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한강을 낀 평범한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우측으로 꺾이는 전용 도로가 한 차선 있다.
이 차선으로 진입해 가면 고급스런 톨게이트 같은 곳을 마주하게 되는데, 이곳이 다름 아닌 숭무고 전용 출입 도로와 남문(南門)이었다.
혹시라도 잘못 진입하는 경우가 없도록 갈림길 전부터 크게 표지판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동시에 안내선까지 500m 전에서부터 색칠이 되어 있다.
이 남문은 등록이 되어 있는 차량, 등록이 되어 있지 않다면 미리 통행을 허가받은 차량만이 통과할 수 있으며 허가마저 받지 않았다면 따로 검문을 거쳐야 할 만큼 출입이 어려운 곳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 무림학교이면서 동시에 대한민국의 상징이 되는 숭무고이기에 출입 절차를 엄중하게 따지는 것이다.
버스 정류장이 인접한 정문에 비해 과하지 않은가 싶지만 사실 정문은 평범해 보이기에 더더욱 엄중한 보안 체계를 갖추고 있다.
그렇게 수준 높은 보안 체계를 갖춘 숭무고의 남문을 도진은 아무런 제지 없이 통과했다.
면허를 따는 동안 주정아와 한유아, 민지서 덕분에 모든 절차를 마쳐 두었기 때문이다.
"너 차 생겼잖아. 미리 등록해 둬야 타고 다닐 수 있어."
주정아의 조언 덕분에 숭무고 내에 차를 들이기 위해선 따로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절차를 한유아와 민지서가 도와줘서 단번에 해결할 수 있었다.
"학생 차량으로 등록해 뒀고 안면 인식 시스템에 정보 등록도 돼 있으니까 전용 차로로 다니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지서 선배."
안면 인식 시스템이란 첨단 장비로 탑승한 운전자와 동승자의 얼굴을 인식, 등록된 인물일 경우 별도 절차 없이 통행할 수 있도록 갖춰둔 시스템을 뜻한다.
예전엔 학생이라 해도 일일이 지문이나 홍채 인식을 거쳐야 출입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 안면 인식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하이 패스처럼 바로 출입이 가능해졌다고 민지서는 도진에게 설명해 주었다.
남문을 통과해 조금 더 가면 넓은 주차장이 나온다.
그야말로 고급차 전시장이라고 해도 될 만큼 온갖 고급차로 가득한 이곳이 바로 방문자와 학생들을 위한 주차장이다.
한 가지 특이점은 마치 구역을 나눈 것처럼 한쪽은 외제차를 포함한 고급차가 모여 있고 다른 한쪽은 '평범한 차량'들이 모여 있다는 것이다.
마치 숭무고와 숭무영재고의 특권층과 그 외가 나뉘는 것처럼 말이다.
도진은 그렇게 나뉜 주차장의 정가운데 슈킨팍시를 세웠다.
별 의미없이, 주차장 출구와 가까운 곳에 주차한 것이었지만 그 위치가 정가운데여서 조금 묘한 구도를 만들었다.
주차장을 나온 도진은 느긋이 걸어 기숙사로 향했다.
그렇게 걷는 동안 여러 시선이 도진에게로 향했는데, 그 시선의 성질이 막 입학했을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처음 도진이 학교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시선의 대부분은 적대적이었다.
지금 시대에선 무림출도와 함께 볼 수 없게 된 개천에서 난 용.
하지만 특권층에서는 용이 아니라 여전히 미꾸라지로 여겨졌다.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들의 배움터인 숭무고의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
그런 감정을 담은 시선들이 유독 강렬했다.
숭무영재고를 포함한 생각보다 많은 학생들은 도진에 대해 별 감정이 없었다.
부럽다. 대단하다. 아니면 관심없다.
이런 시선들은 거기에 담긴 감정이 강하지 않았기에 감정이 강하게 실린, 그리고 뭉쳐진 적대적인 시선들이 부각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젠 다르다.
적대적인 시선은 도진에게 꽂히지 못하고 선망의 시선들이 바람처럼 스쳐간다.
도진이 그렇게 바뀌도록 만들었다.
도진을 적대하는 특권층의 상징이자 정수라 할 수 있었던 에스포.
그 에스포를 도진이 깨부숨으로써.
중간고사에서 도진은 3:3 팀전을 통하여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압도적인 무위를 증명했다.
심지어, 에스포의 리더였던 권민국마저 압도적으로 제압해 버렸다.
이성을 잃은 권민국은 자제하지 않고 내공을 폭발시켰으며 진신무공을 사용해 덤벼들었다.
그런 권민국을, 도진은 맞상대하여 단 두 수로 찍어 눌렀다.
검도 아닌 주먹을 마주 뻗어 열양지기의 정권을 깨부쉈으며 이어진 발차기로 제자리에 돌려보낸 뒤 무릎 꿇리고 머리를 박게 만들었다.
그 광경이 마치 도진을 인정하지 않으려 들던 세력 전체를 무릎 꿇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로써 이제 도진에게 함부로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는 학생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속으로야 도진을 탐탁지 않아 해도 함부로 겉에 드러내지 못한다.
설령 드러낸다 해도 도진과 눈이라도 마주칠라면 황급히 시선을 거둔다.
적나라하게 말하면 꼬리 내린 개처럼 말이다.
도진은 그렇게 적대적인 학생들을 꼬리 내린 개로 만들 정도의 힘을 보여 주었고 그 힘에 걸맞는 명성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느긋하지만 당당한, 강자의 모습으로 벚꽃길에 접어든 도진은 곧 미소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응, 안녕."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 서 있는 소담과 인사를 주고받은 뒤 함께 걸었다.
"집에는 잘 다녀왔어?"
"응. 너는 아침 잘 챙겨 먹었어?"
"응."
흐드러지게 피었던 벚꽃이 다 진 5월 중순.
쌓여가는 시간만큼 소담과의 인연도 깊어진 느낌이었다.
일상이 된 함께 걷는 벚꽃길.
그리고 그 일상에 새로 쌓은 인연이 다가왔다.
"안녕!"
"그래, 안녕. 오늘은 같이 왔네?"
활기차게 인사하는 단발 머리의 시원시원한 그녀는 다름 아닌 주정아였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는 일주일간 학교에 나오지 않았던 오대용이 함께 서 있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오대용은 '수련계(修練屆)'를 냈다.
그러니까 '수련 때문에 출석하기 어렵다는 사유서'를 제출한 것이다.
숭무고는 무공 증진을 위한 정당한 사유가 있다면 얼마든지 그 성과로 출석을 대신할 수 있다.
당장 집행부의 일원인 2학년의 검봉 유지은과 폭룡 류대현이 그 수련계를 내고 폐관 수련 중이고 말이다.
류대현의 경우 가문의 집중 수련 때문에 짧게 수련계를 냈으나 깨달음을 얻어 폐관 수련으로 전환하며 수련계를 갱신했는데 이런 것도 가능할 만큼 숭무고의 수련계는 너그러운 편이었다.
다만 이렇게 제출이 너그러운 건 그만큼 수련의 성과를 증명하고 평가하는 것이 엄중하기 때문이다.
수련계를 제출한 학생은 '출결관리감독회'에 그 성과를 보여야만 한다.
여기서 성과가 기준에 미달한다면 미달한 만큼 출결 점수가 깎이게 된다.
이는 낙제나 유급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만큼 치명적인데 평가 기준이 생각보다 빡빡하기 때문에 수련계를 내는 건 고민이 필요한 일이었다.
오대용은 바로 그 수련계를 내고 일주일간 학교에 나오지 않았는데, 그 사유가 다름 아닌 사자군 오군성의 특별 지도였다.
3:3 팀전에서 권민국을 꺾으면서 오대용은 작지만 커다란 한 걸음을 내딛었다.
오대용이 익힌 무공의 근본.
사자군 오군성의 독문무공에 입문하기 위한 마음가짐과 기세를 상징하는 '사자천권'에 드디어 발을 들인 것이다.
그로써 오대용은.
"다음 단계를 전수하마."
몸과 마음을 속박하고 있던 과거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어때? 성과는?"
씨익 웃으며 묻는 도진의 시선을 오대용은 슬쩍 피했다.
그러나 그것은 외면이 아니었다.
그저 부끄러움이었다.
"…나쁘지 않았어."
고개를 돌리며 읊조리듯 말하는 오대용. 그러나 그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생기가 깃들어 있다.
드디어 입문하게 된 할아버지의 무공은 상상 이상으로 어렵고 가혹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무릎을 지탱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지만, 그러나 오대용은 무너지지 않았다.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어 몇 번이고 무뚝뚝한 얼굴의 할아버지에게 되물어야 했지만 움츠러들거나 기죽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그럴 시간에 한 번 더 주먹을 뻗는 게 낫다는 것을 이제 아니까.
걸음은 조금 더뎌도 된다. 중요한 것은 그 걸음을 결코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 마음가짐이 조금은 느리지만 꾸준한 성취를 얻도록 해 주었다.
그리고 그 성취가 오늘 오후에 있을 평가에서도 분명히 기준을 넘는 성과를 증명해 줄 것이었다.
"…아침 먹었냐?"
"응? 먹었지."
"그래. 그럼 이거 먹어라. ……너도."
함께 걸으며 오대용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불쑥 내밀었다.
마치 한약팩처럼 보이는 것이 두 개였는데, 실제로 그것은 보약을 담은 팩이었다.
"보혈탕(補血湯)?"
보혈탕. 그것은 오성에서 내놓은 '영약 시리즈' 중 하나였다.
정련단이 내공 증진에 도움을 준다면 이 보혈탕은 육체를 북돋는 효과가 있다.
쉽게 말해 보약이란 말이다.
그리고 이 보약은 정련단과 같은 시리즈인 만큼 보통 가격이 아닌데 오대용은 그걸 가져와 도진에게 내민 것이다.
소담과 같이 먹으라며 두 개를.
눈을 마주치진 않고 팔만 주욱 내민 그 모습에, 도진은 피식 웃으며 보혈탕을 받았다.
"고맙다. 잘 마실게."
"잘 마실게."
"그래."
도진에게서 하나를 나눠 받은 소담이 함께 인사하니 오대용은 여전히 시선을 맞추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제법 귀엽다고 도진은 생각하고 말았다.
보혈탕은 그러니까 오대용 나름의 고마움의 표시였다.
도와줘서 고맙다고 직접적으로 말하긴 부끄러운데 표현은 하고 싶어서 이렇게 말 대신 물건을 쓰윽 내미는 것이다.
도진에게만 주는 건 안 될 말이니 아직은 조금 어색한 소담의 것까지 같이.
놓으면 안 되는 것을 놓으려 했던, 텅 비어 버렸던 때와 달리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오대용은 조금 서툰 녀석이었다.
소꿉친구인 주정아를 제외하면 곁에 있던 것이 에스포와 그 무리 말고는 눈치를 보는, 친구라고 할 만한 사이가 아닌 또래가 전부였기에.
'이런 사이'를 겪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오대용은 조금 서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괜찮다.
이 또한 인연과 시간이 쌓이면서 저절로 익숙해질 것이었으니까.
"나 주려고 일부러 가져온 거지?"
"……."
"니 성의가 들어 있어서 그런가 약이 좀 달다?"
"…닥치고 마시기나 해."
"낄낄낄."
그러니까 도진은 씨익 웃으며 오대용이 어색해하는 모습을 당분간 즐기기로 했다.
* * * *
중간고사 이후로 수업의 분위기는 묘하게, 그러나 확연하게 달라졌다.
마치 자신들의 영역이라고 과시하듯 뭉쳐서 자리를 차지하고 떠들던 에스포 사단의 기세는 완전히 죽어 있었다.
패배한 리더가 자퇴로 완전히 퇴장해 버렸다.
여기에 사실상 무리를 이끌던 곽필섭은 물론이요 무진혁마저 당시의 일로 인해 침묵하고 있으니 한때 기세등등했으나 주정아에게 패배하며 자신의 자리를 자각한 금준혁은 물론이요 에스포에 기대 호가호위하던 학생들 또한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비어 버린 자리를 채운 것이 도진의 존재감이었다.
도진은 언제나처럼 앞자리에 앉아 수업을 들을 뿐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았다.
허나 맹수가 그저 엎드려 있다 해서 존재감을 상실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조용히 엎드려 있기에 더욱 크나큰 존재감을 발산한다.
시선을 끌어서는 안 된다고, 이 고요함을 깨서는 안 된다고 의식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침묵'에 도진은.
'나쁘지 않네.'
옅게 입꼬리를 올리며 만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