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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135화 (135/741)

135화

장호에게 배운 '표정을 읽는 법'을 통해 도진은 상미의 표정에서 '슬프지만 괜찮다'는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저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많이 슬프지만 이겨내고 극복할 수 있다는 의지가 상미의 눈동자를 통해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보호소로 간 상미를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던, 관심조차 없던 아버지.

이윽고 더 이상 아버지가 아니게 된다고 했음에도 오히려 그렇게 해주면 고맙겠다고 말하던 아버지.

그리하여 이제는 친권 상실 선고가 된, 아버지의 권리를 잃은 사람.

"제가 성인이 되면, 몇 년 뒤면 정말로 완전한 남이 될 사람이었어요."

윤상도는 4년간 상미에 대한 친권 상실이 선고되었다.

상미에 대한 친권을 4년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왜 4년인가 하면, 상미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이 친권 상실 선고를 바탕으로 하여 '친권 박탈'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개정된 법은 합당한 사유가 있을 때 혈연을 법적으로 끊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상미는 이 법을 통하여 성인이 되었을 때 친권 상실 선고를 근거로 하여 윤상도와 남남이 되기로 이미 결심을 했었다.

눈을 맞춘 채 상미는 말했다.

"전에도 말했잖아요, 오빠. 저는 정말로 괜찮다구요."

평범한 가정이었다면.

화목하진 못해도 최소한 평범한 가정이기라도 했다면 상미는 차마 스스로 신고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미의 가정은 그 최소한의 기준에도 한참 못 미치는 어두운 바닥에 있었다.

아버지는 사업을 한다며 기억하고 있는 가장 먼 과거 때부터 집에 들어오는 날이 드물었다.

그래서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어쩌다 마주칠 때면 낯선 감정이 더 강했다.

엄마도 상미를 어느날부터 방치하기 시작했다.

가정부가 있어 밥을 굶지 않고 집안의 청결이 유지되었지만 그 깨끗한 집은 '우리집'이라 하기엔 너무나 낯설고 차가웠다.

-이제와서 나는 늙었으니 보고 싶지 않다 이거지.

-개같은 새끼. 그렇게 내가 뒷바라지를 해 줬는데.

-심심하면 폰이라도 만지고 있어.

그리고 어느날부터 엄마도 집에 있는 시간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악몽처럼 집에 빨간 딱지가 붙었고 엄마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으며,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진 아버지는 악마가 되었다.

…그러니까 괜찮았다.

"정말로 행복했었다면, 아버지랑 엄마가 나를 사랑해줬었다면 슬퍼서 버티지 못했겠지만, 아니었으니까요. 생각보다 정말로 슬프진 않아요."

사실 도진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도진은 지극히 불행했을지언정 가족들 사이의 정만큼은 끈끈했으니까.

천륜(天倫).

끊을 수 없다고 하는, 하늘의 인연으로 정해져 있는 관계.

소중한 가족이 있기에 그 말을 어느 정도는 인정하는 도진이었다.

하지만, 하늘은 절대적이지 않다.

하늘이 절대적이었다면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들이 만연하는 세계다.

그러니까 먼 과거에 이미 민중이 민중의 힘으로, 민중의 법으로 심판하려는 의지가 모여 천마신교가 만들어진 것이었고.

도진은 그 천마신교의 사상에 깊이 동의했다.

-이렇게 보면 참으로 교와 인연이 닿은 아이로구나.

가엾고 딱한 감정을 담아 위지혁은 말했다.

그야말로 천륜마저 끊어야 할 만큼의 불행을 이겨내야 하는 아이였다.

이런 아이가 천마의 후계자가 된 도진과 인연이 닿은 건 어찌보면 필연일지도 모른다.

한 가지 위로라면 그 불행을 이겨내기 위한, 부모를 대신할 정신적 지주가 상미에게는 있었다는 것이다.

불행의 밑바닥에서 그녀를 건져 주었던 사람.

거기서 그치지 않고 밝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손을 잡아주고 이끌어 준 사람.

구세주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오히려 차고 넘치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상미는 그 구세주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이걸로 후련해진 거예요. 이제 한 점 미련없이 수련에만 집중할 수 있어요."

희대의 천재인 상미가 온 힘과 마음을 다하여 수련하는 이유.

보필해야 할 '교주님'이 다 마신 커피컵을 품에 꼭 안고서 상미는 불행했던 과거를 완전히 끊고서 앞으로 나아가기로 다짐하는 것이었다.

* * * *

방화마 사건 이후로 별다른 사건 없이 시간은 흘러 어느새 1학기 기말고사를 앞두게 되었다.

비록 이렇다 할 악명을 날린 인물은 아니었지만 흑도의 중견 마두를 잡아낸 도진은 후기지수로서 더욱 확고한 명성을 날리게 됐다.

인원이 반토막 나 이제는 에스포라 할 수도 없게 된 곽필섭과 무진혁은 더욱 명성을 날리게 된 도진의 앞에서 여전히 침묵했고 에스포 사단 또한 마찬가지였다.

집행부이기도 한 도진의 앞에서 만큼은 문제를 일으키려 하지 않았으니 선도 활동을 함에 있어 어려울 게 없었다는 말이다.

본래 집행부의 선도 활동은 단순한 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연습용이 아닌 진짜 무기를 가지게 된, 혈기왕성하고 아직은 미성숙한 고등학생들 사이의 '문제'를 중재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필연적으로 실력행사를 동반해야만 했고 그것이 누구나 인정할 만큼의 실력을 증명한 후기지수가 집행부에 포함되는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후기지수가 선도 활동을 한다 해도 소위 말하는 '일진' 문제는 숭무고에서도 근절되지 않았는데, 아예 집행부 소속이 일진 소굴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강력한 무력에 강력한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으레 집행부에 소속되었고 그리 함으로써 그들은 숭무고 내에서 스쿨 카스트의 정점에 오를 수 있었으니까.

한데 그것이 놀랍게도 근래 2년동안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번 년도는 두말할 것도 없이 도진 때문이다.

일진 무리의 중심이 되어야 할 에스포 사단을 도진이 박살내 버린 것이다.

문제가 생겨 개입했을 때 전문 용어(?)로 '빠꾸없이' 에스포에 사과를 요구했고 실력 행사로 그들을 제압했으며 권민국마저 압도적인 무위를 보여주며 무릎 꿇렸다.

그런 도진이 '선도 활동'을 하고 있으니 설 자리를 잃은 일진 무리가 활개를 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 도진이 입학하기 전, 작년에 일진이 자취를 감춘 건 다름 아닌 폭룡 류대현과 검봉 유지은 때문이었다.

몸이 약하고 성격까지 소심해 왕따를 당했던 경험이 있는 폭룡은 일진을 혐오하고 또 증오했기에 자비가 없었다.

대번에 일진 행세를 하던 동급생들을 '트럭'이 되어 들이받아 버렸으며 심지어 선배인 2학년들이라 해도 예외가 없었다.

만약 류대현 혼자였다면 중과부적이었을 것이다.

본래 이런 쓰레기들은 무리를 이루는 법이니까.

하지만 여기에 유지은이 가세했다.

유지은은 경악스럽게도 숭무고의 실세인 2학년마저 압도적인 실력으로 찍어 눌렀다.

1학년 중에서도 군계일학이던 유지은의 무위는 입학 초부터 이미 2학년마저 넘어서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후기지수로 이름을 날리는 두 사람에 심지어 금봉 한유아마저 합세했다.

배경으로는 부족함이 있던 두 사람에게 대한민국 최고의 배경을 가진 후기지수가 가세하면서 집행부마저 그들의 손에 넘어가니 숭무고 전통의 일진 클럽의 맥이 끊겨 버리게 됐다.

사실 에스포 사단이 한 번에 일패도지(一敗塗地)하게 된 것도 그렇게 맥이 끊겨 '선배들'의 도움을 받지 못한 게 컸다.

그런 사정에 의해 선도 활동에 있어서는 순탄했던 도진은 그러나 행정 쪽으로는 꽤 고전하고 있었다.

'전자 제품 쪽 수리 신청이 여덟 건, 처리 완료된 게 여섯 건. 지출 내역까지 파악해서 정리해야 하고……. 조경 쪽도 이번 달까지 처리해야 되는 구나.'

6월 중순. 분기마다 있는 서류 정산에 대비하여 집행부 인원 전체가 행정 업무를 맡게 되었다.

도진이 맡은 건 기숙사 전반에 관한 부분이었는데 이것만으로도 해야 할 일이 어마어마했다.

이 세상에서 무엇 하나 저절로 되는 것은 없다.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마치 신경 세포의 집합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상호 작용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라는 걸 도진은 안다.

그 아는 것을 이번에 서류 작업을 하며 확실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커다란 규모의 기숙사를 운영하는 건 전담 부서가 필요할 만큼 많은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일이었다.

물론 집행부의 학생들이 그것을 일일이 하는 건 아니었다.

작게는 기숙사 물건들의 유지 보수부터 시작해 벚꽃길의 관리까지 세세하게 실무를 담당하는 직원들이 있다.

집행부가 해야 할 일은 그런 일들에 대한 관리감독과 업무 보고서의 검토였다.

일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 그 과정에서 부정부패 있진 않았는지에 대해 검토하고 취합하여 숭무고 운영위원회에 올리는 것.

그것이 집행부의 행정 업무였다.

쉽게 말해 '감찰사' 같은 느낌이다.

"왜 아직도 두 건의 수리에 관한 영수증이 올라오지 않았죠?"

"그게…… 아직 영수증 발급이 안 됐다고 합니다."

동시에 들어간 수리 신청 중 해결 처리가 되지 않은 두 건에 대해 물으러 가니 담당 직원이 눈치를 보며 그런 대답을 내놓았다.

적당히 처리한다면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기한 내로 영수증을 달라는 선에서 끝냈겠지만 도진은 그렇게 간단히 넘기지 않았다.

"일괄 처리가 원칙인 업무가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건 프로세스대로 처리가 되지 않았다는 소리죠."

숭무고 기숙사 내의 전자 제품은 모두 '스페어'가 몇 대나 준비되어 있다.

그러니까 무언가가 고장나면 수리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아니라 동일 제품으로 즉시 교체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둔 것이다.

그리고 고장난 제품은 모아두었다가 한 번에 수리를 보내고 다시 한 번에 받도록 정해져 있다.

그러니까 이게 동시에 처리가 되지 않았다는 건 규정대로 처리가 되지 않았다는 소리다.

여기에 도진은 장호에게 배운 표정을 읽는 법으로 직원이 무언가 켕기는 게 있음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대번에 알아보았기에 확신을 가지고 추궁했고 직원은 결국 시커멓게 죽은 얼굴로 실토했다.

"하청을…… 줬습니다."

"하청."

숭무고의 전자 제품은 원칙적으로 납품사가 수리하여 보내야만 하며 하청을 주는 건 금지되어 있다.

당연한 일이다.

하청을 준다는 건 숭무고에서 지급하는 대금의 일부를 원청이 취하고 난 뒤 남은 돈을 하청업체에 지급한다는 것이니 서비스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예전엔 공공연하게 이런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집행부의 행정 업무를 맡은 학생들이 리베이트를 챙기고 그런 하청을 눈감아 주는 일들이 말이다.

그리고 서류는 뒷탈이 나지 않도록 작성해 올린다.

하지만 한유아가 전권을 쥐게 된 뒤론 그런 일이 근절되었다고 들었는데 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

더욱 기가 차는 건, 이번 일은 그렇게 집행부의 학생이 뒤를 봐주는 형태도 아니고 아예 집행부 자체를 속이려 시도한 것이었다.

"와……. 간이 크시네요?"

"하, 한 번만 봐주십시오!"

직원이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대번에 무릎을 꿇었다.

도진은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저한테 무릎 꿇으실 필요 없어요. 그래봐야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거든요."

그야말로 칼조차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단호한 말에 직원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도진은 그런 직원을 두고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직원분이 독단적으로 벌인 일일 리가 없을 테고……."

움찔!

도진의 말에 직원이 미미하게 몸을 떨었다.

슬금슬금 눈을 피하는 직원을 기세로 붙잡으며 도진이 물었다.

"자, 말씀해 보세요. 누가 시킨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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