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숭무고는 고등학교이지만 대학교의 색채가 강한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정해진 수업으로 채워진 시간표 대신 학생들 스스로가 원하는 수업을 선택하여 원하는 대로 시간표를 짠다.
따로 교실도 없고 반도 없다.
'지도 교수'라는 제도가 있지만 유명무실해서 그 지도 교수가 누군지도 모르고 넘어가는 학생마저 있을 정도였다.
심지어 '과'조차 나뉘지 않고 완벽하게 개인의 단위로 학교를 다닐 수 있는 게 숭무고였다.
학생들을 방치하는 건 아니다.
전담 의료팀부터 시작해 전문 교수, 트레이닝 코치 등 전반적인 지원 시스템을 대한민국 최고라는 명성에 부족하지 않도록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그저 그런 게 필요없을 만큼 대단한 집안의 자제들이 대부분인 게 숭무고이기에 신청하는 학생이 별로 없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학생들의 집합이기에, 숭무고에는 보이지 않지만 더욱 엄격한 '스쿨 카스트'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곳의 학생들이 '상류층'이기에.
상류층은 그것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수많은 '맥'으로 얽혀 있다. 작은 사회로서의 학교를 넘어 진짜 사회 단위에서 얽혀 있단 말이다.
이를테면 원청의 집안과 하청의 집안이 있다.
그 집안의 상하 관계가 곧 학교에서까지, 학생들의 상하 관계로 이어지는 것이다.
사회에서의 계층이 학교에까지 고스란히 적용되는 곳.
힘의 논리가 적용되는 무림학교에 사회의 계층까지 적용되기에 숭무고의 '계급'은 더욱 잔혹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 '에스포 사단'이었다.
태양권가, 군홍무가, 관현그룹.
대한민국에서도 손꼽히는 배경을 두고 그 배경 덕분에 무공까지 높은 수준으로 익혔으니 어느 쪽으로도 대적할 수가 없다.
이들을 중심으로 무공과 집안을 갖춘 학생들이 모이니 다른 학생들은 눈치를 보고 심기를 거스를까 고개를 숙여야 했다.
함께 수업을 듣는, 숭무고도 아니고 숭무영재고의 학생들은 더더욱 눈치를 봐야 했고.
아마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괴롭힘 또한 적지 않았을 것이다.
상류층인 만큼 그 수준이 상상을 넘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것을 도진이 일일이 구원해 줄 수는 없었다.
사람을 구원해 준다는 건 보이는 것의 수 배, 혹은 수십 배나 되는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 하는 일이니까.
어설프게 개입하면 오히려 희망이 아닌 독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적어도 눈앞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생각을 실현해냈다.
전력으로 덤빈 권민국을 압도적으로 찍어누를 수 있는 도진은 집행부에 소속되어 있다.
그 집행부의 도진이 에스포와 대립하고 있기에 본래 '일진'으로 기세등등하게 날뛰어야 했던 에스포 사단은 적어도 도진과 같은 장소에선 함부로 목소리조차 높이지 못했다.
명분을 주어 개입당했을 때 최소한의 자존심조차 챙길 수 없다는 걸 그 좋은 머리들로 인지하고 있었으니까.
'그 권민국'마저 대번에 무릎 꿇린 도진이다. 그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도진이 듣는 수업에서만큼은 더 이상 없을 정도로 수업이 평화로웠다.
에스포 사단의 학생들은 불편했겠지만 그건 도진이 알 바가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 눈에 밟히는 것이라면 레드슈의 세 사람이 도진과 거리를 둔다는 점이었다.
곽필섭과 같은 수업을 듣지 않는 시간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말 그대로 도진과 접점을 두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기색이었다.
'관계가 많이 껄끄러워졌으니 그렇겠지.'
저번 일로 도진과 곽필섭의 관계가 아주 많이 나빠졌다.
이런 상황에서 곽필섭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의 투자를 받는 회사의 소속인 레드슈가 도진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여줄 순 없는 노릇이다.
이 부분은 도진이 어찌해 줄 수가 없다.
이번 활동이 성공적으로 끝났음에도 표정이 좋지 않아 보이지만, 매니저도 아닌 도진이 나서서 케어해 줄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렇게 수업이 끝나고 다 같이 모여 점심을 먹었다.
도진에 소담, 오대용에 주정아까지. 나지윤은 오늘도 참석하지 않았다.
"뭐 먹을래?"
"오~ 네가 쏘는 거야?"
"…그래."
주정아가 조금 과장된 목소리와 함께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오대용이 그것을 애써 무시하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도진이 합류했다.
"우리 대용이가 사준다는데 비싼 거 한 번 먹어볼까?"
"찬성!"
조금 서툰 오대용은 이런 식으로 무어라도 하나 더 해주려고 하는 게 티가 났고 그래서 놀리는 맛이 있었다.
주정아와 도진이 합이 맞아 오대용을 놀리고 오대용은 애써 그것을 외면하다 결국 한 마디를 하고 만다.
소담은 조용히 옆에서 웃고.
수련계를 냈던 일주일 동안은 볼 수 없었던 그 광경이 자연스럽게 재현되었다.
"너희가 오늘 학문 수업이 일찍 있었지?"
"응."
수요일 2교시인 무공 개론 수업을 함께 듣기에 도진을 포함한 넷은 수업이 끝나고 함께 점심을 먹게 되었다.
다만 오대용과 주정아는 점심 시간을 짧게 잡고 그만큼 오후의 학문 시간을 일찍 듣도록 오늘 시간표를 짰기에 밥을 먹자마자 수업에 들어가야 했다.
그래서 도진은 밥을 다 먹고 일어났을 때 인사를 했다.
"그럼 내일 보자."
마지막 수업인 학문 수업을 듣고 나면 오대용과 주정아는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것도 아니니 집으로 돌아갈 것이었기에 인사를 했는데 주정아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글쎄. 곧 다시 만나게 될 거 같은데?"
"어디서?"
"그건 곧 알게 되지 않을까?"
조금은 짓궂게 웃으며 말하는 주정아. 그런 주정아의 말을 또 어디서 들은 듯한 느낌이 드는 도진이었다.
결국 주정아는 끝까지 답을 말해주지 않고 오대용과 함께 손을 흔들고선 사라졌다.
"짐작가는 거 있어?"
"잘 모르겠어."
정답을 소담도 모르는 듯 했기에 도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주정아가 말한 '곧'을 기다리기로 했다.
소화도 시킬 겸 느긋하게 소담과 산책을 하다 학문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집행부 활동을 위해 집행부실 앞에 섰을 때, 도진은 주정아가 말한 '곧'이 이때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응, 안녕."
한유아와 민지서에게 인사를 한 도진과 소담의 시선이 좌측으로 향했다.
거기엔 같은 1학년 부원인 나지윤과 함께, 점심 시간에 헤어졌던 오대용과 주정아가 서 있었다.
주정아가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다시 만났네?"
"응, 그러네. 설마 너희……."
"맞아. 입부하려고 왔어."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허나 결코 나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일이다.
"안 그래도 집행부 일이 너희 세 사람만 하기엔 너무 많지 않나 했었거든. 근데 마침 이렇게 두 사람이 입부 신청을 해 줬어."
"그 많은 걸 선배는 지서 선배랑 둘이서 하고 있지 않나요?"
"지서가 유능해서 우린 괜찮아."
씨익 웃으며 말하는 한유아. 그렇게 말하는 한유아 또한 워낙 유능한 사람이었기에 민지서와 단둘이서 집행부의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것임을, 요즘 행정 쪽 업무를 배우고 있는 도진은 깨닫고 있었다.
사실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많아 이대로 한유아와 민지서가 3학년이 되어 손을 떼면 감당이 될까 고민이 되던 게 사실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인원이 충원된 것이었다.
"잘 됐네. 역시 셋보단 다섯이 좋지."
그리고 그 다섯이 모두 친구 사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다.
"네, 그렇죠."
도진은 웃으며 한유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
주정아와 오대용은 합류하자마자 행정 쪽 인수인계를 받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더 잘 적응하고 빠르게 배워 나갔다.
"나는 어릴 적부터 회사 경영에 관해서 배우고 있었거든."
주정아는 본래 무림학교 진학보다 회사의 경영 쪽에 뜻을 두었던 만큼 어렵지 않게 한유아가 가르쳐 주는 것들을 습득했다.
"어렵지 않군요."
그리고 오대용마저 도진의 기대 아닌 기대를 배신하고 엘리트스런 면모를 보여 주었는데, 사실 오대용 또한 실력으로 숭무고에 합격할 만큼의 천재였으니 이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끙. 그러고보면 다 천재들이었지.'
새삼 그것을 자각한 도진은 집행부 활동이 끝나고 조금 더 열심히 연신극기공을 수련했다.
사실 근래 들어 조금은 자만할 뻔 했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자신이 천재가 아님을 자각하게 된 도진이었다.
물론 도진 또한 이제는 '재능 없는 일반인'이 아니었다.
연신극기공으로 한계를 거듭 초월하며 이치를 깨달아가는 도진은 육체는 물론 영혼까지 트이고 있었으니까.
다만 도진이 원하는 곳이 하늘 너머이기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연신극기공의 수련을 끝내고 샤워를 마친 도진이 푹신한 침대 위에 늘어져 있을 때였다.
'음?'
벨소리와 함께 휴대폰이 울렸다.
손을 뻗어 확인해 보니 동생 유진이의 전화였다.
메신저도 아니고 굳이 전화를 한 게 조금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빠르게 전화를 받으니,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듣게 되었다.
-오빠, 우리 동네에 불 났어!
"……!"
* * * *
도진은 급히 기숙사를 박차고 나와 슈킨팍시에 올랐다.
액셀을 밟고 도로를 달려 문월동으로 향했다.
'화재.'
다닥다닥 집들이 붙어 있는 달동네에서 화재는 보통 무서운 일이 아니었다.
무허가 건축물이 많고 보험조차 엄두도 못낼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으니 더더욱 말이다.
다행……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아선 안 될 일이지만 천만다행으로 도진의 집은 크게 번진 화재에서 벗어나 있었다.
도로가 끝나고 좁은 길로 접어드니 곧 문월동의 입구가 보였다.
평소엔 동네를 관통하는, 차가 다닐 수 있는 넓이의 그 길이 소방차와 사람들로 막혀 있었다.
이미 몇 채를 태우고 덩치를 한껏 불린 화마(火魔)는 소방관들의 노력으로 더 번지지 않고 조금씩이나마 꺼지는 중이었다.
"안 돼! 안 돼애애애애애!!"
"내 집! 내 집!!"
어두워진 밤하늘 아래 구토가 나올 것처럼 진하게 일렁이는 커다란 불.
그 불에 비치는 절규하는 사람들.
검댕이 묻은 채 겨우 목숨을 건져 나왔으나 그 건진 목숨을 어떻게 건사해야 할지 까마득한 사람들이었다.
도진이 처음 보는 광경.
그러나, 이 사건 자체는 도진의 기억 속에 있는 것이었다.
-…동생들은 무사하다고 하지 않았더냐. 한데도 이렇게 급히 달려왔다는 것은 무언가 다른 사정이 있는 게냐?
-……예.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게 차를 주차하고 내렸다.
큰 화재에 동네 사람들이 모두 뛰쳐 나왔다.
그렇게 모인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도진은 어렵지 않게 구경꾼들 사이에 섞여 있는 동생들을 찾아냈다.
"오빠!"
"형아!"
달려온 동생들을 품었다.
"불 금방 꺼지겠지?"
"응, 그럴 거야."
실제로 이 화재는 신고가 늦었다면 동네의 절반을 태웠을 만큼 크게 번질 수도 있었는데 신고가 빨라 빠르게 확산되던 중에 급제동이 걸리며 진압되었다.
사망자도 없었다.
문제는.
-이게 시작입니다.
-시작이라고? 그러면 이게 연쇄 방화란 게냐?
-예.
전생에 이 사건이 있었을 때 도진은 기숙사에 있었다.
문월고의 기숙사.
그래서 이 사건을 짧은 뉴스 한 토막으로 접했는데, 이후로도 동일인의 소행으로 여겨지는 화재가 몇 건이나 이어져 큰 사건으로 번졌다.
그리고 도진이 이렇게 급하게 달려온 이유.
-앞으로 이어지는 방화 장소 중 한 곳이, 상미가 있는 보호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