를 잃어 버린 무공을 붙잡고 있을 바에야 일찍이 사회로 나가 돈을 버는 게 낫다.
돈을 열심히 벌어서 모아서 풍족하게 살자.
그런 기대로 오랜만에 심장이 뛰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작은 기대는.
콰아앙!!
경적조차 없이, 브레이크 밟는 소리조차 없이 순식간에 어둠을 가로지르며 달려온 자동차에 처참하게 부숴지고 말았던 것이다.
기억에 남는 건 자동차의 굉음.
찰나에 느꼈던 아버지의 단단한 팔뚝.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도진은 물론이요 도진네 가족은 다시는 기어올라 갈 수조차 없는 참혹한 절망의 구렁텅이에 떨어져 있었다.
범인을 찾지 못했다.
아버지와 도진에게는 치유할 수 없는 장애가 남았다.
광량이 극단적으로 떨어진 어두컴컴한 세계가 되었다.
그저 끝이 없는 늪에 빠져 익사하지 않기 위해 허우적거리는 삶만이 남았다.
유진이와 호진이의 미래 또한 그렇게 닫혔다.
"……."
도진은 천마기를 다스렸다.
그리고 고요한 눈으로 도로를 지켜보았다.
이미 알고 있던 미래이자 과거는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그것이 도진도 모르는 범위까지 영향을 미쳐서 지금 이 자리에 그날의 뺑소니범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바뀌지 않아 이 시간에, 이 자리를 지날 가능성 또한 얼마든지 있었다.
그리고 만약 그 뺑소니범을 본다면, 도진은 결코 용서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후웅!
드문드문 지나가는 차들은 대부분 과속을 하지 않았다.
인적이 드물지만 그래서 도로도 어두운 이곳에서 과속을 했다간 대번에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가 자중하는 것이다.
그런 도로에 어느 순간 조심할 필요 따위는 없다는 듯 미친듯이 액셀을 밟는 차가 나타났고, 도진의 천마기가 일순 크게 요동쳤다.
기이이이이잉!!
특별한 개조를 한 듯 독특한 엔진음이 고요했던 도로를 때린다.
이 소리를, 도진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차의 번호판도, 차종도, 심지어 색깔조차 몰랐다.
그래서 뺑소니범을 찾지 못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수사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 이 독특한 엔진음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이곳을 지나기만 하면 뺑소니범을 알아볼 수 있다고 도진이 확신한 이유이기도 했다.
두웅-!
내공을 제어하며 감각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그 감각으로 찰나의 순간 도진은 차량의 번호판을 포함한 모든 정보를 새겼고.
"하, 하하."
…너였구나.
마치 살랑이는 무시무시한 괴물의 꼬리처럼, 입꼬리가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