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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132화 (132/741)
  • 132화

    서벅.

    밀도 높은 침묵 속이라 유독 두드러지는 풀 밟는 소리와 함께 도진이 몇 걸음 거리를 좁혔다.

    "참 만나기 힘드네, 아저씨?"

    농담기 섞인 말과 함께 도진은 웃으며 스르릉, 백설을 뽑아 들었다.

    "…김도진."

    복면을 쓴 남자는 도진을 바로 알아보았다.

    무림인인 만큼 현재 새로운 후기지수들 중 가장 유명한 도진을 바로 알아본 것이다.

    그러나 남자의 복면 사이로 드러난, 크게 뜬 두 눈에 놀람이 담긴 것은 눈앞에 있는 것이 '잠룡 김도진'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김도진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모습을 드러낸 것이 그를 놀라게 만들었다.

    꼬리를 밟혔을 리가 없다.

    그러지 않을 자신이 있었고 실제로 이틀에 걸쳐 세 번의 불을 질렀음에도 그의 정체는커녕 수법조차 드러나지 않았다.

    한데 지금, 그가 다음 목표로 삼은 장소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고등학생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무림맹이나 민간의 전문 추적자도 아니고 후기지수라고 해봐야 아직 실습조차 나올 수 없는, 이제 갓 고등학생이 된 핏덩이에게 목표를 읽혔다는 게 납득이 가질 않았다.

    "어떻게 알고 나를 기다린 거지?"

    유창한 한국어. 그러나 외국인이라는 티가 남은 어투로 그가 물었다.

    마주한 눈빛에서 그를 범인으로 확정했음을 읽었기에 발뺌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어떻게 그의 다음 목표를 읽어냈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도진은 더 거리를 좁히지 않은 채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노가다로 푼 수학 주관식 같은 거지."

    "……무슨 소리지?"

    이해할 수 없는 대답에 그가 다시 물었으나 도진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말해줘봐야 믿지도 않을 테고 굳이 말해줄 필요도 없었다.

    눈앞의 마두는 정말로 스스로를 잘 숨긴 채 범죄를 저질렀다.

    그 얼굴도 이름도, 수법조차 드러나지 않았으니 대놓고 활보한다 해도 잡히지 않을 만큼 '완벽 범죄'였다.

    안타깝게도 추리나 수사 쪽과는 인연이 없었던 도진은 그런 완전 범죄를 저지른 범인을 추적할 수가 없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그래서 방법을 바꿨다.

    '안 되는 건 버리고 되는 걸 해야지.'

    추리나 수사로 범인을 좁힐 수 없다면 가진 것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했다.

    도진이 가진 건 현생의 미래가 되는 전생의 기억이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서 범인이 다음 목표로 삼았던 건 현생에서 상미가 머물고 있는 보호소였다.

    정확한 시기나 날짜는 특정할 수 없지만 며칠 내로 도진은 범인이 보호소를 노릴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주말 내내 상미의 보호소 근처에서 잠복하며 범인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그런 거라면 내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게 몇 가지 있지.

    여기서 장호의 조언에 따라 몇 가지 수련을 병행할 수 있었다.

    단순히 자신을 감추는 게 아니라 주변에 동화되는 방법, 목표한 순간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방법 등을 말이다.

    여기에 어떤 자세로도 할 수 있는 천마심공의 수련까지 함께 했다.

    숨어 있는 상황이라 겉으로 내공이 드러나선 안 되니 그것까지 포함하여 천마기를 운용하고 제어하는 수련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내공을 운용함으로써 날카로워진 감각을 넓게 펼쳐 유지하며 수집되는 정보들을 선별하여 받아들이는 수련까지.

    그런 수련들로 채워졌던 토요일을 통째로 잠복한 끝에 도진은 하루가 지나 일요일이 되어서 범인의 뒤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추리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범인은 문제를 풀기 위한 공식조차 모르는 수학 시험 주관식 문제 같아 막막하기만 했다.

    시험 시간의 끝은 정해져 있는데 풀 수가 없는 문제.

    허나 다행스럽게도 그 문제는 소위 말하는 '노가다'로 답을 알 수 있는 문제였다.

    공식이 아니라 하나하나, 일일이 세어 나감으로써 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

    도진이 범인을 찾기 위해 쓴 방법이 바로 이것이었다.

    찾을 수 없다면 올 것으로 예상되는 곳에서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

    이 방법은 단순무식하지만 늦지 않게 도진이 범인과 마주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범인, 마두는 그런 사정을 몰랐으나 곧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그래, 굳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

    감각을 펼쳐 본 결과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건 그와 애송이 단 둘뿐이었다.

    이른 나이에 명성을 얻어 자만심에 차 있는 건지 소리를 쳐서 사람을 불러올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후기지수라고 해 봐야 학생에 불과하다.

    이 현대 무림에서 강자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재능이지만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이라는 격언이 있다.

    '고수'가 되기 위해선 특출난 그 재능을 갈고닦을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루하루가 다른, 타고난 천재들의 경쟁이기에 무공을 익힌 시간은 크나큰 격차가 되어 우위를 가른다.

    학생이 아무리 대단해봐야 학생이라고 '사회인'들이 말하는 이유였다.

    비록 마두는, 그는 재능이 상대적으로 부족하여 10년 전 맞닥뜨린 벽을 넘지 못하고 정체되었지만 투자한 시간만큼 정직하게 증가하는 내공은 그가 무공을 수련해 온 세월만큼 쌓여 있었다.

    어릴 적에 입문하여 40년이 넘게 쌓아 온 내공이 말이다.

    '그래, 잘 된 일이야.'

    그의 눈이 비릿하게 반달을 그렸다.

    너희 따위는 결코 나를 잡을 수 없다고 과시하기 위해 청소년 보호소를 이번 목표로 삼은 것이었다.

    여기에 지금 새로운 후기지수 중 가장 유명한 잠룡을 제물에 더하면 더욱 큰 임팩트를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순찰 루트를 관찰하여 가장 감시가 느슨하고 순찰자들이 먼 때를 맞춰 잠입했다.

    단숨에 애송이를 제압한 뒤 준비해 두었던 것을 활용해 불을 지르면 이번에도 정체를 들키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

    '너는 특별히 토막내서 뼛조각을 남길 수 있도록 해주마!'

    그리고 제압당한 애송이는 스스로의 자만을 후회하며 토막난 채 죽어 화재 현장에서 발견된다.

    파악!

    결론을 내린 마두가 망설이지 않고 몸을 날렸다.

    그렇게 몸을 날린 마두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는데, 그 눈을 마주한 도진이 입꼬리를 미미하게 올렸다.

    '역시.'

    무인의 눈이 부자연스럽게 충혈되어 있는 것은 마기(魔氣)가 골수까지 스며들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표식이었다.

    마기란 쉽게 말해 사람을 미치광이로 만드는 변질된 내공이다.

    애초부터 그런 내공을 쌓도록 만드는 '마공(魔功)'을 익히거나 무림인의 정신이 오염되어 내공이 거기에 영향을 받아 변질되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눈앞의 마두는 후자였다.

    본래부터 소위 말하는 사이코패스였을 것이다.

    그런 사이코패스가 몇 번의 방화를 성공시킴으로써 완전히 맛이 가 버렸고 내공이 거기에 영향을 받아 마기로 변질, 그 마기가 골수에 스며듦으로써 더욱 증상이 심각해졌을 거라고 도진은 판단했다.

    그러니까 도망가지 않은 것이다.

    정상적인 판단이 가능한 정신 상태였다면 도진과 마주한 순간 도주했어야 옳다.

    자신이 우위라고 생각한다면 더더욱 말이다.

    하다못해 도진이 크게 소리치기만 해도 사람들이 몰려올 테고 경계가 조금은 느슨하다 해도 순찰 요원들이 돌아다니는 상황에서 그가 위험해질 게 자명한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마두는 그런 가능성을 제쳐두고 도진에게 몸을 날리는 걸 택했다.

    '눈앞의 인간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싶다'는 본능이 이성적인 척하는 정신을 부추긴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일반적으로는 도진이 도주해야 옳았다.

    제아무리 후기지수라 해도 고등학생이다.

    수십 년을 무림에서 보내며 무공을 수련해 온 무림인을 상대하는 건 지극히 위험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도진은 그렇게 진실로 마두가 되어 버린 남자의 주먹을, 수투를 낀 주먹을 백설로 맞받아쳤다.

    콰앙!

    수투를 낀 주먹이 튕겨 나갔다.

    '……!!'

    마두의 충혈된 눈이 또 한 번 경악으로 크게 떠졌다.

    그 경악으로 인해 드러난 빈틈을, 도진은 망설임없이 백설로 그어 버렸다.

    촤아악!!

    허공에 피가 튀었다.

    마두의 옆구리가 베인 것이었다.

    찰나의 순간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기에 다행히 피륙의 상처로 그쳤다.

    허나 마두의 충격은 치명상에 버금갈 정도로 컸다.

    '내가, 완전히 밀렸다고……?'

    분명히 선공을, 그것도 기습을 가했다.

    하지만 눈앞의 애송이가, 그래 애송이가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흐름을 끊어 버렸다.

    주먹을 채 다 뻗기도 전에 빈틈을 파고 들어 맥을 끊어 버렸단 말이다.

    미리 공격을 하겠다며 타이밍과 공격할 위치까지 알려주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수준이었기에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힘에서, 내공에서마저 그가 밀렸다는 것이다.

    기습이라 해도 허투루 내공을 담지 않았다.

    힘껏 주먹을 뻗었고 충분할 만큼의 내공을 담았는데 애송이의 검에 압도당했다.

    "이럴 리가 없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마두가 짐승처럼 소리치며 다시 덤벼들었다.

    도진은 그런 짐승의, 쏟아지는 주먹을 마치 소림의 무승처럼 고요한 기세로 받아냈다.

    카카카카캉!!

    고요한 밤을 날카로운 쇳소리가 연신 두들겼다.

    그 커다란 소리에 보호소에 불이 켜지고 인기척이 모여들었지만 마두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정신이 온전히, 거짓말처럼 공격을 받아내고 있는 도진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말도, 말도 안 된다……!!'

    직선이 아닌 거짓말처럼 휘어서 짓쳐드는 주먹을 도진은 '알고 있었던 것처럼' 반박자 앞서서 백설을 휘둘러 막아냈다.

    타점에 이르기 전에 끊긴 주먹은 제대로 된 위력조차 발휘하지 못하고 빗겨 나가 버린다.

    이어서 변칙적으로 허벅지를 노리는 무릎 또한 속도가 붙기도 전에 정강이를 차는 발에 막혀 버렸다.

    이를 악물고 반대편 주먹을 날렸으나 정강이를 찬 발을 물리며 상체를 비트는 것으로 역시 알고 있었던 것처럼 반박자 빠르게 피해 버렸다.

    마두는, 40년을 수련한 무공이 부정당하는 것만 같았다.

    알고 있었던 것처럼, 반박자 빠르게 피한다는 건 그의 무공이 온전히 읽히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무공이 읽힌다는 건 눈앞의 애송이의 경지가 자신보다 훨씬 높다는 뜻이었으니까.

    그의 40년이, 애송이의 길게 쳐줘봐야 10년조차 되지 않을 시간보다 못하다는 뜻이었으니까.

    "이럴 리가 없단 말이다!!!"

    미쳐 날뛰는 짐승처럼 포효하며, 방어를 버리고 덤벼들지만 그 또한 도진에게는 닿지 못했다.

    깊이 침잠한 도진의 눈동자는 마두의 발악마저 모조리 읽어내고 있었으니까.

    그런 도진의 모습을, 위지혁은 흡족하게 미소지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제법 신안(神眼)의 흉내를 내고 있구나."

    "빠르군요."

    신안. 그것은 천마가 가지고 있다는 '신의 눈'을 뜻하는 말이었다.

    원리를 알면 암기하거나 일일이 공부할 것 없이 그 자체를 통달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무공 또한 포함되었다.

    신안은 바로 그 무공의 이치를 깨닫게 되면 가질 수 있는, 무리(武理)를 꿰뚫는 눈이었다.

    여러 변주를 넣는다 해도 원리만 알면 진체를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처럼 신안을 뜨게 되면 환(幻)이나 변(變)에 매혹되지 않고 초식 그 자체를 꿰뚫어 볼 수 있게 된다.

    말은 쉽지만 당연히 아득히 어려운 일.

    그렇기에 본래 입신의 경지에 이르러야만 가질 수 있는 신안.

    도진은 바로 그 신안으로 마두의 무공을 꿰뚫어 보고 대처하고 있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

    그러나 도진은 '일반적이지 않은' 케이스였다.

    하늘에 오르기 위해 수련하고 있는 도진은 심상세계에서 오롯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무도(武道)의 수련을 하고 있었다.

    위지혁의 천마검공에는 아직 입문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천마검공의 검리(劍理)만큼은 수만 번 반복하는 휘두름을 통하여 체득해 나가고 있었다.

    도진의 수련은 여전히 기초를 다지고 있었으나 그 안에는 무엇 하나 빠짐없이 이치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도진의 육체는 아직 땅에 있으나 하늘 너머를 보는 눈동자는 거기에 깃든 이치를 담게 된 것이다.

    "크게 돌아가는 길이라 해도 무엇 하나 장점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위지혁은 흡족한 미소를 유지하며 그렇게 말했다.

    사실 제대로 된 신안이라 할 정도는 아니었다.

    억지로 그 끝자락을 엿보게 된 정도라고 해야 할까.

    허나 입신의 경지에 이르러야만 뜰 수 있게 되는 신안을 현실 시간으로 따지면 채 반년조차 되지 않아 엿볼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그가 아는 늙다리들이 들으면 뒤집어질 일이었다.

    그런 대단한 것을 마주하고 있으니 눈앞의 하찮은 마졸(魔卒)이 이해하지 못하고 발작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크아아아아!!"

    이제는 완전히 짐승의 목소리로 소리치며 덤벼드는 마두.

    벽에 막혀 나아가지 못하고 절망했던 그는 그의 반도 안 되는 나이의 도진이 더 앞에 있다는 것에 질투로 미쳐 버릴 듯했다.

    그런 마두의 기세를 받아내는 도진의 관자놀이를 타고 땀이 주륵, 흘러내렸다.

    마두의 40년을 받아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분명히 도진이 압도하고 있긴 했으나 그 압도를 유지하기 위한 심력과 내공의 소모가 엄청났던 것이다.

    하물며 4성에 이른 천마기는 도진이 소모되면 소모될수록 더욱 거세게 날뛰려 들었기에 더더욱.

    천마기는 신안과 함께 도진이 마두를 압도할 수 있는 두 가지 이유 중 하나였다.

    마두의 변질된 내공, 마기(魔氣)는 감히 마의 하늘이 구사하는 기운인 천마기에 범접할 수 없는 저급한 기운이었다.

    그 덩치가 급격히 불어났다고는 하지만 마두가 40년간 쌓아온 내공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는 도진이 힘에서도 밀리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내공의 상성에서 천마기가 마기를 압도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큰 도움이 된 천마기가 이제는 도진을 공격하려 들고 있었다.

    도진의 소모가 천마기의 소모보다 커졌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도진의 우위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마두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아챘다.

    "죽어라!!"

    본래의 목적마저 잊고 도진을 죽이기 위해 방어조차 도외시하고 거세지는 공격.

    한 번 무너진 균형은 오래 가지 않아 급격하게 기울어 버릴 것이었다.

    하지만 그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도진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간단한 이유였다.

    채채챙!!

    "……!!"

    사위를 환하게 밝히는 조명과 함께 날아드는 몇 개나 되는 검.

    마두를 잡기 위해 순찰을 돌고 있던 무인들이 도착한 것이었다.

    도진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체크메이트야, 방화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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