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129화 (129/741)

129화

크게 번졌던 불은 자정이 지나 날이 바뀌고서야 완전히 꺼졌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흩어지고 도진의 동생들 또한 집으로 돌아가 잠에 들었다.

퇴근하고 늦은 시간에 돌아온 서정원 또한 꽤 놀랐으나 장남, 도진의 모습에 안심하고 귀가했다.

그렇게 불과 함께 소란이 잦아든 시각.

그러나 여전히 떠나지 않은 도진이 지켜보고 있는 화재 현장에는 침묵 이상으로 무거운 절망이 내려앉아 있었다.

다섯 채 이상의 집이 전소되었고 일곱 채가 절반 이상 불에 잡아먹혔다.

윗동네와 아랫동네에 걸쳐 난 대화재.

그 화재에 집을 잃은 피해자들이 잿더미를 마주한 채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는데, 피해자들 사이에는 도진과 접점이 있는 주민이 둘 있었다.

하나는 다름 아닌 강치환의 가족들이다.

전생에 도진을 그리도 괴롭혔던, 그러나 이번 생에선 도진에 의해 죗값을 치르기 위해 무림맹으로 끌려간 그 강치환의 가족들.

몸과 마음이 풍파에 깎여 나간 기색이 역력한 강치환의 어머니 문서원과 그 옆에서 우두커니 선 강치환의 동생 강예지.

그리고 다른 한 명이.

'…상미네 아버지.'

바로 상미네 아버지였다.

이름도 모르는 그는 이런 상황임에도 술에 잔뜩 취해 킬킬킬 웃고 있어 상당히 기괴하게 보였다.

그 두 집이 포함된 피해자들은 경찰의 인도에 따라 임시로 마련된 거처로 이동되었다.

이어서 화재조사관과 경찰들이 잿더미가 된 현장의 조사를 진행했다.

뒷정리와 함께 조사가 진행되는 그 광경을 도진은 조용히 지켜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앞으로 두 번은 더 화재가 발생하고서야 이 일이 무림인의 짓이라는 게 드러났지.'

이번 조사에서는 특별한 어떤 것이 발견되지 못했다.

낙후된 달동네여서 CCTV도 몇 개 없었고 이렇다 할 단서도 발견되지 않아 화재 원인조차 규명하지 못한 채 유야무야 넘어갈 일이 되었다.

뉴스와 신문에도 보도가 되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보도를 위한 사건'이었지 '사건이 보도된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관심 또한 마찬가지였다.

'많이 본 뉴스'의 랭킹에는 들었지만 어디까지나 보기만 했을 뿐 이슈가 되지 못하고 관심을 끌지 못했다.

도진 또한 그러했기에 화재가 발생하고서야 이 사건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렇게 단 하루만에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그 사건이, 며칠 간격으로 연이어 화재가 발생하면서 이것이 단순 화재가 아닌 방화범의 소행임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방화범이 무림인이라는 것까지.

모든 것이 그러하듯 인류에 대격변을 가져온 무공 또한 악용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렇게 무공을 악용하는 범죄자들을 일부는 '빌런(Villain)'이라 불렀고 일부는 무협지에서 인용하여 '마두(魔頭)'라 불렀다.

이들 마두는 무공을 익힌 범죄자였기에 대응은 물론이요 처벌 수위 또한 가혹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을 초월하는 힘을 지닌 자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었기에 그 위험성과 잔혹성, 규모 또한 일반적인 범죄자들을 초월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마두가 연쇄방화마라는 게 밝혀지면서 비로소 사건은 전국적으로 관심을 받을 만큼 커졌다.

그리고 이 시기에 터졌던 게 청소년 보호소 방화였다.

'…신고해야 할까?'

이 근처에 있는 보호소는 상미가 있는 보호소가 유일하다.

그렇기에 도진은 오래된 일이었고 관심도 두지 않아 그 보호소의 이름도 몰랐으나 헷갈릴 것 없이 그곳이 상미가 있는 보호소라고 특정할 수 있었다.

도진은 범인인 마두가 지상에 전혀 흔적을 남기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럴 수 있었던 이유가 전봇대를 이용하여 이동했기 때문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이것을 조사 중인 경찰들에게 알려준다면 단번에 무림맹의 조사단이 파견될 정도로 사건이 엄중하게 다뤄질 것이었다.

하지만 고민을 계속하던 도진은 이내 멈칫하게 되었는데, 여러가지 가능성이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마두가 잡혔던 건 연속된 방화 성공으로 마기(魔氣)가 골수에까지 스며들어 반쯤 미치광이가 되어 대담하게 움직였던 게 결정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초기에 녀석은 나름 치밀하고 조심스럽게 방화를 저질렀다.

이런 때에 도진의 신고로 경계가 올라가고 무림맹의 무인들까지 파견되면 녀석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랐다.

도진이 알고 있는 미래가 바뀔 수도 있다는 말이다.

대부분의 사건들은 전생의 기억과 다르지 않게 흘러갔지만 도진이 개입한 사건들은 크게 달라졌다.

이것은 그야말로 나비효과가 되어 연쇄적으로 변화를 가져올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도진이 개입하여 신고를 하면 사건이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좋은 쪽으로 바뀔 수도 있지만 반대로 더 나빠질 수도 있다.

'제일 좋은 건 범인을 특정하고 확정적으로 잡을 수 있도록 하는 것.'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다.

범인은 반드시 현장에 돌아온다는 말을 떠올리며 유심히 살폈지만 범인을 찾을 수 없었다.

기억에 따르면 범인은 50대 남성 무림인이었는데 현장에 있던 50대 남성들을 유심히 살폈으나 무림인인 사람조차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었다.

일부러 무공을 감춘다 해도 천마심공에 기반한 도진의 기감(氣感)은 현대 무림의 것을 아득히 뛰어넘기에 경지 고하를 막론하고 피해갈 수 없으니 정말 없다고 봐야 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대로 가만있을 순 없다.

그러나 오랜 시간을 지켜보는 동안 이어진 생각이 복잡해져 답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상미의 보호소가 불타는 것만 막고자 한다면 일은 쉬워진다.

하지만 도기로서의 도진은, 동시에 백성을 구제하는 마교의 마도(魔道)를 추구하는 도진은 가능하면 최대한 피해없이 사건을 해결하고 싶어했다.

뚜벅.

그렇게 골몰하던 도진은 문득 가까워지는 기척과 구둣발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거리를 좁히던 경찰과 시선이 마주했는데, 그 경찰의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분명히…….'

강치환 사건으로 인해 얼굴을 마주했던 경찰.

그리고 현상금을 도진에게 건네주었던 경찰.

바로 이 근처 경찰서에서 근무하는 임 경사였다.

"김도진 학생?"

눈이 마주친 임 경사가 조심스레 도진을 불렀다.

"네. 임 경사님."

도진이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사는 곳이 이 근처였지. 걱정이 돼서 보고 있는 거야?"

그때와 달리 임 경사의 어조가 조심스럽다.

열일곱 무림인은 성인 취급을 받는다. 거기에 평범한 무림고 학생도 아니고 무려 '잠룡' 김도진이니 태도가 조심스러워진 것이었다.

허나 도진은 그런 바뀐 태도에 신경쓰는 대신 아까 하던 고민을 계속했다.

'…은밀하게 무림맹이 나서도록 하는 게 최선이지 않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결국 사건이 일어날 뿐이다.

임 경사를 통해 은밀하게 무림맹이 나서도록 하고 그때부터는 이런 쪽의 전문가인 사람들에게 맡기는 게 맞지 않을까.

…도진이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콰아아앙!

"……!!"

도진과 임 경사의 고개가 같은 방향으로 돌아갔다.

아니, 둘만이 아니라 이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같은 방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밤의 어둠을 훤히 밝히는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이런 미친!!"

임 경사가 소리치며 다급히 몸을 움직였다.

대번에 급박한 무전이 이어졌고 자정이 넘어 조용하던 동네가 다시 혼란에 휩싸였다.

그렇게 몰아치는 혼란에서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우두커니 선 도진이 있었다.

-그놈이 오늘 두 곳에 불을 지른 것이냐?

이 시기엔 아직 회복에 집중해 바깥의 사건을 모르는 위지혁이 물었다.

도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곳은…… 며칠 뒤 두 번째로 화재가 일어난 곳입니다.

도진이 알고 있던 미래가, 개입하지 않았음에도 바뀌어 있었다.

* * * *

현장으로 달려간 도진은 불길이 치솟은 곳이 기억대로 두 번째 방화가 일어난 곳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20년 가까이 된 과거의 일, 심지어 그리 유심히 본 사건도 아니었으나 그 내용이 꽤 기억에 남아 있었다.

두 번째 화재는 시내의 상가 건물 중 한곳이었다. 특정 장소까지 기억하진 못했으나 시내의 상가 건물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했고 지금 눈앞에 불타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시내의 상가 건물이었으니까.

'…왜 사건이 바뀐 거지?'

도진은 아직 이 사건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저 이곳에 있었던 것만으로 사건이 바뀌었을 거라 생각하긴 힘들었다.

'아니, 사건이 무조건 그때랑 같이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어.'

미래가, 운명이란 게 무조건 고정된 게 아니라면 결국 불확정성의 연속에 따라 사건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렇게 고민하던 도진은 곧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맞든 아니든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중요한 건 바로 지금 어떻게 행동할 것이냐이고 도진은 결론을 내렸다.

밤하늘을 때려 울리는 사이렌 소리 아래 인파를 막고 있던 경찰들 중 한 명에게로 도진이 다가갔다.

그 경찰, 임 경사는 접근하는 도진과 시선을 마주하곤 멈칫했다.

"임 경사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 * * *

도진은 임 경사와 함께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길게 끌 것 없이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임 경사님, 이번 사건의 범인은 무림인입니다."

"……!!"

임 경사의 눈이 커졌다.

무림인의 범죄. 그것은 그 자체로 전담 대책 본부가 설치될 만큼 중대한 사안이었다.

"…그 말, 확실한 거야?"

"네. 불이 일어난 곳 주위의 전봇대 위를 확인해 보세요. 이동한 흔적이 남아 있을 겁니다."

"……."

전봇대 위.

그곳은 조사 범위가 아니었고 애초에 고려 범위조차 아니었던 곳이었다.

지금 단계에서 화재는 실화, 그러니까 실수로 인해 일어난 일 쪽으로 초점이 맞춰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도진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보통 사건이 아닌 무림인에 의한 범죄, '무림 범죄'로 사건의 급이 달라져 버린다.

"혹시, 범인을 봤나?"

"아뇨. 범인은 못 봤습니다. 다만 제가 추종술을 배웠는데 우연히 전봇대 위에서 흔적을 발견해서 이렇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렇군."

거짓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도진은 장호에게 배운 추종술로 이미 전봇대 위를 확인했고 범인이 이동한 흔적을 발견했다.

전생에서 본 기사에서 범인이 전봇대 위로 이동해 초기에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바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범인은 마두지만 계획적이고 조심성이 많은 놈일 겁니다. 대놓고 움직였다간 잠적하거나 다른 곳으로 이동해 범행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그걸 감안해서 움직여야 합니다."

평범한 학생이 이런 말을 했다면, 하다 못해 이름없는 무림고의 학생이 이런 말을 했다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그 말을 하는 게 후기지수라면, 그것도 현재 그 이름값이 치솟은 잠룡이라면 결코 흘려넘길 수 없는 무게가 담긴 말이 된다.

임 경사는 진지하게 힘주어 말하는 도진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제보 고마워. 무림맹에 은밀히 보고할 수 있도록 할게."

"감사합니다."

"아니, 오히려 이런 중요한 제보를 해줘서 내가 감사한 일이지."

그렇게 말한 임 경사는 확실히 약속을 지켰다.

다음날 아침 연달아 발생한 화재에 관해 신문과 뉴스에서 크게 보도했지만 그것이 무림 범죄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문월동에는 무림인으로서의 존재감을 감추는 훈련을 받은 전문 요원들이 마을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경계를 하기 시작했다.

천마심공에 기반한 기감을 가지고 있으며 심상세계에서 장호가 알려 주었기에 도진은 그것을 정확하게 찾아낼 수 있었으나 웬만한 무림인들은 결코 알아채지 못할 만큼 그들의 은신이자 변장 기술은 대단했다.

그리고 그렇게 무림맹 요원들이 돌아다니게 된 길거리에서.

"다음은 뭐 먹으러 갈까?"

도진은 한유아와 함께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