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집들이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는 서로 초면인 경우가 많았지만 어색함없이 어우러질 수 있었는데, 그것은 이들의 사회성이 보통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재벌 3세이거나 귀족이거나 이미 사회에서 관련 업계에 종사하고 있거나.
그런 사람들의 모임이면서 동시에 도진이라는 공통 분모가 있으니 어색하기가 오히려 힘든 것이다.
우서진이나 상미가 내성적인 면이 있었지만 한유아나 오성아, 우서연이 있으니 그 또한 능숙하게 조율해 주었고.
한데 그 우서진과 상미가 떠날 즈음에 무언지 모를 시선을 주고받으니 도진의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뭐지?'
동갑내기이고 둘 다 내년에 숭무고를 목표로 하고 있으니 이번 집들이 파티를 통해 친해져도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파티 중에 도진은 그럴 만한 계기가 될 일을 보지 못했다.
데면데면한 감이 있었고 둘만 남는다면 보는 사람이 엉덩이를 들썩일 만큼 어색한 분위기가 될 거라는 걸 쉽사리 예측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한데 방금의 시선 교환은 무언가 예사롭지 않은 느낌을 줄 만큼의 깊이가 있었다.
썸……은 결코 아니었다.
우정, 이라기도 애매한 감이 있다.
그것은 조금 이상하지만 굳이 말하자면 '전우애'라고 해야 할까.
도진은 그렇게 느껴졌다.
'아까 같이 있을 때 뭔 일이 있었나?'
그래서 더욱 고개를 갸웃거리는 도진을 두고, 우서진과 상미는 각자 검은 봉지 하나씩을 들고 떠난 것이었다.
* * * *
도진은 몰랐던 일.
그것은 집들이가 마무리되고 뒷정리 중에 있었던 일이었다.
음식에 대한 부분은 출장 뷔페의 직원들이 할 일이었고 집에 관해선 도진네 식구가 할 일이었지만 그 외의 부분들은 조금씩 일을 분담했는데, 거기서 상미는 가장 먼저 나서서 재활용 쓰레기 분리를 맡았다.
"제가 씻어서 내놓을게요."
"응, 부탁할게."
대부분의 식기는 출장 뷔페의 것들을 사용했지만 어쩔 수 없이 나온 일회용품들이 있었다.
다만 썩지 않는 쓰레기가 아니라 강력해진 규제에 맞는 재활용 가능한, 혹은 금방 썩어 퇴비가 되는 친환경 제품을 사용했기에 씻어서 분리수거하면 되는 것들이었다.
상미는 그 처리를 도맡겠다 말한 것이다.
"아, 제가 도울게요."
그리고 이어서 손을 든 것이 우서진이었다.
"오, 솔선수범하는 막내들이네. 고마워."
성격도 그렇고 동갑임에도 데면데면한 두 사람이었으니 이렇게 같이 일하며 관계의 진척이 있으면 좋은 일이었기에 도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상미와 우서진은 일회용품을 골라 챙겨 마당 한 켠에 있는 야외 수돗가로 향한 것이었는데, 챙겨온 일회용품을 나누던 중에 둘은 깨달은 것이었다.
"너……."
"……."
상미가 눈으로 물었다.
'설마 너도?'
그리고 우서진 또한 눈으로 답했다.
'너도 그렇구나.'
상미가 따로 챙긴 일회용 접시는 소스가 묻어 있다는 걸 제외하면 정말로 깔끔했다.
사용자가 자그마한 음식도 남기지 않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빨대는 이로 살짝 씹은 자국이 있었는데, 이 또한 사용자의 버릇이다.
다름 아닌 도진의 성격과 버릇이었다.
상미는 그렇게 도진이 사용한 것들을 먼저 챙겨 분리하던 중에 우서진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도진이 사용한 것들을 먼저 나누고 있음을 깨달았고, 동시에 깨달은 우서진과 눈이 마주치며 두 사람은 순식간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랑 비슷하구나.'
상미는 도진에게 구원받았다.
도진 덕분에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꿈을 꿀 수 있게 되었으며 도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매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 수 있는 힘을 얻고 있었다.
그런 상미였기에 눈앞의 동갑내기 남자애가 자신과 동류라는 것 또한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동류이기에, 동경하고 존경하는 사람이 닿았던 물건을 가지고 싶어하는 마음까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단순히 그 사람이 사용한 물건을 갖고 싶은 게 아니다.
그 사람과 함께 했던 시간의 추억이 깃들어 있기에 갖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상미는 도진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마셨던 커피캔이나 컵을 소중히 챙겨 보관해 왔고 오늘도 그럴 생각이었다.
알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말이다.
한데 오늘, 같은 생각을 한 동갑내기 남자애를 마주하게 되었다.
'초보자야.'
선배(?)인 상미는 알 수 있었다.
이 남자애, 우서진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조금은 불안한 눈빛과 망설임이 한천검공을 수련하며 얻게 된 '초감각(超感覺)'으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잠시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그래.'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상미는 결론을 내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눠 가지자."
"어, 그럴……까?"
반사적으로 대답했던 우서진은 평범하지 않은 상황과 망설임으로 말을 끌며 대답했다.
상미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많이 챙겨봐야 두기도 힘들잖아."
"그렇, 지."
"그러니까 나눠 가지자. 앞으로도 이럴 일이 있을 텐데 그때마다 싸울 수는 없잖아. 서로 상부상조해야지."
"응, 그렇……지."
정말로 평범하지 않은 상황인데 제안 자체는 합리적(?)이어서 우서진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대놓고 하기에는 정말로 무언가 말로 하기 묘한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더 가지겠다고 싸우는 건 미련한 일이니 상미의 말대로였다.
'얘도 앞으로 오빠를 위해 일할 거고 한 배를 타게 될 거 같으니 싸워서 좋을 거 없지.'
상미는 그렇게 생각했다.
우서진은 도진의 옆집에 사니 지금은 떨어져 지내는 자신보다 얻는 게 많을 것이다.
그것이 정보가 되었든 물건이 되었든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도 많을 터.
그러니까 동료로서 좋은 관계를 맺는 게 무조건 정답이었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
"응, 그러……자."
상미가 먼저 손을 내밀자 우서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맞잡았다.
남자라곤 생각하기 힘든 부드러운 손.
그야말로 믿음직한 동료의 느낌이었다.
* * * *
뒷정리가 끝나고 손님들도 떠난 집은 고요하지만 적막하지 않았다.
넓지만 따듯하고 부드러우며 편안하다.
거실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광량을 조절하고 커튼을 쳤으며 난방의 온도를 조절했다.
처음 해 보는 일이었지만 생소하지 않고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
사람이란 편한 일에는 굳이 적응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생물이었으니 말이다.
유진이와 호진이는 샤워를 하러 갔는데, 호진이의 '따듯해!'라는 탄성이 기억에 남아 도진은 미소지었다.
호진이를 추위를 많이 타는 아이였다.
처음 달동네로 이사왔을 땐 울면서 씻기 싫다고 투정을 하기도 많이 했었다.
도진은 그것이 가슴 아프고 화나기도 했는데 그 감정을 터뜨리면 부모님이 힘들어하실 걸 알아서 속으로 삭이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사한 집은 화장실까지 난방이, 그것도 정교한 수준으로 가능했고 호진이는 이제 추위를 참지 않아도 됐다.
전생에서는 성인이 될 때까지도 해주지 못했던 일을 이번엔 생각보다 빠르게 해주었다는 것에 기뻐하며 도진은 냉장고에서 음료수와 과자를 꺼내 간식상을 차렸다.
나지윤이 준 집들이 선물 세트에는 음료수와 과자 또한 포함되어 있었는데 바로 그것이었다.
'역시 센스 있다니까.'
아버지는 회사 근처로 외출하셨다.
출근이 아니라 외출.
퇴근한 동료 직원들, 그리고 오늘 야근을 할 직원들과 함께 집들이 기념 회식 약속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또한 중정 근처 고깃집으로 외출하셨는데, 역시나 친한 찬모들과 집들이 기념 회식이었다.
저번의 일로 중정 앞에 생겼던 양아치들의 집합소는 깔끔하게 사라졌고 극한파 또한 박살이 났으니 별일은 없을 터였다.
계약 기간이 남아 은밀히 호위하는 무인 또한 있었으니 더더욱.
그리하여 부모님이 외출하신 집에서 도진은 간식상을 차려 샤워하고 나온 동생들과 마주앉은 것이었다.
다른 이유는 아니었다.
이사를 하며 결정해야 할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부모님을 대신하여 도진이 동생들과 얘기하기로 했다.
"유진아, 호진아."
"응?"
과자를 오물거리는 동생들을 보며 도진이 말했다.
"너희가 원하면 전학을 갈 수 있는데, 어떻게 생각해?"
* * * *
유진이가 이제 5학년, 호진이는 3학년이었다.
본래 다니던 학교는 달동네 근처에 있는 문월초였다.
먼곳으로 이사하며 당시 2학년이었던 유진이는 자연스레 근처에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됐다.
호진이 또한 초등학생이 되며 문월초에 입학했고 말이다.
문월초는 문월중학교, 고등학교와 마찬가지로 좋은 학교가 아니었다.
냉정하게 말해 주변의 환경과 입학하는 학생들의 성향은 물론이요 학교 자체의 시설과 교사들의 수준 또한 좋지 않았으니까.
때문에 도진과 부모님은 기왕 이곳으로 이사를 온 것, 유진이와 호진이 또한 근처의 좋은 학교로 전학을 갔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다.
사는 곳이 바뀌었으니 거주지 이전으로 인한 전학이 가능했다.
이곳이 숭무동인 만큼 근처에 좋은 학교도 많았다.
단순히 공부를 시키고 싶다는 욕심이 아니라 주변의 분위기 자체가 성장기의 아이에게 많은 영향을 주니 도진과 부모님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 분위기가 좋은 곳으로 보내고 싶은 것이다.
다만 그것을 도진과 부모님의 생각만으로 결정하는 건 독단적이니 이렇게 도진이 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를 만들었다.
도진은 동생들이 가능하면 지금 다니는 곳에 계속 다니고 싶다는 말을 할 거라 생각했다.
거리는 좀 멀어졌지만 함께 어울리는 친구들도 있고 익숙한 곳에 다니려는 마음일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진이의 대답은 달랐다.
"전학 가고 싶어."
"가고 싶어?"
"응."
유진이는 별다른 망설임없이 전학을 가고 싶다고 말했다.
호진이 또한 같은 생각을 하는 얼굴이었기에 도진은 물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
혹시 아직도 유진이랑 호진이를 괴롭히는 아이나 설마 선생이라도 있는 걸까.
그런 걱정을 한 도진이었지만 호진이의 대답이 또 한 번 도진의 예상을 벗어났다.
"지금 학교는 잘 가르쳐 주질 않아."
"잘 가르쳐 주지 않는다고?"
"응."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설명을 듣고 있자니 그 말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선생님들이 별로 의욕이 없어."
그러니까 그것이었다.
직업이니까 의무적으로 수업이라는 걸 하지만 말 그대로 의무적이기만 해 열의가 없다.
듣는 학생들이 무얼 하든 굳이 지적하지 않고 귀찮은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데만 신경을 쓴다.
의문나는 게 있어 질문을 하면 기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귀찮아한다.
교육 환경으로는 최악이었다.
본래 유진이와 호진이는 그런 것을 신경쓰지 않았다.
두 아이 또한 갑자기 바뀌어 버린 집안의 상황과 환경에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방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그 또한 회귀한 도진의 영향이었다.
두 아이는 '향상심'을 갖게 되었고 그것이 지금 학교의 환경에 만족하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도진은 동생들에게서 느껴지는 향상심에 웃었다.
만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좋아! 그러면 유진아, 호진아."
"응."
"내가, 무공을 가르쳐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