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일방적인 관계는 언제든 붕괴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대부분 나태로 이어지고 어떨 때엔 자격지심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대부분은 둘 다이고.
가져다주는 먹이만 먹느라 사냥하는 법을 잊어 버린, 살이 찐 맹수에도 비유할 수 있다.
편히 앉아 주는 것만 받아먹는 맹수는 우람한 근육이 쪼그라들고 지방이 차오르며 사냥하는 법을 잊는다.
이윽고 나태함에 허우적거리느라 용맹함까지도 잃어 버려 그 존재성을 상실하고 만다.
그렇게 되어 버린 주제에 적반하장으로 헌신하며 먹이를 가져다주는 존재를 점점 더 막 대하게 되고 이윽고 그 관계는 붕괴하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도진이기에 일방적으로, 그것도 과분하게 무언가를 받는 관계를 경계했다.
거기에 익숙해지거나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도록.
사람은 불편한 것에 적응하는 건 어렵지만 편한 것에는 적응조차 필요없이 받아들이는 습성이 있었으니 말이다.
하물며 도진은 진취적인 사람이고 싶어했고 어떤 일이든 스스로의 손으로 이룩해야 하는 성격이었다.
협동 게임을 해도 승리를 결정짓는 건 자신이어야 할 만큼 말이다.
때문에 명성공방에서 지극한 호의를 보이며 무언가를 주고 싶다 해도 그것을 경계한 것이고.
하지만 위지혁의 조언 덕분에 조금 다른 결론에 이를 수 있었다.
일방적으로, 많은 것을 받기만 하는 관계를 항상 경계해야 하는 건 맞다.
허나 그것이 일방적이지 않고 과분하지 않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명성공방은 분명히 큰 곳이고 그곳에서 줄 수 있는 것 또한 '큰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받는 도진 또한 전생과 달리 '작은 사람'이 아니다.
도진은 이미 차세대 후기지수 중 한 명으로 큰 명성을 떨치고 있었고 그 명성과 존재는 점점 더 커질 것이었다.
그러니까 명성공방에서 주는 것은 큰 것이되 도진에게 과분한 것이 아니다.
받기만 할 것도 아니다.
도진 역시 명성공방 못지 않게 큰 것을 줄 수 있는 특별한 사람이다.
서로가 대등하게 주고받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
우서연과 우벽진도 말하지 않았던가.
친구가 되어 주었으면 한다고.
계약을 맺어 서로가 서로를 돕는다면 좋지 않겠냐고.
그 말대로였다.
경계해야 할 것은 일방적인 관계이지 좋은 친구 관계가 아니다.
성장하는 도진은 오래 지나지 않아 명성공방의 명성에 부족하지 않은, 오히려 더 큰 무인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 계약은, 거절할 이유가 없는 좋은 인연을 맺는 일이었다.
"그 제안,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도진은 명성공방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크하하하! 그래야지!"
우벽진은 호쾌하게 웃으며 맥주를 쭈욱 들이켰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우서연 역시 만족스런 호랑이를 연상케하는 미소를 지었다.
"형! 앞으로 자주 봐요!"
우서진이야 말할 것도 없이 눈 오는 날의 어린 아이처럼 신나했고.
그렇게 파트너, 친구가 됨으로써 건배를 하며 분위기가 고조된 자리에서 우벽진이 말했다.
"이제 친구가 되었으니 하는 말인데 자네, 우리와 이웃이 되지 않겠나?"
"이웃……이요?"
언뜻 의도한 바가 짐작되지 않는 물음에 도진이 되물었다.
우벽진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웃 말이야. 같은 동네에 살자는 거지."
같은 동네.
바로 떠오르는 건 우벽진네 가족이 문월동 달동네로 이사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조금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도진의 생각을 짐작한 우벽진이 띄운 웃음을 더욱 진하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 이사오지 않겠나?"
* * * *
그리고 며칠 뒤 늦은 밤.
도진은 아버지 어머니와 거실에서 마주 앉게 되었다.
도진의 이야기를 들은 서정원이 조금 놀란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명성공방이랑 계약을 했는데 그 계약금으로 전셋집을 받을 수 있다고?"
"네. 그렇게 됐어요."
파트너 제안을 수락한 도진은 다음날 진지한 자리에서 계약서를 썼다.
분위기와 달리 계약서는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바깥에 보여주기 위해 전속 모델 계약과 비슷한 느낌으로 계약서를 작성하긴 했지만 그 내용은 우스갯소리로 '친구 계약'이라 할 만한 것이었으니까.
이를테면 이런 느낌이다.
-'을'이 식사를 제안할 경우 '갑'은 마음이 내키면 받아들일 수 있다. 단, 이때 식사비는 특이사항이 없는 한 '을'이 결제한다.
이때 을은 우벽진일 수도 있고 우서연일 수도 있고 우서진일 수도 있다.
'협의해야 할 일이 있으면 그때그때 따로 계약서를 작성하기도 할 테니 지금 내용은 크게 신경쓰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일은 우서연이 말한 대로 그때그때 별도의 계약서를 작성할 예정이었기에 그 부분에 관한 문제도 없었다.
계약 내용은 그러했고 다음인 계약금이 지금 도진이 부모님과 의논을 나누게 된 이유였다.
"계약금은 현금으로 받는다면 3억을 받기로 했어요. 다만 이걸 절반만 받는다면 현물로 숭무동의 단독 주택을 5년간 전세로 내 주겠다는 제안을 하더라구요."
"숭무동?"
서정원의 눈이 커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숭무동은 지금 서울에서 가장 '비싼 곳'이었기 때문이다.
숭무고가 탄생하면서 그 일대의 땅값은 당연히 폭등했다.
그리고 구획 재정비가 되면서 새로이 탄생한 동네가 바로 숭무동이다.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숭무고와 인접해 있는 부촌으로 각계의 명사들이 모여 사는 럭셔리 단독 주택들로 채워져 있다.
최근에는 명성공방의 오너 일가가 멋드러진 저택을 신축하여 새로이 입주한 것으로 화제가 되었다.
다름 아닌 그런 곳의 집을 계약금으로 5년간 전세를 받을 수 있다고 도진은 말한 것이었다.
"네, 숭무동이요. 우 명장님이 말씀하시길 본래는 매매로 나온 집을 올리모델링할 계획으로 매입했는데 막상 리모델링을 다 하고 나니 뭔가 아쉬워서 신축하기로 하면서 비게 되었다고 하시더라구요."
팔려면 언제든지 팔 수 있었다.
하지만 리모델링에 우벽진 일가가 직접 참여했기에 팔기 아쉬운 느낌이 있어 놔두었는데 이렇게 도진에게 '선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제안한 것이었다.
듣고 있던 김서우가 말했다.
"감사한 이야기지만 이런 걸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구나."
전세라고는 해도 다른 곳도 아닌 숭무동의 넓은 마당 딸린 단독 주택이었다.
심지어 명장 우벽진 일가가 참여하여 올리모델링을 한.
매매로는 얼마나 할지 상상도 할 수 없고 전세로만 해도 수십 억은 호가할 저택을 5년간 '계약금'으로 준다니 김서우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도진은 그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기에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계약금으로만 받는 건 아니에요. 이건 우 명장님네에도 좋은 이야기니까요."
실제로 그러했다.
"이웃이 되면 쉽게 왕래할 수 있고 그러면서 제가 서진이 무공도 좀 봐주기로 했고 자연스럽게 드나들며 명성공방의 물품을 홍보하는 영상을 찍기도 할 거거든요."
친분을 쌓는다.
그러기 위해 이웃이 되기로 했고 그 친분을 쌓는 과정에서 서로가 긍정적인 것들을 주고받는다.
이를 위해 명성공방은 '마침 남는데 남에게 주기는 아까운 집'을 대여해주기로 한 것.
딱 그 정도로만 생각하면 되는 일이었다.
과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과분할 정도로 도진은 '작은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아버지, 어머니. 아들이 요새 좀 많이 잘나졌잖아요. 그러니까 그만큼 대우를 받는 거라 생각해 주세요."
"저는 아버지랑 어머니가 좋은 곳에서 사셨으면 좋겠어요. 유진이랑 호진이도 좋은 곳에서 살고, 좋은 곳의 영향을 받아 좋게 자랐으면 좋겠구요."
도진은 그 부분을 부모님이 이해하실 수 있도록 설명했고 자신의 바람도 이야기했다.
그리하여, 이내 부모님 두 분이 고개를 끄덕이시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 이사 가자."
* * * *
"유진아. 호진아."
"응?"
"우리 곧 이사 갈 거야."
"…정말?"
"응."
"…어디로?"
도진의 말에 유진이와 호진이는 기뻐하기보다 불안한 눈동자로 되물었다.
어릴 적의 도망치듯 집에서 나가야 했던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 동생들 앞에 도진은 휴대폰으로 단독 주택 사진 하나를 띄운 뒤 내밀고 말했다.
"여기로 갈 거야."
사진 속 단독 주택은 마당이 딸린, 럭셔리 단독 주택이라 검색하면 나올 법한 멋드러진 2층 저택이었다.
"…여기?"
"진짜 여기야?"
"응. 진짜 여기. 오늘은 집을 보러 갈 거고, 이번 달 안으로는 이사 갈 거야."
"진짜 진짜 여기야?"
호진이가 재차 확인하며 묻고 유진이는 오빠를 빤히 올려다 보았다.
그런 동생들의 눈을 마주하며, 도진은 씨익 웃었다.
"준비하고 나와. 오늘 여기 보러 갈 거야."
"와아아아아아!!"
"응!"
* * * *
이사가 결정되고 도진은 유진이와 호진이에게도 그 이야기를 해 주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말을 안해서 그렇지 불편한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형광등은 광량이 부족하고 채광이 안 돼 낮에도 어두컴컴 했고 환기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소파를 둘 공간은 물론 없었고 집 전체가, 특히 임시로 가벽을 세워 만든 방이 소음은 물론이요 단열과 냉방에도 취약했다.
집이 낡아 비가 새서 김서우가 몇 군데나 보수를 했었다.
기름 보일러를 쓰는데 웃풍이 있어 겨울마다 난방비가 부담이었고 도시 가스는 당연히 들어오지 않아 일일이 LPG 가스통의 잔량을 확인하고 전화를 해야 했다.
그나마도 차가 들어올 수 있어 배달을 와 주는 것이었지 아니었다면 길이 나 있지 않은 몇몇 집처럼, 직접 빈 통을 들고 가 새것으로 교환해 오는 수고를 해야 했을 것이다.
유진이와 호진이에게는 그런 것 하나하나가 망해 버린 집안을 체감하게 하는 것이었다.
요즘 도진이, 오빠이자 형의 이름이 영웅시되고 아버지와 어머니 또한 승진을 하며 바뀌어가는 집안의 분위기가 두 동생이 고개를 들고 어깨를 펼 수 있도록 해 주었지만 삶의 터전 때문에 근본적인 어떤 것이 해소되지 않고 있었다.
한데 그것이 드디어, 근본적인 부분에서의 변화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좋아?"
"응!"
백미러에 비치는 두 동생은 안전벨트가 아니었다면 날아가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들떠 있었다.
피식 웃으며 물으니 한 목소리로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그 모습에 옆에 앉은 서정원 또한 미소지었다.
"아빠도 같이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게."
아쉽게도 오늘, 집을 보러 가는 날에 일요일임에도 김서우는 함께 하지 못했다.
이미 특근과 야근을 신청했는데 그것을 빼지 못한 것이었다.
대신 이삿날과 그 다음날은 쉬기로 동생들과, 그리고 도진과 약속을 했다.
본래는 어머니 역시 찬모로서 일할 땐 정해진 휴일 말곤 일요일에도 일을 나갔지만 직책이 바뀌면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주말은 무조건 쉬게 되었다.
요즘은 사업을 확장하는 초창기라 토요일도 근무를 하지만 급여가 훨씬 높은 데다 무언가를 새로이 만들어 나간다는 성취감에 서정원은 오히려 활기를 띠고 있었다.
그렇게 아버지가 함께 하지 못해 아쉽지만 기대감을 가지고 달려온 도진네 가족의 앞에,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될 숭무동이 펼쳐졌다.
"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