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후작 부인께서 겪으신 일, 제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
도진의 담담한, 그러나 한점의 망설임도 없는 그 선언에 모두에게 놀람이 깃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올리버 후작'이 백방으로 노력하였음에도 해결하지 못한 일을, 잠룡으로 이름 높다고는 하나 일개 무림학교 고등학생이 해결하겠다고 주저없이 선언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놀람을, 올리버 후작은 곧 정리했다.
-제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분이 이쪽 방면으로는 해결하지 못한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믿어보시지요.
대중에 알려지진 않았으나 올리버 후작 부부가 겪은 '괴이한 일'은 알 만한 사람은, 특히 무속인들 중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만큼 널리 퍼진 일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올리버 후작 부부의 일을 해결할 수 있다며 큰소리쳤었다.
물론, 그렇게 큰소리 친 사람들 중 정말로 일을 해결한 사람은 없었다.
있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모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사람은 자극에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지만 그 자극이 반복되면 점점 더 무뎌져 이내 반응할 수 없게 되어 있는 생물이다.
올리버 후작은 이미 수많은 자극으로 인해 무뎌진 사람이었기에 금방 감정을 정리한 것이었다.
"해결할 수 있다니, 어떤 방법으로 말입니까?"
연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바로 돌려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평생지기인 우벽진이 잠룡에게 보내는 깊은 신뢰를 느낄 수 있었기에 기대보다는 의무로 물었다.
그 감정을 읽을 수 있었기에 도진은 길게 방법을 설명하기보다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방향으로 답했다.
"하룻밤만 투자해 주시면 됩니다."
"하룻밤이라니, 단 하루만에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네."
허무맹랑하다.
너무나 허무맹랑하고 믿기 힘든 말이지만, 그것이 결코 허세나 거짓으로 느껴지지 않아 기이하다고 올리버는 생각하고 말았다.
올리버는 무속인을 자처하는 수많은 사기꾼들을 보았다.
감히 올리버 후작을 상대로 사기치려는 배짱 두둑한 사기꾼이 생각보다 많았던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올리버에게 있어선 그리 크지 않은 지출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기대를 걸었으나 혹시나는 역시나였다.
한 번 올리버가 고개를 끄덕이니 불에 뛰어드는 부나방마냥 사기꾼들이 몰려들어 몇몇을 본보기로 사법처리하였더니 그제서야 사기꾼들이 앗 뜨거라 자취를 감추었다.
지금 도진이 하는 말은, 당시 아무렇게나 주워섬기던 사기꾼보다 '성의'가 없어 보였다.
허나 그럼에도 거기서 공허함 대신 자신감과 확신만이 느껴지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래서 올리버가 아주 약간, 기대감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며 다시 입을 열려 했을 때였다.
띵- 동-
또 한 명의 방문자가 벨을 눌렀다.
독한, 그러나 몇 번 맡아본 적이 있는 냄새를 풍기며 나타난 자는 다름 아닌 강호섭이었다.
그는 급히 달려온 기색이었는데 거실에 앉은 우벽진과 도진을 보고서는 얼굴을 찡그렸다.
"강 거사. 어쩐 일입니까?"
올리버는 담담하게 물었다.
강호섭.
그는 더 이상 나서는 자들이 없을 때 일을 해결할 수 있다며 당당히 출사표를 던졌던 남자였다.
다만 과장하지 않고, 허세부리지 않고 어쩌면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며 색다르게 이야기를 하던 남자이기도 했다.
-집에 깃든 악귀는 강력하고도 끈질깁니다.
-저는 재능이 부족하여 스승님에게 제대로 배우지 못해 악귀를 성불시키거나 정화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시간과 공을 들여 악귀가 집에서 스스로 떠나도록 만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믿어주신다면, 그리고 약간의 지원만 해주신다면 한 번 시도해보고 싶습니다.
조금 다른 그 모습에 올리버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어느 정도의 금전적 지원만 해주면서 기대는 하지 않았다.
강호섭 역시 따로 연락을 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몇 개월이 흘렀는데 오늘 돌연 연락이 왔었다.
-후작님, 제가 외부인을 들여선 안 된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질책하는 목소리였다.
-강 거사가 말한 것은 무속인을 들이지 말라던 것이 아니었습니까?
-아니, 아닙니다. 저를 제외한 누구도 들여선 안 됐습니다. 악귀가 이 집에 머물러봐야 불쾌하기만 하다는 걸 인식시키기 위해 시간과 공을 들인 것이었는데 거기에 원기가 왕성한 무림인이 방문했으니 귀신이 다시 관심을 가지고 말았습니다. 몇 개월의 공이 허사가 된 것입니다.
우벽진의 연락에 집으로 오던 중 했던 통화 내용이었다.
강호섭은 얼굴을 찌푸린 채 말했다.
"오늘의 일 때문에 일정이 바뀌게 되어 그 말씀을 드리러 왔습니다."
강호섭이 그렇게 말하며 거실에 발을 들이자, 지금껏 얌전히 앉아 있던 릴리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사기꾼!!"
"릴리!"
야윈 정여원이 그러나 엄한 목소리로 질책했지만 릴리는 기죽지 않고 다시 소리쳤다.
"왜 거짓말을 하는 걸 알면서도 아무 말을 하지 않는 건가요! 저는 그걸 이해할 수 없어요!"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아라. 릴리."
릴리는 올리버의 높지 않은, 그러나 엄중한 목소리에야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이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죄송합니다, 강 거사."
"아니, 아닙니다. 제가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으니 따님께서 의심하시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요."
강호섭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며 멈춰섰다.
"말씀 나누던 중이셨던 것 같은데 저는 나중에 다시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강호섭이 등을 돌리려 하자 올리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마침 거기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으니 강 거사도 참여하시면 될 듯합니다. 괜찮습니까, 김도진 학생?"
올리버의 물음에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게 더 나을 것 같네요."
그리하여 강호섭이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올리버는 강호섭으로 인해 끊겼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하룻밤만에 일을 해결할 수 있다니,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
강호섭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도진은 그것을 느끼며 말했다.
"이번 일이 귀신이나 불가사의한 어떤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알고보면 아주 간단하고도 자연적인 현상에 의해 발생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귀신에 의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까?"
"네."
"……."
도진의 선언에 다시 한 번 정적이 내려앉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선언하기엔 그 의미가 꽤나 무거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도진은 그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일말의 망설임없이 선언한 것이었고 그래서 더더욱 무거운 의미를 가지고 이 자리에 정적을 가져왔다.
그 정적을 깨고 강호섭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김도진 학생. 정말로 그 말을 책임질 수 있습니까?"
"저는 책임질 수 없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즉답.
일말의 고민이나 지체없이 나온,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과 힘으로 가득찬 말에 강호섭은 생각해 두었던 머릿속의 모든 말이 지워져 나가는 것을 느끼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리고 이 친구는, 말을 했다면 그것을 반드시 실현하는 대단한 친구지."
이어진 우벽진의 신뢰가 가득한 말이, 결국 올리버의 마음을 움직였다.
"…무엇을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두 가지입니다."
도진이 손가락을 하나 폈다.
"하나는 후작 부부께서 그 집에서 하룻밤을 주무셔야 한다는 겁니다."
"…거기서 자야 한단 말입니까?"
"네."
어려운 일이었다.
사람의 몸이 지극히 차가워지는 건 나을 수 있다 해도 몸에 악영향을 남긴다.
그토록 건강했던 아내가 이토록 야윈 건 마음 고생만이 아니라 몸에 강한 음기가 머물며 남긴 악영향 때문이다.
정양하여 겨우 회복하긴 했으나 그것이 반복되면 결국 '건강의 최대치' 자체가 깎이고 만다.
정여원은 괜찮다는 얼굴이었으나 아내를 사랑하는 올리버 후작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그 걱정 또한 읽었기에 도진은 말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후작 부인께는 어떤 안 좋은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요."
"그걸 어떻게 믿어!"
이번에 소리친 건 다름 아닌 릴리였다.
어머니를 한껏 걱정하여 소리친 것이었기에 도진은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반대하기 위한, 깎아내리기 위한 반대가 아니라 오롯이 어머니를 걱정하는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담아 소리친 것이었으니까.
오히려 대견하다는 눈으로 릴리를 보며 웃어 주었다.
"괜찮아, 정말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만약 그럴 것 같으면."
도진은 고개를 들어 이곳에 모인 사람들과 시선을 마주했다.
아직 그 어떤 시간도 인연도 쌓지 못한 사람들인 만큼 도진의 말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얼굴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마주하며. 도진이 약간, 기세를 풀어냈다.
두웅-!
"……!"
기세가 퍼져 나간다.
그것은 마치 열린 둑을 통해 거대한 물이 통째로 쏟아져 내리는 것 같다.
혹은, 거대한 파동이 세상을 흔드는 것 같기도 했다.
온 세상이 파동으로 되어 있다면 도진에게서 그 파동이 시작되었다는 생각이 들게 할 만큼, 그 기세는 강렬했다.
그 기세는 일절 위협을 담고 있지 않았다.
위협할 필요도 없었다.
절대적인 기세는 굳이 요란하게 상대를 위협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절대적인 기세를 두르며 도진은 말했다.
"후작 부인께서 음기에 침범당할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악몽을 꾸지도 않으실 겁니다. 하지만 제 말을 믿기 힘드시다면,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저의 내공으로 아무런 일 없이 해결할 수 있다는 걸 믿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도진은 '만일의 사태'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기에 선언했다.
하지만 그 선언을 다른 사람들은 믿지 못한다.
그렇다면, 설령 정여원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더라도 그것을 대번에 해결할 수 있는 강렬한 내공을 가진 김도진을 믿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한 것이었다.
"그렇군요. 그거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올리버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진의 말대로였다.
아직 하룻밤만에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는, 그 어떤 나쁜 일도 없을 거라는 말을 온전히 믿기에 올리버는 그동안 너무 많은 거짓말을 접해왔다.
하지만 지금 보여준 기세는, 잠룡의 내공은 믿을 수 있었다.
설령 아내의 몸에 음기가 가득차더라도 이 잠룡이 품고 있는 내공이라면 단번에 음기를 몰아내고 오히려 몸에 생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다는 걸 무공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올리버는 잘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는 올리버와, 올리버를 마주한 도진을 보며 우벽진 또한 미소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워! 과연 놀라워.'
우벽진은 김도진을 '과대 평가'하고 있었다.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언제나 상상을 뛰어넘을 것이며 자신이 상상하는 그 어떤 미래보다 큰 사람이 될 거라 믿고 있었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무얼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줄 거라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도진은, 그런 우벽진의 과대 평가가 과대 평가가 아니게 만들어 버렸다.
소위 말하는 무림 르네상스를 거쳐 온 원로 무인이 바로 우벽진이다.
오군성을 포함한 '괴물'들과 같은 시대를 살아왔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우벽진마저 경악할 수밖에 없을 만큼 도진의 성장은 상상을 한참 뛰어넘어 있었다.
어느새 도진은, 우벽진마저 놀라 맹호추를 잡을 정도의 기세를 보여줄 수 있는 무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 자네가 그러니까 내가 도저히 가만 있을 수 없게 되는 거란 말이야.'
우벽진은 손이 근질거리는 걸 느꼈다.
당장 공방으로 달려가 이 참을 수 없는 감정을 망치에 담아 내리치고만 싶었다.
우벽진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하는 도진이, 멍하니 자신을 올려다보는 릴리에게 싱긋 웃어주며 기세를 갈무리한 뒤 두 번째 손가락을 펴며 말했다.
"두 번째는 하나의 물건을 구해주셔야 합니다."
"어떤 물건입니까."
올리버가 물었다.
"한빙석(寒氷石)입니다."
"……!!"
올리버의 눈이 커지며 거기에 놀람이 깃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