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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148화 (148/741)

148화

우벽진.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명장으로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실력을 가진 대장장이였다.

하지만 어느날을 기점으로 그 소문이 뚝 끊기며 두문불출했다.

숭무고의 의뢰를 받아 간간이 무구를 제작하는 걸 제외하고서는 대장간을 나오는 일도 없다시피해 의아한 시선을 받았으나 으레 괴짜들이 그렇듯 잠시간 은둔하는 거라는 쪽으로 여론이 기울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손자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자존심은 물론이요 삶의 방식마저 포기하며 태양권가에 모든 것을 저당잡혀 있었다.

그것을, 도진이 손자의 목숨과 함께 구원해 주었다.

그 우벽진이 손자와 함께 찾아온 것이었다.

"잘 지냈는가?"

처음 보았을 때 구부정한 허리와 다듬지 않은 수염,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머리까지 추레했던 우벽진은 더 이상 없었다.

시원스레 허리와 어깨를 편 우벽진은 통짜 쇠로 된 망치 맹호추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신력(神力)이 잘 어울리는 근육으로 들어 찬 '짐승남'이었다.

하지만 깔끔하게 정리해 빗어 넘긴 머리카락과 잘 다듬어진 수염은 젠틀하고 스마트한 이미지가 깃들어 있어 두 가지 매력이 공존하는 미중년의 모습을 완성했다.

도진은 그런 우벽진을 마주하며 미소로 인사를 받았다.

"네, 잘 지냈습니다. 명장께서는요?"

"하하! 나야 당연히 잘 지냈지. 내 소식 듣지 않았나?"

"당연히 들었죠.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다 들었을걸요."

우벽진은 복귀와 함께 명성공방에 합류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손주들과 함께 미국으로 갔다.

태양권가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였는데 겉으로 내놓은 명분, 작품 활동 또한 소홀히 하지 않았다.

도진에 의해 자극받은 영감이 망치를 들지 않을 수 없게 했던 것이다.

손자의 구원을 확신하며 달 아래 환희와 희망으로 가득 채워진 망치를 내리쳤던 때의 기억을 되새기며 쇠를 두들겼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무구들, 세간에서는 '눈(雪)'이라는 테마로 묶인 무구들은 우벽진의 복귀작이자 세계에서 인정받는 명작으로 이름 높은 경매장에서 최고가를 경신하며 팔리게 되었다.

명장 우벽진이 노쇠하지 않았음을, 오히려 더욱 발전했음을 증명하는 쾌거이자 명성공방의 주가를 다시 한 번 폭등시킨 낭보였다.

대한민국의 명장이 이룩한 그 업적은 당연히 온갖 매체를 통해 대서특필되었고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 대단한 명장 우벽진이 호의가 가득한 눈으로 씨익 웃고선 슬쩍 몸을 틀었다.

함께 온 손자에게로 화제를 옮긴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형."

"응, 안녕. 건강해 보이네?"

"네! 형 덕분에요."

오랜만에 본 우서진은 볼이 발갛고 생기가 가득한 것이 과연 삼음지체의 저주를 완전히 이겨낸 모습이었다.

그야말로 얼음을 깎아 만든 듯 선이 곱고 신비로운 외모의 우서진은 누가 보아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미소녀다.

목젖조차 그 존재감이 희미하고 목소리 또한 미성. 몸의 선마저 여리여리하고 분위기 또한 섬세한 것이 여자의 그것이다.

전과 달리 머리를 짧게 깎은 것만이 유일하게 여성적인 부분이 덜한데 그것만으론 가릴 수 없는 신비하고도 아름다운 외모다.

대번에 삼음지체를 치료한 부작용으로 조금 더 여자에 가까운 기질이 될 거라 예상했는데 딱 그대로였다.

다만 그로 인해 성정체성에 혼란이 오거나 고생을 한 흔적은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우서진은 분명한 남자였다.

그리고 저주와 함께 주어진, 무공에 대한 재능을 꽃피우고 있는지 느껴지는 기세가 보통이 아니다.

겉으로는 여리여리해 보이지만 언뜻 드러난 근육은 소위 말하는 '실전압축근육'마냥 힘으로 그득하다.

그렇게 건강해진 우서진은 맑고 깊은 눈동자에 동경을 가득 담아 도진을 보며 말했다.

"그날 제대로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떠나야 해서 얼마나 슬펐는지 몰라요. 정말, 정말로 고마워요, 형!"

"아하하. 그래."

우서진의 시선은 상미를 닮아 있었다.

마치 지옥에서 구원해 준 구세주는 보는 듯한 시선.

차이가 있다면 상미의 시선은 은은하고도 깊었고 우서진의 시선은 태양처럼 열렬하다는 점이다.

그 열렬한 시선을 피해 도진의 시선이 조금 더 옆으로 향했다.

도진을 찾아온 손님이 '한 명 더' 있었던 것이다.

우서진이 머리를 기르고 조금 더 나이를 먹는다면 이렇게 될 듯한 신비한 외모의 여성이었다.

-호오, 이쪽도 제법 강한 음기를 가지고 태어났구나.

위지혁은 그녀를 그렇게 평가했다.

삼음지체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보통 이상의 강한 음기를 무공에 대한 재능과 함께 타고 났다.

거기에 맞는 무공을 익혔는지 꽤 서늘한 기세를 갈무리하고 있음을 도진은 간파할 수 있었다.

그녀가 초승달처럼 휘어지는 눈이 인상적인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서진이 언니, 아니 누나인 우서연이라고 해요."

"네, 안녕하세요."

"서진이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며칠 만나지도 않았으면서 어찌나 찬송을 해대던지 저도 한 번 꼭 만나고 싶었는데 이렇게 인사드리게 됐네요."

"아하하. 그랬었나요."

"네. 그런데 직접 보니 서진이의 그 호들갑이 이해가 되네요. 정말로, 매력적이시네요."

그렇게 말하면서 입술을 슬쩍 핥는데 어쩐지 그 신비하고도 여리여리한 분위기에 맹수의 기세가 슬쩍 섞였다.

외모는 우서진을 닮았는데 그 기질은 맹호추로 이름을 떨쳤던 우벽진을 닮아 있었다.

이슬만 먹고 살 것 같은 외모와 달리 본성은 육식을 하는 맹수라는 걸 그 순간 도진을 알 수 있었다.

"그때는 급히 떠나느라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했지. 그 뒤로 연락조차 하지 못했고 말야."

"네, 그랬죠."

인사가 끝나자 우벽진이 말했고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서진의 치료가 끝나자 우벽진은 손자와 함께 다음날 바로 공방을 떠나 아들 내외가 있는 명성공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혹여 도진이 태양권가의 의심을 사게 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 뒤로 연락을 자제한 것도, 그리고 미국으로 간 것도 모두 태양권가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조치.

덕분에 도진은 귀찮은 일을 겪지 않았다.

상식적으로도 도진이 현대의 불치병을, 그것도 하루만에 치료할 거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의학이라곤 전혀 모르는 사람이 하루만에 치료 불가 판정을 받은 말기 암 환자를 치료하는 것만큼이나 터무니 없는 이야기였다.

때문에 태양권가는 명성공방에 정보력을 집중했고 없는 걸 찾았으니 당연히 그 어떤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괜히 헛발질만 하면서 인력과 자금을 낭비하다 후계자 싸움으로 인해 그것마저 중단되었다.

그 사이 우서진은 완치된 모습으로 명성공방 3세로서 활동을 시작했고 말이다.

그렇게 활동을 시작한 우서진과, 명성공방에서 이미 유능함을 인정받으며 자신의 영역을 구축한 손녀를 데리고 우벽진은 도진을 찾아온 것이었다.

"갑작스럽지만 그동안 쌓인 이야기도 할 겸, 그리고 긴히 할 이야기도 있는데 내 한 턱 쏠 테니 시간을 좀 내줄 수 있겠는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도진은 웃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 * * *

동생들과 부모님에게 이야기를 해 놓고 도진은 우벽진의 차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우벽진의 차는 아메리칸 스타일의 픽업 트럭이었는데 운전은 우서진의 누나, 우서연이 했다.

그 성격을 반영하듯 신호를 철저히 지키면서도 호쾌한 스타일이었다.

고급 패밀리 레스토랑의 룸을 하나 잡고 반주를 곁들인 식사를 하면서 그날 못했던, 그리고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다.

술을 하지 않는 도진은 콜라를 마셨는데, 마치 따라하는 것처럼 우서진도 콜라를 홀짝였다.

"하하! 자네가 봤어야 했어! 그놈들 코가 납작해지는 순간을 말야! 하하하하!!"

술이 들어간 우벽진은 취기를 최소한으로만 눌러 불콰해진 얼굴로 크게 웃었다.

예의 미국 경매장에서의 이야기였는데, 세계에서 완벽하게 자신이 인정받았던 것이 우벽진에게 그토록 기뻤던 일이었음을 도진은 알 수 있었다.

덤으로 은근히 인종 차별을 하며 무시하던 '코쟁이'들의 코도 납작하게 눌러 주었고 말이다.

"형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대장장이지만 명성을 날리는 무림인이 되고 싶어서 열심히 수련했어요!"

"아하하. 그거 완전 우벽진 명장님 아니야?"

"음, 듣고 보니 그렇네요. 하지만 전 할아버지보단 형처럼 되고 싶어요."

"뭐야, 이놈아?"

도진의 옆에 앉은 우서진은 고개가 도저히 정면으로 향하질 않고 도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동경과 존경의 시선은 나쁜 기분이 아니었지만 조금은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열렬하고 직선적이다.

그에 비해 우서연의 시선은 은근하면서도 집요하다.

입술에 닿은 와인 잔 너머로 비치는 예쁜 눈동자에는 호감이 묻어나지만 맹수와 같은 시선은 역시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다.

도진은 조금 분위기를 바꿀 요량으로 물었다.

"음, 그러고보니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셨죠. 무슨 이야긴가요?"

"아, 그렇지. 그 이야기를 해야지."

그러면서 우벽진은 시선을 우서연에게로 향했다.

아무래도 긴히 할 이야기를 맡은 게 우서연인 듯했다.

우서연은 와인 잔을 내려 놓고 자세를 바로하며 미소지었다.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명성공방의 경영전략 팀에서 근무하고 있는 우서연이에요."

"아, 중요한 일을 하고 계셨네요."

우서연의 나이는 열아홉이라고 들었는데 그것보다 조금 더 성숙해 보인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일찍이 사회로 나간 완벽한 사회인이다 보니 좀 더 성숙한 분위기다.

여기에 중학교 졸업 후 바로 미국으로 건너가서인지 색다른 분위기도 깃들어 있다.

"부모님이 믿고 맡겨 주셔서 그저 열심히 하고 있을 뿐이죠."

겸양의 말을 하고서 우서연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도진 학생, 혹시 우리 명성공방의 '파트너'가 되어주지 않으시겠어요?"

"파트너…… 요?"

생각지 못했던 단어에 도진이 되물었다.

우서연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네. 우리 명성공방은 도진 학생에게 큰 은혜를 입었고, 그 은혜를 갚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미래가 아니라 지금부터 좋은 인연을 쌓아 나가고 싶다는 생각 또한 가지고 있구요. 그러니까 도진 학생이 우리의 파트너가 되어 주시기를 바라고 있어요."

"음, 그 파트너는 어떤 일을 하게 되는 건가요?"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조금 애매하네요. 조건이 맞으면 저희의 물품을 광고해 주실 수도 있겠고 어떤 때엔 서진이의 무공을 봐주실 수도 있구요. 때로는 할아버지가 영감을 붙잡을 수 있도록 함께 식사를 해주셔야 할 수도 있겠네요."

"그건……."

우서연이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친구'가 되어 주셨으면 해요."

"음……."

의도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어떤 수작이 깔려 있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명성공방은 도진과 친구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우서진을, 그리고 우벽진을 구원해 준 도진에게 은혜를 갚고 싶어 했고 더 친하게 지내길 바라는데 그를 위해 준비한 게 '파트너 계약'이었다.

"받아들여 주지 않겠나? 우리는 자네에게 많은 걸 해주고 싶어. 하지만 자네는 그것을 쉬이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겠지. 그러니까 이렇게 계약을 맺어서 부담없이 서로가 서로를 돕는다면 좋지 않겠나."

"형! 받아 주세요."

우벽진이 말하고 우서진 또한 거들면서 간절한 눈으로 도진을 응시했다.

도진은 조금 고민했다.

받아들여서 나쁠 것이 없는 계약이다.

다만 중요한 일인 만큼 곱씹어 보는 것이었다.

-꽤 커다란 제안이구나.

-네. 그래서 받아들여도 되는가 고민하게 되네요.

-좋은 자세다. 하지만 그 고민에 매몰되는 것만큼은 주의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스승이 노파심에 하나만 더 말하자면, 상대의 크기를 가늠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크기 또한 가늠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크기.

-그래. 너에게 제안한 명성공방은 확실히 큰 곳이다. 그렇다면 제안을 받은 너는 어떠하냐. 그 제안이, 과분하다 생각하느냐?

위지혁의 물음은 도진의 고민을 종결시키는 물음이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결론을 내린 도진이 미소지으며 우벽진을, 우서진을, 그리고 우서연을 마주하며 말했다.

"그 제안,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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