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숭무고의 참관 제도는 수업뿐 아니라 시험에까지 적용된다.
수업이야 그렇다치지만 심지어 시험에까지 참관이 가능한 건 숭무고가 무림학교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현대 무림인의 특성과도 관련이 있었다.
현대 무림인의 성공적인 진로는 '스포츠 스타'였다.
무공 또한 크게 분류하면 스포츠이니 부와 명예까지 거머쥘 수 있는 스포츠 스타가 되는 게 가장 이상적인 성공, 혹은 성공을 위한 발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스포츠 스타가 되기 위해 필요한 건 두말할 것도 없이 '명성'이다.
이 명성을 떨치기 위해선 스스로를 알리고 어필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를 위한 수단 중 하나로 참관 제도가 자리를 잡은 것이다.
참관 제도를 통하여 학생은 학창 시절부터 자신을 어필할 수 있고 업계의 관련자들은 필요한 인재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스포츠 스타까진 아니어도 최소한 헤드헌터들의 눈에 띌 수만 있다면 좋은 조건의 회사에 입사할 수 있는 기회가 올 수 있으니 참관 제도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런 연유로 탄생한 참관 제도에 시험이다.
그동안 배우고 익힌 것을 증명하는 자리.
이것만큼 취지에 부합하는 것이 없으니 무림학교에서 시험에 여러 인사들이 참관하는 건 오히려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미친! 사자군 오군성이 왜 여길 와?!'
사자군 오군성이 참관하는 건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아니, 흔하지 않은 걸 넘어 아예 상식을 벗어난 경우였다.
제아무리 숭무고라지만 1학년의, 그것도 겨우 기초 수업의 중간고사 시험에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거물이 참관하다니 평범한 동네 대장장이들의 경연 대회에 우벽진이 심사위원으로 나타나면 이럴까 싶을 정도로 과한 일이었다.
심지어 그 경연 대회에 비리가 있었는데 과도한 시선이 모이게 생겼으니 비리에 얽힌 인물이라면 머리를 쥐어뜯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엽랑 오창명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 시험은 무조건 참관이 가능해야 합니다.
태양권가의 후계자인 권민국의 책사라 할 수 있는 인물의 발언이었고 거기에 일을 꾸민 모두가 동의했다.
이번 일이 대중에 흘러드는 것만큼은 막았지만 '알 만한 사람들'에게는 모두 퍼져 버렸다.
그들만의 리그 내에서 이미 에스포와 그 집안의 명예는 훼손되어 버린 것이다.
그 훼손된 명예를 복구하기 위해선 3:3 팀전에서 기필코 권민국의 팀이 이겨야만 한다.
그리고 그 결과가 널리 퍼져 나가야 했다.
결국 남는 건 결과이니까.
일반적으로 어떤 사건이든 시간이 지나 겉에 남는 건 결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과만 알고 접하게 되니까.
소수의 관심있는 사람들이나 과정을 찾아보니까.
그러니까 3:3 팀전에서 이기기만 하면 된다.
훼손된 명예를, 손해를 감수하기엔 그것이 너무 컸다.
안고 갈 수 없을 만큼 큰 손해. 그러니까 차라리 남은 걸 모두 그러모아 역전에 걸기로 판단하고 참관을 허용했다.
3:3 팀전에서 이기고 그 결과를 참관인들이 퍼뜨리게 만든다.
그것으로 과정을 덮고 결과를 대중에게까지 퍼뜨리기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잠룡 김도진과 태양권가 권민국이 리더로 있는 에스포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에스포가 이겼다더라.
이 결과를 퍼뜨리고 남기면 된다.
한데 이 계획에 사자군 오군성은 결단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이건 그리던 그림의 도화지 자체를 찢어 버릴 만큼, 너무 커다란 변수였다.
'기호지세(騎虎之勢)야.'
하지만 오창명은 주먹을 콱 쥐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미 계획은 실행되었고 되돌릴 수 없다.
말 그대로 호랑이 등에 타 버린 형국이란 말이다.
이렇게 된 것 그대로 밀고 나가는 것 이외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괜찮아. 책잡힐 만한 건 남겨두지 않았어.'
계획은 완벽했다.
누가 보아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도록 판을 짰다.
대표적으로 두 개의 토너먼트로 나누고 김도진의 팀과 서소담의 팀이 따로 배치되도록 한 것부터가 그렇다.
이번 중간고사에서 김도진의 팀과 서소담의 팀은 부딪치지 않는다.
일부러 그렇게 배치했다.
김도진의 팀과 맞붙는 학생들 다수는 오창명과, 혹은 권민국 등의 에스포와 얽혀 있어 여러 경로로 최대한 김도진의 체력과 내공을 소모시키라 언질해 두었지만 역시 책잡힐 부분은 하나도 없도록 신경을 썼다.
이를테면 오동관이다.
기명 제자 자리를 바라는 오동관에게 오창명은 '최선을 다해라, 죽기 직전까지 지독하게 물고 늘어져라'고 말했다.
본뜻은 김도진의 체력과 내공을 소모시키라는 것이지만 겉으로는 기명 제자로 삼으려고 눈여겨 본 학생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격려 차원에서 한 말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도 '물증'을 남겨두지 않았다.
여기에 심증조차도 잡기 어려우니 이토록 예상을 넘어선 과도한 관심과 변수가 끼어들어도 탈이 날 일은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한데 그 탈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터졌다.
"하아아아아!!"
3:3 팀전의 첫 번째 시합.
첫 시합부터 김도진의 팀이, 그것도 김도진이 선봉으로 연무장에 섰다.
사자군 오군성이 참관을 결정한 것이 김도진 때문이라는 추측이 유력했기에 참관한 모든 인사의 주목이 집중되었다.
"시작!"
그 주목 속에서 오동관이 힘찬 기합과 함께 주먹을 내질렀다.
긴장했음에도 숭무영재고의 학생답게 흐트러지지 않고 빈틈없이 내뻗은 정권이었다.
과하게 힘을 주지 않고 어디까지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선수(先手)에 충실한 정권.
오창명마저 고개를 끄덕일 만큼 깔끔한 그 정권을, 도진은 너무나 쉽게 피해 버렸다.
'……!!'
그것은, 무흔잠영이 아니었다.
그저 오동관의 시야를 벗어날 만큼 빠르고 또 절묘한 한 걸음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한 걸음이 승부를 결정지었다.
퍼억!
대각선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상체를 숙였다.
동체 시력을 넘어선 속도와 계산된 움직임으로 오동관의 시야에서 사라진 도진은 지체없이 백설을 휘둘러 사정거리 밖에서 급소를 가격, 오동관을 기절시킨 것이었다.
"기, 김도진 승!"
심판을 보던 무인마저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칠 정도로 찰나의, 그러나 압도적인 한 판이었다.
"허어, 저건 이미 1학년이 아닌데."
"그러게 말입니다. 이 정도로 수준 차이가 나다니……."
"오군성 회장님이 괜히 눈여겨 보신 게 아니군요, 역시."
참관인들 또한 찰나의 승부에 웅성거렸다.
내공을 사용할 뿐 오직 기초적인 무공만을 이용하여 겨뤄야 하는 룰이었다.
성취야 차이가 날 수 있다지만 아직, 모두 같은 1학년이다.
기초적인 무공만을 사용한다면 격차가 있다 해도 어지간해서는 상대를 압도할 수 없는 룰이란 말이다.
한데 그런 룰 안에서 도진은 상대를 단 한 수로 압도해 버렸다.
심지어 아예 기절까지 시켰다.
무림인에게 있어 상처를 입히지 않고, 해하지 않고 상대를 기절시키는 건 불가능이 아니었지만 웬만큼 수준 차이가 나지 않고서야 실행하기 힘든 일이었다.
한데 도진은 그것마저 해냈다.
그것은, 도진의 경지가 근본적인 부분에서부터 오동관을 압도할 만큼 높다는 걸 의미했다.
도진은 그것을 연달아 증명했다.
"하압!"
오동관의 다음은 창을 쓰는 학생이었다.
긴 리치를 철저하게 이용하여 히트 앤드 런 전법을 구사하려 했다.
'찰'의 수법을 이용하여 최대한의 거리를 두면서 체력을 소모시키려는 의도였다.
쓸 수 있는 수법이 제한되어 있는 만큼, 그리고 '얕은 내공이 약점'인 만큼 억지로 뚫으려다간 체력과 내공이 과하게 소모되고 만다.
그것만으로도 맡은 역할을 다할 수 있으니 어느 쪽이든 괜찮다는 생각이었지만, 그 또한 계산 착오였다.
쾅!
"크학?!"
도진은 찔러오는 창을 백설을 강하게 휘둘러 쳐내 버렸다.
최대한의 거리를 둔다는 건 손에서부터 창까지의 거리 또한 최대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 끝에 충격을 주면, 손에 가해지는 부담 또한 최대가 된다.
심지어 그 충격은 다름 아닌 연신극기공으로 단련된 도진의 힘으로 생성된 충격이었다.
손아귀가 단번에 찢어지며 상대는 창을 놓치는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거기에 대한 충격, 당황. 그로 인해 생긴 빈틈.
그것으로 끝이었다.
퍽!
"컥."
단 두 수. 그리고 역시나 찰나.
"기, 김도진 승!"
도진은 승부를 결정지었다.
그 다음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앞서의 결과들에 더욱 긴장해 오히려 더 허무하게 승부가 나고 말았다.
어찌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마음이 초식에 담겨 버렸고 너무나 허무하게 그 초식이 파훼당하고 바닥에 누워 버렸다.
"압도적이군."
"……예."
오군성의 말에 수행 비서인 오정우는 진심으로 그렇게 답했다.
도진은, 정말로 압도적이었다.
그 옆에서 진행되는 3:3 팀전이 서로가 마지막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치열했기에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내공은 자유롭게 사용하는데 사용하는 초식은 기초적인 것들로만 제한된다.
그러니까 방어력은 엄청나게 높아졌는데 공격 수단은 그 방어를 뚫기 어려울 정도로 빈약한 상황이다.
이렇게 되면 보통은 마지막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체력이 고갈되어 빈틈이 드러날 때 그것을 찌르는 등의 양상이 되는 게 보통이었다.
단련 정도에 따라 내공과 육체에 차이가 있다면, 그리고 그 기초 무공을 구사하는 학생의 경지가 높다면 상대를 압도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반항조차 못할 만큼의 차이가 나기는 힘들다.
서로가 구사하는 '기본 초식'을 꿰고 있으니까.
그 기본 초식에 대한 이해가 낮다면 오히려 경지에서 앞섬에도 고전할 수 있는, 무인 그 자체의 역량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게 3:3 팀전이었다.
그렇기에 앞서 치러졌던 도진의 '3연승'이 경악스러운 것이다.
'도대체 누가 가르친 것인지 궁금해지는군.'
오군성이 처음 본 도진은 사자군마저 두 눈을 의심할 정도로 거대한 기초 공사가 진행 중인 광경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거대하고 또 높은 것을 지으려고 하기에 이렇게까지 말도 안 되는 규모의 기초 공사가 진행 중인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도진은 무공의 기초를 쌓고 있었다.
그래서 '잠룡(潛龍)'이었다.
아직은 하늘에 오르지 못하고 물 속에 잠겨 있는 용.
하늘에 오르기 위해선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대기만성의 무인.
오군성의 안목은 도진을 꿰뚫어 볼 정도로 대단했고 그 안목으로 도진의 상태를 정확하게 짚어냈다.
그렇게 파악했던 잠룡의 경지가 심상치 않았다.
분명히 더 오랜 시간이 걸렸어야만 할 성장을 이룩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났는데 귀신 같이 기초 공사가 끝나고 건물이 올라가고 있다면 이러할까 싶었다.
이런 기세라면 잠시 눈을 뗀 순간 승천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비상식적인 성장 속도였다.
'…시간을 가속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놀랍게도 그것은 반쯤은 정확한 생각이었지만,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생각하며 오군성은 그 생각을 폐기해 버렸다.
그렇게 여러 생각을 하며 지켜보는 도진은 다음 시합에서도, 그 다음 시합에서도 혼자서, 압도적으로 상대 세 명을 모조리 격파해 버렸다.
오군성에게도 선언했던 대로 오대용을 권민국의 앞에, 그것도 만전의 상태로 데려다줄 기세로.
"이거 완전 트럭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검봉이 생각나게 만드는 학생이네요."
"작년에 검봉을 보면서 또 이런 학생이 나오긴 할까 싶었는데 바로 이런 인재가 나와 버리네."
트럭.
파죽지세로, 압도적인 기세로 상대들을 쓰러뜨리는 모습을 비유하는 말이었다.
도진은 그 트럭이란 비유가 오히려 모자라다는 생각이 들 만큼 압도적으로, 그리고 빠르게 상대를 제압해 나갔다.
이런 기세라면 심지어 권민국의 팀마저 문제없이 혼자서 제압해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는 버티지 못할 텐데, 무슨 생각이냐?'
오군성의 속으로 한 물음에 마치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후욱!"
연무장에 선 도진에게서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터억!
상체를 숙인 도진의 손이 무릎을 짚었다.
그 모습을 보고 굳어 있던 권민국의, 곽필섭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쿠웅!
그리고 도진이 다음 상대할 팀의 선봉은, 이번 3:3 팀전에 한정하여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히던 외공의 소유자 정중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