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남자는 40대 중년인처럼 보였다.
일반적으로 재능이 없어도 현대인들은 최소한의 무공은 시간을 투자해 익히곤 했다.
재능과 별개로 시간과 노력을 들여 닿을 수 있는 영역이란 게 있었고, 그 영역에 이른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 또한 일반인과 무림인만큼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단한 무력은 얻지 못하더라도 신체의 건강함을 유지하고 잔병치레를 하지 않을 수 있으며 무엇보다 육체의 노쇠를 늦출 수 있으니 시간을 들이는 게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무공을 익히지 않는 사람은 두 부류인데, 하나는 '어쩔 수 없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적나라하게 말하면 '게으른 사람'들이다.
남자는 아직 어느 쪽인지 섣불리 확정을 내려선 안 될, 무공을 아예 익히지 않은 사람이었다.
관을 쓰고 전통 한복에 흑백의 태극을 그려 넣은 두루마기까지 걸쳐 누가 보아도 '그쪽'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걸 명백하게 알 수 있는 행색이다.
무당, 퇴마사, 혹은 도사.
무공이라는 게 현실이 되면서 그쪽 관련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 또한 상당히 늘어났다.
무공과 관련된 고문헌에서 과거에 이매망량과 그들을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도술, 혹은 퇴마술에 관한 이야기 또한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무공이 부활했으니 이매망량이나 도술 등에 관한 것 또한 분명히 실존했었다는 이야기로 이어진 것이다.
허나 안타깝게도 그 위상은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무공과 달리 이매망량이나 도술, 퇴마술 등에 관해선 이렇다 할 '신비'라는 게 관측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쪽의 이야기는 '미신'으로 치부되었고 업계의 종사자들 또한 과학적으로 그 어떤 것도 증명하지 못했다.
믿던 사람은 더욱 큰 믿음을 가졌고 종사자들은 이것이 거짓이 아니라 소리치는 목소리에 조금 더 힘이 실리긴 했지만 결국 제자리걸음이었단 소리다.
그런 사정의 업계에 종사하는 듯 보이는, 약간은 째진 눈에 지저분하게 수염을 기른 남자는 거칠게 문을 열고 씩씩대며 들어왔으나 우벽진과 시선을 마주한 순간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았다.
무공 고수만큼이나 빠른 태세의 전환이었다.
"…우벽진 명장이십니까?"
"맞소만. 나를 압니까?"
물흐르듯 자연스러운 태도에 우벽진은 일단 대답을 했다.
남자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우벽진 명장님을 모를 수가 없지요. 그리고 이 집의 주인이신 올리버 후작님의 친우이시기도 하니 당연히 알고 있어야지요."
그러면서 흘끗, 도진 쪽에도 시선을 주었다.
"저쪽은…… 요즘 후기지수로 유명한 잠룡 김도진 학생이로군요."
"네. 맞습니다."
남자는 교복을 입고 있지 않았음에도 도진 또한 단번에 알아보았다.
이래저래 아는 게 많은 듯한 사람이다.
"그래서, 거사(居士)는 뉘시오?"
거사란 그쪽 계열로 보이는 사람을 흔히 부르는 호칭이었다.
남자는 우벽진의 물음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선 말했다.
"아, 실례했습니다. 저는 올리버 후작님에게 이 저택의 관리 권한을 받은 강호섭이라고 합니다. 미욱하지만 도술(道術)을 수련하고 있는 몸이지요."
-흠. 도맥(道脈)을 이은 것처럼 보이진 않는데.
-저 역시 그렇게 보입니다.
심상세계에서 들리는 스승들의 말을 티내지 않으며 도진은 우벽진과 자칭 도사 강호섭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셨군요. 한데,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토록 화를 내며 들어온 겁니까?"
우벽진의 물음에 강호섭은 큼, 하고선 말했다.
"저는 이 집의 제령(除靈)을 위해 오랜 시간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제령이란 어떤 장소에 깃든 영혼, 혹은 귀신을 제거한다는 뜻이다.
흔히 액운이 끼었거나 귀신에 씌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제령을 위해 도사나 무당을 찾곤 했다.
"올리버 후작님은 이 집에 깃든 악귀를 쫓을 사람을 찾으셨고 제가 그것을 위해 벌써 세 달째 공을 들이고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올리버 후작은 이 저택에서 일어난 불가사의한 일을 해결해 줄 사람을 수배했는데 거기에 수많은 도사, 무당, 퇴마사들이 몰려들었다고 했다.
허나 누구 한 명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고 마지막으로 나선 것이 강호섭인 듯했다.
"저는 재능이 부족해 온전한 도술을 익히진 못했으나 그래도 정통 도맥을 이어 미천한 재주나마 부릴 수 있습니다. 시간과 공을 들인다면 이 집에 깃든 강력한 악귀를 쫓아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선 이 집에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내공을 익혀 생기와 원기가 지극히 강한 무림인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악귀는 그런 기운에 이끌리는 법이니까요."
강호섭의 말에 따르면 그러했다.
강호섭은 이 집에서 부적을 태우고 귀신들이 꺼리는 신령한 기운을 가득 채우기 위해 수많은 공을 들였다고 했다.
그 자신 또한 정화수로 매일 같이 목욕재계를 하고 부정풀이 쑥의 향을 몸에 배게 하고서야 집에 출입하는 노력을 들였다고 열변했다.
'그래서 이런 냄새가 났구나.'
이제서야 말하는 거지만 강호섭은 멀리 있을 때부터 기척 이전에 지독한 냄새가 나 막대한 존재감을 피로하고 있었다.
악취와는 다른 냄새라 그게 뭔가 했는데 그 열과 향, 연기로 잡귀, 잡신 등을 퇴치한다는 부정풀이 쑥을 태운 냄새를 깃들인 것이었다.
"미욱한 저는 그 악귀를 성불시키거나 소멸시키진 못하지만 최소한 쫓아낼 수는 있도록 계속 공을 들여왔는데 외부인이 들어온 흔적에 화가 나 달려온 것이었습니다."
"그랬군요."
믿고 안 믿고를 떠나 말 자체는 조리가 있었다.
강호섭은 고개를 끄덕이는 우벽진과 도진을 보며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해해 주신다면, 실례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이곳에서 나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겨우 악귀가 이 집에서 정을 떼가는 차였는데 이렇게 무림인이 방문한 탓에 모든 것이 허사가 되게 생겼습니다."
그러면서 원망의 눈으로 우벽진과 도진을 바라보았다.
우벽진은 도진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판단을 맡기는 시선이었다.
도진은 고개를 끄덕이고선 웃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올리버 후작님께는 제가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벽진과 도진은 저택을 나오게 되었다.
두 사람이 떠나자 강호섭은 분주히 소금을 뿌리고 독한 연기가 나는 부정풀이 쑥과 부적을 태우는 등 부산을 떨었다.
그리고 저택 깊숙이 들어가 콜록이며 중얼거렸다.
"이런 씨발. 다 끝난 줄 알았더니……. 콜록! 그래도 이걸로 좀 더 벌어먹을 수 있겠구만. 콜록!"
* * * *
저택을 나와 걸으며 우벽진이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함께 걷는 도진은 여상스레 답했다.
"저는 도술이나 선술, 이매망량 등에 관해선 아는 바가 없으니 단정지어 말하긴 그렇네요."
중도(中道)를 추구하는 도진은 함부로 단정지어 말하지 않았다.
설령 확신이 든다 해도 그것이 확정이 되지 않는 한 입밖으로 함부로 꺼내지 않는 것이다.
"다만, 올리버 후작 부인을 직접 만난다면 단정지어 말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도진의 말에 우벽진이 우뚝 멈춰섰다.
거기에 포함된 뜻을 대번에 읽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네!"
도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만약 제 생각이 맞으면,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 * *
우벽진은 지체할 것 없이 바로 도진을 태우고 픽업 트럭의 액셀을 밟았다.
거침없이 달린 픽업 트럭은 교외의 잔잔하게 흐르는 강을 배경으로 둔 어느 전원 주택 앞에 도착해서야 멈췄섰다.
2층 주택은 나무를 많이 사용하여 따듯한 느낌을 주었는데, 이곳이 다름 아닌 올리버 후작이 머무는 집이었다.
영국과 한국을 왔다갔다 하던 올리버 후작이 마침 한국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어서오십시오."
우벽진이 벨을 누르니 단정한 집사 차림의 남자가 인사하며 맞아주었다.
급히 찾아온 것이었기에 마침 볼일을 보러 나간 올리버 후작 부부는 아직 부재중이어서 거실에서 기다리게 되었다.
그렇게 거실에 앉아 있자니, 적대적인 시선이 도진에게 꽂혀 들었다.
기척을 따라가니 2층으로 이어진 계단 중간에서 도진을 노려보는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있었다.
여자아이는 드레스라 부를 수 있을 만큼 화려한 옷을 입은,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잘 어울리는 금갈색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꼬마 아가씨였다.
남자아이는 여자아이보다 좀 더 어린, 기가 약해 보이는 곱상하고 잘생긴 아이다.
척 봐도 남매로 보이는 두 아이는 은밀히, 그러나 훤히 드러나는 곳에서 도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말이다.
다만 그럼에도 귀엽게 느껴지는 것은 그 남매가 도진의 동생들 또래였기 때문이다.
도진이 오히려 미소지어주니 소녀는 잠시 움찔하다 찔끔 물러난 동생을 두고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와 도진의 앞에 섰다.
그러고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도 사기꾼이죠?!"
"사기꾼?"
소녀가 금갈색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기꾼! 아버지와 어머니를 속여서 돈을 챙기려는 사기꾼이요!"
"어허, 릴리야."
안면이 있는 우벽진이 소녀, 릴리를 말렸다.
하지만 도진은 웃으며 고개를 젓고선 릴리와 시선을 마주했다.
"부모님을 걱정하는 거구나. 착하다."
"윽!"
눈을 통해 전해지는 진심에 릴리가 움찔하며 물러섰다.
사람의 눈을 마주하는 버릇이 있는 도진은 그 마주한 눈을 통해 진심을 전하곤 했다.
어린아이이기에 그런 진심에 더욱 민감한 릴리는 한 발 물러서고 만 것이었다.
"흐, 흥!"
그러고서는 붉어진 얼굴을 홱 돌리며 도도도, 집사의 뒤에 숨어 버리고 말았다.
남자아이는 여전히 계단의 난간 사이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중이고.
그 모습들이 귀여워 도진은 하하 웃고 말았다.
그렇게 남매는 도진을 경계하고, 도진은 그 모습이 귀여워 흐뭇하게 웃는 사이 올리버 후작 부부가 도착했다.
"아버지!"
남매가 거실에 들어서는 부부에게 달려가 인사했다.
안기는 것이 아니라 우아하게 인사하는 부분에서 과연 꼬마 귀족이라는 인상을 받게 했다.
아이들을 품어준 부부는 영국인과 한국인의 조합이다.
훤칠한 키에 부드러운 인상의 금발 미남이 바로 우벽진의 친우이자 한국에 유명한 영국의 귀족 올리버 웨일스다.
그리고 그 곁에 선, 올리버와 잘 어울리는 큰 키의 여성이 올리버의 아내이자 한국인인 정여원이다.
검은색이 아닌 갈색에 가까운 머리카락이 특징으로, 본래 당당하고 당찬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마음 고생을 심하게 해서인지 지금은 야위어 보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향수병까지 겹쳐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님이 살던 집에 들어갔는데 그런 일을 겪었으니 오죽할까 싶었다.
육체의 건강은 되찾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병들어 있으니 정여원은 아이를 품에 안고 미소짓고 있음에도 허해 보였다.
"찾아와줘서 고맙네, 벽진."
"무얼. 이렇게 갑자기 찾아왔는데 말이야."
올리버와 우벽진은 가볍게 포옹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갑작스런 연락과 만남이었음에도 전혀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 두 사람의 사이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당신이 바로 벽진의 뮤즈라던 잠룡이로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올리버는 외국인답게 조금은 어색한 발음으로, 그러나 유창하게 인사하며 손을 내밀었다.
도진은 그 손을 마주잡아 악수하며 답했다.
"예.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웨일스 후작님. 김도진입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마주앉았다.
올리버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래, 무슨 일로 그리도 급하게 우리를 부른 건가?"
무언가 들은 게 있는 듯한 얼굴이다.
올리버의 물음에 우벽진은 시선을 도진에게로 향했다.
그 시선에, 도진은 웃으며 망설이지 않고 선언했다.
"후작 부인께서 겪으신 일, 제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