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회귀했을 당시 도진이라는 '땅'은 좋지 않은 터였다.
이대로 건물을 올리면 제아무리 좋은 기술과 자재를 사용한다 해도 고층 빌딩은 엄두도 내지 못할 그런 터.
그러하니 위지혁이 원하던, 하늘마저 찌르고 올라갈 정도로 압도적인 마천루는 결코 지을 수가 없었다.
위지혁이라는 희대의 무인이 망치를 잡았으니, 여기에 장호가 거들기까지 하니 적당한 수준의 건물을 올리려 했다면 한계는 명확할지언정 그 한계 내에서 번듯한 건물을 세울 수는 있었을 것이다.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적당한 수준의 건물' 이상이 될 수 없었기에,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위지혁은 터부터 고르기로 한 것이었고 도진은 그런 위지혁의 의도에 조바심을 내지 않고 그 이상 없을 정도로 성실하게 따라 주었다.
깊숙이, 아주 깊숙이 땅을 파고 내려갔다.
누구보다 높이 오르기 위해 우선 아래로 파고 내려갔다.
그리하여 '뿌리'를 다졌다.
심상세계에서는 이미 완성된 마천루의 모습을 예측할 수 있었음에도 도진은 조바심을 내기보다 땅을 단단하게 다지고 뿌리의 기둥을 세우는 데 매진했다.
묵묵히, 단 한시도 최선을 다하지 않은 때가 없었던 도진은 이윽고 터, 주어진 재능의 한계를 극복해냈다.
그렇게 다져진 터가.
드디어 바깥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스으으으으-
천마기가 퍼져 나간다.
급격히 거대해져 완전히 제어할 수 없는 기운.
그러나 제어할 수 있는 일부만으로도 작은 공원을 가득 채우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연신극기공으로 거듭 한계를 넘어서고 있는 육체와 이치가 깃들어 트여가는 정신은 날뛰는 천마기를 제어함과 동시에 일부를 부리며, 무공을 구사하는 영역에 도달해 있었다.
"건방진 새끼가!!"
여전히 감정이 이성보다 앞서는, 그리고 살아온 방식이 그것을 부추기는 하나가 겁없이 덤벼든다.
빠르고 강하다.
숭무고에서 일진이라고 어깨에 힘을 줄 정도는 된다.
그리고 이런 재능과 실력에 집안까지 받쳐주니, 이 양아치는 학교를 졸업하면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 것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짜악!!
"켁!"
뺨을 후려쳤다.
거대한 충격에 균형이 완전히 무너지며 모든 곳이 무방비가 되어 버린다.
짜악!!
한 번 더 뺨을 쳤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굴욕적인 상황에 정신은 어떻게든 자세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외치지만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충격을 받은 육체는 그 정신의 명령을 따를 수 없었다.
짜악! 짜악!
얼핏보면 그저 뺨을 치는 것 같지만 그 한 수 한 수에 천마기의 경력(勁力)이 담겨 있다.
거대한 충격이 뺨에서 그치지 않고 몸 전체로 퍼져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충격에 담긴 흉포한 천마기의 기운은 뺨을 맞고 있는 양아치의 연약한 내부를 찢어발기는 고통을 선사했다.
"끄각! 깍! 깍!"
미쳐 버릴 듯한 고통에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쓰러지지도 못하고 뺨을 맞는 처참한 모습.
"그만해 이 개새끼야!!"
친구의 그 처참한 모습을 보다 못한 다른 양아치가 덤벼들었다.
큰 키와 기다란 팔이 특징인, 검을 사용하는 양아치였다.
'검.'
도진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코웃음이 흘러나왔다.
슥-
무언가가 번쩍였고 다음 순간 도진의 백설은 양아치가 휘두른 검을 깔끔하게 동강낸 뒤였다.
칼집에서 검을 뽑아듦과 동시에 대상을 베어 버리는 발검술(拔劍術)로 양아치의 검을 폭발적인 속도와 기세로 베어 버린 것이었다.
특별한 초식이 아니었다.
그저 '발검술을 하기 위한 이치'가 담겨 있었을 뿐.
그렇게 휘두른 백설의 끝은 시리도록 날카로운 기세를 머금은 채 양아치의 목젖에 닿아 있었다.
"히, 히익!"
한 박자 늦게 그것을 깨달은 양아치가 깜짝 놀라 부들부들 떨며, 주춤거리며 한 걸음 물러났다.
도진이 깨달은 검리(劍理)를 제대로 풀어낼 것도 없이 양아치는 단 한 수에 압도당한 것이었다.
그런 양아치의 면상에 도진이 검을 휘둘렀다.
짜악!
검날이 아닌 검면이 뺨을 후렸다.
짜아악!
이어 고통을 막 느껴지려는 순간 반대쪽 뺨을 또 백설이 후렸다.
짜악! 짜악! 짜악!
"악! 꺽! 깍!"
'의리'로 용감하게 덤볐던 양아치는 앞서의 양아치와 마찬가지 신세가 되었다.
차이점이라면, 검면으로 얻어맞은 뺨에 한 대에 하나씩 베인 상처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털썩!
양 뺨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후려맞은 뒤에야 양아치는 친구 곁에 누울 수 있었다.
"……."
그렇게, 두 번째 양아치가 이십여 대나 맞고 있을 동안 숭무회의 누구 하나 덤벼들지 못했다.
고수(高手).
'학생 리그'에서 으레 하는 말이 아니라 '사회', 진짜 무림에서 말하는 고수의 기세를 숭무회의 양아치들은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었다.
이기고 진다가 아니라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을 느끼게 만드는, 따라잡을 수도 없고 흉내를 낼 엄두도 못 내게 만드는 그런 고수의 면모를 도진은 보여준 것이다.
뒤에 후회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뒷일을 모두 제쳐두고 도망가고 싶다고 그들은 생각해 버렸다.
물론, 도진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자, 친구 쓰레기가 이렇게 비참하게 쳐맞았는데 쫄아 있으면 어떡해요. 니들 같은 쓰레기들은 왈왈, 의리를 짖어대는 거 말곤 내세울 것도 없는데. 덤벼야죠?"
까드득-
이가 갈린다.
저런 소릴 듣고도 가만 있었던 적은 결단코 없었다. 아니, 들을 일조차 없었다.
…숭무고에 들어올 때까지는 말이다.
작년, 폭룡이 미쳐 날뛸 때 같은 취급을 당했었다.
신입생 때의 폭룡은 그래도 여럿이서 덤비면 할 만했고 그래서 시선이 없는 곳에서 여럿이 덮쳐 손봐 준 적이 있었다.
그때의 기억이, 우연처럼 남은 양아치들의 머릿속을 동시에 스쳤다.
"……."
눈빛만으로 의사가 통했다.
넷이 당하고 일곱이 남았다.
그 일곱이 동시에 움직여 도진을 둘러쌌다.
'다구리쳐서 조지는 수밖에.'
쪽팔리는 일이지만 이제 이것 말고는 수가 없다.
다행히 이곳에는 그들의 먹잇감 외에 보는 눈이 없었다.
이곳이 숭무회의 아지트가 되었던 마지막 세 번째 이유.
여기가 바로 CCTV의 사각지대이기 때문이다.
외부는 촘촘하게 CCTV가 설치되어 있지만 이곳만큼은 공교롭게도, 사실은 의도적으로 사각지대가 형성되었고 그래서 숭무회는 여기서 '동아리 활동'을 해왔던 것이다.
어떻게든 함께 덤벼서 도진을 때려눕힌다.
다시는 기어오를 수 없도록 조져 놓으면 된다.
달동네 사는 거지 새끼라고 했다.
팔다리 병신을 만들어 놓아도 충분히 뒷감당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목격자는 그들과 먹잇감들뿐이니 입을 맞추고 먹잇감들은 입단속을 철저히 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다행히 그들은 다수가 소수나 한 명의 고수를 상대하기 위한 방법인 '합격술(合擊術)' 수업을 들었기에 더욱 효율적으로 도진을 상대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은 아주 어설픈 생각이었다.
도진은 이미 나타날 때부터 초소형 카메라를 작동시켜 두었다.
나타난 그 순간부터 녹화를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애초에 녹화를 하든 하지 않든 그들의 합격술에 도진이 당하는 일 자체가 일어날 수도 없었고.
훅!
쏘아지는 주먹을 가볍게 피하고 백설로 뺨을 후려갈겼다.
짜악!
"켁!"
대번에 상체가 휙 돌아가며 하나가 나뒹굴었다.
본래 뒤에서 그 양아치를 백업했어야 할 기다란 봉은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흔들렸고 대번에 도진의 손에 붙잡혔다.
"헉!"
이미 보았던 비슷한 양상으로, 피라미처럼 끌려 온 양아치 역시 백설에 뺨을 후려맞고 나가떨어졌다.
합격술은 시작조차 되지 못했다.
추풍낙엽처럼 양아치들은 나가떨어질 뿐이었다.
'조금은 낫네.'
그런 신위를 보이고 있는 도진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 '조금은 낫다'가 뜻하는 건, 놀랍게도 스스로의 움직임에 대한 평가였다.
사실 도진의 무공 수위는 현대 무림을 기준으로 이미 고수의 영역에 도달해 있었다.
천마심공 4성. 그리고 무흔잠영 4성은 이미 현대 무림에서 고수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여기에 도진이 깨우치고 있는 무공의 이치들까지 더하면 현대 과학으로도 규명되지 않은 신비의 영역인 '검기(劍氣)'마저 구사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허나 그러지 못했던 건 도진의 육체가 아직 제한없이 알고 있는 무리를 행사할 수 있는, 심상세계의 깨달음을 구사할 수 있는 영역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더 큰 건물을 세울 수 있도록 터부터 다져왔기에.
'현대 무림의 고수'에서 그치지 않고 하늘 너머에 도달하기 위해.
그래서 지금껏 도진은 마치 꿈속에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육체로 달리는 것만 같은 감각 속에서 무공을 행사해 왔다.
빨리 달리고 싶은데 느릿하기만 한 육체.
만약 도진이 도기로서의 자질을 갖고 있지 못했다면 답답함에 울화가 쌓였을지도 몰랐다.
그랬던 육체가, 드디어 미미하나마 심상세계의 경지를 구현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여전히 느리지만 그래도 뜻에 따라 조금은 가속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숭무고 2학년 수위권의 양아치들을 압도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터를 다지지 않고 무공을 배웠을 거라 가정했을 때보다 빠른 성장이었다.
분명히 크게 돌아가는, 대기만성의 수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진은 매 순간 한계를 넘어섬으로써 경이로운 결과를 이룩한 것이다.
지금 육체를 아득히 넘어서는 이치는 눈을 뜨기 시작한 신안(神眼)에 담겨 어설픈 양아치들의 무공을 완벽하게 꿰뚫는다.
그리고 그렇게 '꿰뚫은 선'은 무흔잠영의 이치에 따라 완벽한 선으로 이어진다.
남은 건 육체를 움직이는 것 뿐.
여전히 느려서 답답하지만, 양아치들을 상대하는 데엔 오히려 여유가 있을 정도였다.
짜악!
일곱 명은 하나 같이 백설의 검면에 뺨을 맞고 그 흔적인 베인 상처로 양 뺨이 너덜너덜해진 몰골로 바닥에 널부러졌다.
그 널부러진 양아치들의 중심에 선 도진이 웃으며 말했다.
"학교 폭력을 행사한 당신들을 현행범으로 징계위원회에 회부하겠습니다."
* * * *
무림학교에서 '학교 폭력'이란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사회와는 다른 무림만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의 차이 때문이었다.
폭력은 무조건 나쁘다는 사회의 인식이 무림에서는 통용되지 않기에.
강하게 말하면 약육강식의 법칙이 적용되는 세계이기에 폭력 그 자체는 문제시되지 않는다.
다만 그렇다 해서 무림이 짐승의 세계인 건 아니었다.
오히려 큰 힘을 행사하기에 협(俠)이나 도(道)가 중요한 가치로 여겨진다.
때문에 일방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고 다른 학생을 괴롭히는 학교 폭력에 대해서는 징계위원회가 열린다.
"난리가 났네."
그리고 그 징계위원회로 인해 숭무고에는 도진의 말대로 난리가 났다.
숭무회랍시고 어깨에 힘을 준 채 다니던 양아치들의 집안 대부분이 범상치 않았으니까.
오성이니 태양권가니 소위 말하는 '탑 티어'까진 아니어도 그 아랫 등급은 될 정도로 집안이 좋았기에 징계위원회가 열림과 동시에 법무팀이 뜰 정도로 떠들썩해졌다.
"쓰레기 밑에 쓰레기가 나는 법이잖아."
도진의 말에 시니컬하게 대답한 나지윤의 말대로였다.
명백한 가해자인 학생들을 그 부모들은 싸고돌았다.
"그 현장에 있었고 부적절한 행동을 한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렇다 할 피해자의 증언이 없는 상황에서 징계를 받는 건 부당하지 않습니까?"
도진의 영상으로 인해 빼도박도 못하게 된 오공태를 제외한 학생들의 부모는 변호사까지 동원해 징계를 막으려 했고 그것은 역겹지만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피해자인 학생들이 제대로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건의 진행이 지지부진하던 때에, 도진은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