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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112화 (112/741)

112화

도진과 오군성의 오늘 만남은 '초면'이라 할 수 있는 자리였다.

서로 같은 공간에는 몇 번 있었지만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적이 없었으니까.

바로 그 초면에 다짜고짜 '영약을 달라'고 한 도진이었으니 이것은 분명히 무례라 지적할 수 있을 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사자군 오군성은 친우인 호군자 주대운과 달리 그런 무례를 어린 학생의 실수로 덮어줄 만큼 자비로운 성격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경악하여 몸이 굳었던 것이고.

"오 회장님의 손자이니까요."

도진의 그 말은 분명히 가슴을 울리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말이었다.

당사자인 오대용도, 오대용의 누나인 오성아도, 오랜 세월 일하며 두 사람의 성장을 지켜봤던 가정부의 마음까지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깊이가 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오군성의 마음만큼은 움직이지 못했다.

사자의 심장을 가진 오군성은 그러한 정에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말했다.

"잠룡 김도진. 자네는 나에게 감정으로 호소해서는 안 돼. 어디까지나 이성으로, 합당한 근거를 가지고 나에게 말해야만 해."

감정으로 호소하지 말라고.

어디까지나 이성으로, 합당한 근거를 가지고 말해야만 한다고.

그러면서 일으킨 기세는 합당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무례에 대한 분명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임을 경고하고 있었다.

'자,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

방금의 호소가 나름의, 회심의 한 수였다면.

그래서 기세에 짓눌리고, 뒤를 수습할 방도를 찾지 못해 헤맨다면.

오군성은 실망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실망은 지금껏 잠룡 김도진에 대해 가졌던 기대마저 거두도록 만들 것이었다.

바보가 아니니 그 상황을 분명히 인식했을 도진은.

씨익-

그러나 오히려 자신있게 웃었다.

'……!'

그리하여 천하의 오군성마저 눈을 조금 크게 뜨도록 만든 도진은 자신 있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이성적이고 합당한 근거. 그거라면, 오히려 쉬운 이야기네요."

"쉽다?"

"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리도 자신감을 보인단 말인가.

오군성의 의문에 도진은 이렇게 말했다.

"대용이가 권민국을 이길 겁니다. 그러니까 오 회장님이 영약을 하나 내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무언가 놓친 게 있는 것인가.

그런 생각마저 잠시 들었으나 그럴 리가 없었다.

사자군 오군성이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서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그게 어째서 이성적이고 합당한 근거가 된단 말인가?"

"간단합니다. 오성의 오대용이, 태양권가의 권민국을, 후계자를 이기는 일이니까요. 오성의 무공이, 태양권가의 무공에 전혀 부족하지 않다는 인식을 세상에 퍼뜨려 줄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도진의 시선이 오군성에게서 떠나 거실의 한 켠에 우두커니 서 있던 오성아에게로 향했다.

"성아 누나."

"아! 응?!"

갑작스런 도진의 부름에 오성아가 깜짝 놀라며 답했다.

도진은 미소를 보여주며 물었다.

"오성의 무공이 태양권가의 무공에 비해 전혀 부족하지 않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과연 얼마나 되는 선전비가 들어갈까요?"

"선전비?"

"네. 요즘 세상은 이미지가 중요하잖아요. 오성이 그런 이미지를 가질 수 있다면 저는 정말로 큰 유무형적인 이익이 될 거 같은데, 아닌가요?"

"그…… 렇지."

사회의 유명한 집단일수록 이미지가 중요하다.

그것이 대기업이라면, 그리고 문파라면 이미지 관리는 이미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된다.

당장 단순히 잘 만든 물건이 되느냐 명품이 되느냐가 바로 그 이미지로 인해 나뉘어지니 말이다.

"오성은 무림 관련 사업을 주력으로 삼고 있죠. 이런 오성이 단순한 대기업이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무림 세가인 태양권가 못지 않은 무공 또한 보유하고 있다는 인식이 생긴다면 어떨까요?"

사자군 오군성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대한민국 최고수 중 한 명이다.

그러나 그런 오군성이 일궈낸 오성은 무림 세가가 아닌 '대기업'으로만 인식되고 있다.

'무림인 오군성'과 '대기업 오성'은 완전히 별개로 취급되고 있다는 말이다.

한데 여기에 손자인 오대용이, 오군성에게 사사받았던 오대용이 태양권가의 후계자를 이긴다면?

오성의 일가는 무림 세가 못지 않은 무공 실력 또한 보유하고 있다는 인식이 더해지는 것이다.

기초적인 초식만 가지고 싸운다는 특별한 룰이 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무인 그 자체의 실력'이 중요해지니까.

이 이미지가 가져올 이득은 상상 이상으로 크다.

"오 회장님은 제가 원하는 영약이 20억 원 정도의 가치를 가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이미지의 가치가 20억 원 정도는 충분히 넘는다고 자부합니다."

정에 호소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건 꼭 해야만 하는, 큰 이득을 가져올 투자입니다."

그래서 도진은 이것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길 커다란 메리트가 있는 투자로 설명했다.

정에 호소하지 말라고?

그러면 말했듯 도진에겐 오히려 더욱 쉬운 일이었다.

사자군 오군성의 정에 호소하는 건 너무나 지난한 일이었으니까.

얼마나 절절히 말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에 비해 '투자'가 되면 얼마나 일이 쉬워지는가.

이것은 그야말로 무조건 해야만 할, 하면 이득을 볼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봐라.

당장 오군성 또한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가.

"그래, 그렇군. 분명히 그 말대로야."

길고 자세하게 예시까지 들어가며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맨손으로 지금의 오성을 일궈낸 불세출의 사업가인 오군성은 도진이 말한 '이미지의 이득'을 도진 이상으로 이해했다.

이해했기에 다시 물었다.

"허나 그건 오대용이 권민국을 이겼을 때의 일이지. 그렇지 않은가?"

"네. 그렇죠."

"하지만 나는 대용이가 권민국을 이길 거라는 확신을 가질 수가 없군. 리스크가 큰 일에 굳이 20억이나 되는 투자를 할 이유가 있나?"

"……."

그것은 오대용에게 또 한 번 상처를 주는 말이었으나 지극히 합당한 지적이기도 했다.

그 지적에, 도진은 이번에도 망설임없이 답했다.

"아직 대용이를 믿으실 수 없다면, 대용이가 이길 거라 믿는 잠룡 김도진을 믿어주십시오."

"잠룡 김도진을?"

"예. 잠룡이라는 별호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오 회장님으로 인해 탄생한 게 아닙니까. 오 회장님께서 직접 저를 보고, 그만한 후기지수라 생각해서 그렇게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그 말대로였다.

오군성은 스스로의 안목을 신뢰했고 그 안목으로 분명히 보고 판단하여 도진을 잠룡이라 불렀다.

"아직 보여준 게 없어 대용이를 믿지 못하시겠다면 함께 시간을 보내며 대용이를 보고 또 겪은 잠룡 김도진을, 오대용을 믿는 잠룡 김도진을 믿고 투자해 주십시오."

"……."

오대용이 아닌 오대용을 믿는 김도진을 믿어라.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기에, 예상을 뛰어넘었기에 오군성은 크게 웃었다.

"으하하하하!! 그래! 오대용을 믿는 김도진을, 내가 본 김도진을 믿으라? 그야말로 합당한 근거로구나! 으하하하하!!"

쩌렁쩌렁 울리는 그 웃음은 정말로 유쾌하여 웃는, 그러나 사자의 포효를 닮아 있어서 마주한 상대를 이유없이 불안하게 만든다.

허나 도진은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으니까.

크게 웃은 오군성은 그렇게 한 치의 불안이나 의심조차 보이지 않는 도진의 모습에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다. 그거라면 한 번 투자를 해 볼 만하구나. 영약을 주도록 하마."

"……!!"

결국 나온 그 말에 지켜보던 오성아와 가정부의 눈에 놀람이 번져갔다.

"다만."

허나 아직 끝이 아니었다.

"이건 짚고 넘어가야겠지. 대용이가 권민국을 이기지 못한다면 너는 어찌할 테냐?"

이것은 엄밀히 말해 '투자 계약'이다. 그러니까 성패에 따른 내용 또한 짚고 넘어가야만 했다.

도진은 이번에도 지체하지 않았다.

"영약의 가치만큼 저의 미래를 지불하도록 하겠습니다."

"미래?"

"네. 잠룡 김도진의 이름을 걸었으니 그게 맞지 않겠습니까."

오군성은 도진의 대답에 흡족하게 웃었다.

"그래, 그렇군. 그러면 되겠어."

그리고 그 웃음에 약간의 짓궂음을 담고선 말했다.

"이를테면…… 내 손녀, 성아와 혼인하여 오성을 위해 일하도록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네, 네?!"

갑자기 언급된 자신의 이름과 내용에 오성아가 화들짝 놀라 저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그리고 또 스스로 소리친 것에 두 번 놀라 허둥거리고 만다.

도진은 오성아의 그런 모습에 슬쩍 웃으며 전혀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성아 누나라면 나쁜 상대는 아니지만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네요. 하지만 뭐, 따지고 보면 이게 통짜 신용 대출 같은 거니까 이자가 세도 별 수 없긴 하죠. 받아들이겠습니다."

후기지수라고 하지만 아직 어린 학생인데 배짱은 물론이요 여유 또한 보통이 아니다.

요즘 세대의 아이라면 어떤 이유에서든, 대표적으로 '정략 결혼'의 언급만으로도 발끈할 법한데 그런 티조차 내지 않는다.

세월에 한 15년 정도 닳고 닳는다면 보일 수 있을까 싶은 모습이다.

오군성은 점점 더 끓어오르는 인재욕을 느끼며 말했다.

"그래, 그럼 성공했을 경우 자네가 바라는 건 뭔가?"

이건 일의 성패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패만이 아니라 성의 경우 또한 짚고 넘어가야 했다.

허나 도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요. 제가 바라는 건 영약을 받는 것이었고 그게 성사되었으니 따로 바랄 게 없습니다."

"게다가 이건 무조건 성공할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요. 애초에 제가 이길 수밖에 없는 일인데 여기에 조건까지 거는 건 너무 저한테만 좋은 일이잖습니까."

"……."

한 치의 의심조차 보이지 않는 확신.

그것이 단순한 치기가 아니었기에 오군성은 자극을 받았다.

자극을 받았기에,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자네가 미래를 걸었는데 이 오군성이 아무것도 걸지 않아서야 말이 되지 않지. 그래, 이렇게 하도록 하지."

오군성이 말에 힘을 담아 선언했다.

"일이 성공한다면 자네가 원할 때 한 번,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자네를 돕도록 하지."

"……!!"

* * * *

오군성과의 정식 첫 대면이 끝나고 도진은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저택을 나왔다.

오성아, 오대용 남매가 배웅하기 위해 함께 나왔다.

남매의 얼굴에는 폭풍처럼 지나간 일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어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오대용의 얼굴엔 걱정과 부담 또한 한가득이었다.

"야, 김도……!"

퍽!

걱정스레 입을 열었던 오대용은 갑자기 날아온 주먹을 황급히 막아냈다.

그 주먹의 주인인 도진은 무슨 짓이냐고 말하려는 오대용보다 한 발 앞서 말했다.

"이 주먹, 권민국은 못 막았을 거야. 하지만 넌 막았지. 무슨 뜻인지 알지?"

"……."

"걱정하지 마. 말했잖아. 너를 믿는 나를 믿으라고. 스스로를 못 믿겠으면 나를 믿어. 믿고 의심하지 마. 그걸로 충분하니까."

온 세상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고서도 무공을 놓지 못하고 노력을 쌓아 왔던 오대용이다.

그러니까 정말로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 필요한 건 오직 하나.

그렇게 쌓아 온, 그리고 앞으로도 쌓아 나갈 시간과 노력을 믿는 것 뿐이다.

그걸로 충분했다.

* * * *

오군성은 약속을 지켰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단 3일만에 상등품의 영약을 구해 직접 오대용에게 복용시켰다.

오대용의 내공은 영약에 힘입어 급증했고, 권민국에게 전혀 밀리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불어난 내공에 적응하며 오대용은 도진과의 수련에 매진했고 시간은 금방 흘러 5월에 접어들었다.

중간고사 시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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