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사회와 구별되는 무림이기에 폭력은 실력 행사라는 정당한 수단 중 하나로 인식된다.
실력 행사의 의도가 도리에 어긋나지 않고 고칠 수 없는 장애를 남기거나 목숨을 빼앗지 않는 한 '정상 참작'이 된다.
때문에 도진이 숭무회의 학생들을 제압하는 과정에서의 '실력 행사'는 정당한 수단이 되었다.
저쪽이 다수로 한 명에게 덤볐으니 더더욱 그 정당성은 강화되었고.
그로 인해 다친 학생들에 관한 보상도 고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 무림인들은 모두 이런 상황에서의 '무림인을 위한 특별 보험'에 필수로 가입하고 꽤 높은 보험료를 내기에 거기서 병원비가 공제되기 때문이다.
이런 여러가지 배경으로 무림학교는 고질적으로 폭력에 관한 문제를 안고 있어야 했지만 당연히 모든 폭력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무림인이면서 동시에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야 하기에, 더 큰 힘을 행사할 수 있는 만큼 도(道)와 협(俠)이 더더욱 중요하게 여겨졌다.
번지르르한 말이 아니다.
작은 힘에 의한 문제는 작은 문제가 되지만 큰 힘에 의한 문제는 큰 문제가 되기에, 도와 협에 그치지 않고 법(法)의 영역까지 걸쳐 있기에 명문일수록 더더욱 그런 문제를 경계하는 현실적인 영역의 이야기였다.
때문에 이번에 숭무고에서 열린 징계위원회는 아주 큰 문제가 되었다.
학교 폭력의 경우 단순히 학교 차원에서의 징계가 아니라 형사, 혹은 무림맹까지 얽히는 대형 사건이 되기 때문이다.
무림인 간의 단순 폭력 사건이라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가볍게 넘어간다.
하지만 그것이 일방적인 폭행이자 괴롭힘인 '학교 폭력'이 되면 이렇게나 심각한 사안이 되는 것이다.
당장 이번 징계위원회만 해도 무림맹에서 파견된 교육감찰단의 무인이 참석했고 무림 관련 사건을 담당하는 형사들마저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가해자'들의 보호자들이 필사적으로 언성을 높이는 것이었다.
"부적절한 행동을 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명확한 증언이 없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징계를 받아들일 순 없는 일입니다."
오공태가 서태주를 구타하는 장면이 도진에 의해 녹화되었고 그것을 방관하던 숭무회의 학생들까지도 영상에 녹화되었다.
피해자들 역시 격리되어 조사를 받았기에 여기까지만 보면 분명히 징계를 받을 것만 같다.
…하지만 아니었다.
"역겨운 일이네."
"원래 이런 세상이잖아."
도진의 말에 나지윤이 시니컬하게 대답한다.
그 말대로였다.
징계위원회는 며칠에 걸쳐 진행 중이었고 그 진척은 지지부진하며 긍정적이지도 않았다.
가해자들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것은 진심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보여주기 식이었고 가해자들의 보호자들은 아예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당당하기까지 했다.
아예 오공태의 부모는 도진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너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오히려 힐난하는 눈초리로 말이다.
그러면서 다른 가해자 부모들과 함께 외쳤다.
어느 정도 잘못은 인정한다.
하지만 자체적으로 조사해 본 결과 그것이 처벌에 이를 정도는 아님을 확인했다.
그런 논리를 폈다.
그들이 그렇게 자신하며 외치는 건 스스로가 가진 자라는 걸 알고, 법이 가진 자들에게 유리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피해자들의 입막음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또한 있었다.
격리되어 조사를 받는 피해 학생들은 제대로 입을 열지 않았다.
피해 사실을 터 놓아야 징계하기 위한 근거를 마련할 수 있는데 거기에 대해 입을 꾹 다문 것이다.
-피해자들은 피해가 심해질수록 저항할 의지를 잃게 된다.
어디선가 본 그 문구 그대로였다.
코끼리를 어릴 적부터 말뚝에 묶어 놓고 기르면 성체로 자라서도, 가볍게 힘만 주면 뽑아 버릴 수 있는 말뚝을 뽑지 못하고 그대로 묶여 살게 된다.
그것처럼 피해자들은 피해에 길들여져 벗어날 생각조차 못하게 되는 것이다.
도진 또한 전생에서 그렇게 살아야 했기에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입을 다문 피해자들을 마냥 탓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심지어 토로할 의지가 있다 해도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마저 있다.
어른이, 경찰이, 무림맹이, 현실이.
그들을 지켜줄 수 없었으니까.
한 명 한 명 피해자 개인을 24시간 지켜주지 못하는 걸 넘어 집안마저 망할 수 있는 일이었다.
숭무영재고의 피해자들 중 대부분이 단순한 폭력에 시달리는 게 아니었다.
원청과 하청의 관계, 혹은 어떤 형태로든 사회에서 집안이 가해자들의 집안에 종속되거나 영향 아래 있었기에 더욱 반항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것이, 피해자의 부모들마저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게 만들었다.
"죄송합니다. 사죄의 의미로……."
"비 온 뒤 땅이 굳는 것 아니겠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더욱……."
가해자도, 가해자의 부모도 아니었다.
변호사나 회사의 관계자가 나와 합의를 종용하며 채찍을 든 채 당근을 내밀었고 그들은 쉽사리 그것을 거절할 수 없었다.
역겹게도, 오히려 이것을 호재라 생각하는 부모마저 도진은 징계위원회에 참석한 자리에서 보아야 했다.
그래서 징계위원회에서는 며칠째 명확한 결론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도진이 촬영한 영상이 있었기에 그나마 논의가 계속되는 것이지 그것마저 아니었다면 '혐의 없음'으로 결론날 만큼 상황은 기우는 중이었다.
오공태만이 그날 폭행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명확한 혐의여서 징계가 확실시되었지만 그것도 피해자에게 일정 거리 접근 금지와 얼마간의 정학 정도에 그칠 듯했다.
물론 모든 부모가 그런 식으로 '합의'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 서태주라는 애 부모는 여전히 강렬하게 항의를 하고 있어."
피해자들의 부모 중 유일하게 모든 '당근'을 거부하고 격렬하게 항의하는 부모가 있었다.
오공태에게 당하는 모습이 찍혔던 그 서태주의 부모였다.
"우리 아이가 처참하게 맞았습니다! 겁을 줘서 부모한테 말도 못하고 협박을 받아 오히려 우리한테 언성을 높여야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뭐요? 당신들이 그러고도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어?!"
울분에 차 소리치던 모습을 도진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합당한 분노였고 합당한 외침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그러니까 거기에 대한 증언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아드님이 말을 하지 않으니 저희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징계위원회 중 가해자들과 한통속인 인물의 말이었다.
다른 피해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서태주는 입을 열지 않았다. 다른 부모들과 달리 있는 그대로 말하라는 부모의 설득에도 굳게 다문 입을 열지 않았다.
'별 수 없는 일이지.'
도진은 안타깝지만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별 수 없는 일이었다.
도진이 나서서 풀기엔 너무 많은 것이 얽히고 꼬여 있었다.
선의로 행하는 일이 무조건 완벽한 선의로 결론날 정도로 세상은 깨끗하지 않았다.
도진이 설득하고 종용해 피해를 밝히도록 해서 그 아이들이 처벌받게 되었다고 하자.
하지만 그로 인해 그 아이의 집안이 망하게 된다면, 그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
무엇이 옳은지는 명확하지만 그 옳은 것이 오히려 곡해되는 세상이다.
스스로가 판단하고 결론내리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지윤이 개인적으로 조사한 서류를 훑던 도진은 어느 한 지점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음?'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구가 거기에 있었다.
-중정(中庭).
익숙한 단어다.
뜻은 집 가운데 있는 마당이지만 여기서는 한식집 이름으로 쓰였다.
그러니까, 도진의 어머니 서정원이 일하는 한식집이 바로 서류에 쓰여 있는 것이었다.
자세히 서류를 읽어 본 도진은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서태주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서태주의 부모는 요식업 관련 사업을 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 요식업 관련 사업이라는 게 다름 아닌 한식집 몇 개와 출장 뷔페를 운영하는 사업이었다.
그리고 그 한식집 몇 개 안에 서정원이 일하는 한식집이 포함되어 있었다.
'…세상 참 좁네.'
이런 연결고리가 있을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절로 세상이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것을 특별한 인연으로 생각해 나설 생각이 도진에겐 없었다.
가해자 놈들이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니꼬운 일이지만 어차피 그런 놈들은 개가 똥을 못 끊듯 똑같은 잘못을 반복할 것이고 그러다보면 또 도진과 마주하게 될 테니까.
그때마다 처참하게 두들겨 줄 뿐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 * * *
토요일 밤.
본가로 돌아온 도진은 어머니를 모시러 슈킨팍시를 몰고 중정으로 향했다.
주말마다 반복되는 일이었기에 함께 퇴근하는 아주머니들과도 어느 정도 안면이 생겨 인사를 주고받을 정도가 되었다.
한데 오늘은 거기에 새로운 얼굴이, 그러나 알고 있는 인물이 한 명 늘어나 있었다.
"어머! 도진아."
"네, 안녕하세요."
"……."
시선이 마주한다.
탄탄한 몸을 가지고 있지만 유약한 인상에 얼굴에는 반창고를 붙이고 있는 그는 다름 아닌 서태주였다.
설마 여기서 마주칠 줄은 몰랐기에 서태주는 마주친 눈에 당황이 깃들었지만 곧 표정을 가다듬었다.
"아, 도진이는 처음 보겠구나. 이쪽은 간간이 와서 알바하던 학생이야. 그러고보니 도진이랑 동갑이네? 이쪽도 숭무고에 다닌대."
정확히는 숭무영재고다.
그것을 도진도 알고 찬모들도 알았지만 굳이 '숭무영재고'라고 말하지 않은 건 암묵적인 매너였다.
서태주는 말 대신 약간은 어색하게 눈으로 인사했고 도진 또한 간단한 눈인사로 그것을 받았다.
"어휴, 남자애들이 낯 가리긴."
"요새 애들이 좀 그렇긴 하잖아."
미묘한 분위기였으나 찬모들은 가벼이 넘기며 그렇게 말했고, 서태주와는 그렇게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헤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서정원이 말했다.
"어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애가 요즘 특히 기운이 없어 보이더라."
"그래요?"
"응. 요새는 뜸했지만 중학생 때만 해도 무림학교 가는데 등록금 보태겠다고 열심히 일하던 애였거든."
"등록금요?"
"응. 기특했지."
이야기를 듣다보니 서태주가 '사장님댁 아들'이라는 건 알려지지 않는 듯했다.
지금 숭무고에서 일어난 일들까지도.
가해 학생의 부모들이 힘을 썼을 터.
그리고.
"애가 얼마나 싹싹하고 열심인지 싫어하는 언니들이 없다니까. 나한테도 이모님, 이모님하면서 무거운 거 들 일 있으면 먼저 와서 저한테 맡기세요, 이러고 해서 얼마나 기특하던지."
"…좋은 녀석이네요."
"그렇지? 엄마도 꽤 도움 많이 받았어. 너도 같은 숭무고니까 이참에 한 번 친구해 보는 건 어떻겠니?"
어머니의 말에 도진은 웃으며 핸들을 잡은 손에 조금 힘을 주었다.
"네, 그래 볼게요."
* * * *
월요일.
가해자와 달리 여전히 학교에 다니고 있는 서태주는 요즘 혼자 있는 시간이 없다시피 했다.
"야, 태주야. 가자."
"……응."
수업이 끝나자마자 다가오는 건 숭무영재고에서도 손꼽히는 무공 실력을 자랑하는 녀석들이다.
어깨동무를 하고 함께 다니지만, 이들은 결코 친구가 아니었다.
이 녀석들은 모두 숭무회 소속의 1학년이다.
선배들의 엄명 하에 서태주를 '밀착 감시'하는 것이다.
때문에 기숙사 생활을 하는 서태주는 요즘 들어 더욱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자, 먹어 먹어."
점심시간.
일진들 사이에서 억지로 넘어가지 않는 밥을 삼켜야 했다.
혹여 싫은 티를 낼라치면 언제라도 으슥한 곳에 끌고 가겠다는 눈초리를 받아야 했다.
티나지 않게 은근히, 그러나 명확하게 그들은 서태주를 말려 죽이려는 듯 괴롭혔다.
만약 입을 열면 괴롭힘의 수위를 높이겠다는 무언의 협박을 곁들여서.
그래서 서태주는 애끓는 부모님을 외면하며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었다.
"패스!"
"속공이다!"
오늘의 '놀이'는 가방 던지기였다.
술래는 서태주.
공은 서태주의 가방으로 서태주가 '친구들' 사이를 공처럼 날아다니든 자신의 가방을 캐치해야만 끝나는 룰이다.
서태주는 필사적으로 달려야 했다.
어차피 못잡을 가방. 그러나 열심히 하지 않으면 끌려가 얻어맞을 것이었으니까.
일상이 된, 그러나 미칠 것만 같은 지옥.
그 지옥에.
턱.
서태주의 가방을 잡아채며 이방인이 끼어들었다.
"안녕?"
가방을 든 도진이 웃으며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